[영화/관람평/스포X] 왕과 사는 남자(2026)

노산군을 단종으로 대하며 마지막까지 따랐던 충신 엄홍도

by 뇨리

* 역사 자체가 스포입니다. 결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스포를 원하지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금요일인데 야근을 하다 어차피 주말에 출근할 건데 퇴근하자 하며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10분 남기고 '왕과 사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 단종에 대한 역사극이라 <관상>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했는데 역사 자체가 아닌 그곳에 있었던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감독이 장항준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장항준 감독의 유쾌한 성격과 진정성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볍게 즐길 수 있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은 영화였다.


역사 속 인물들과 관계 : 단종은 어떤 왕이었나?


영화의 인물과 시대 배경을 계유정난 이후로 구성한 것은 뛰어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했다면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패배한 이미지로 그려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단종은 어리고, 유약하고, 힘이 없는 패배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수양대군 자체가 등장하지 않으며, 단종을 왕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인 이홍위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패배한 왕이 아닌 이홍위라는 사람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 구도는 명확하다.

'폐위된 이홍위와 유배 온 마을의 촌장 엄홍도 VS 현 조선의 실세 한명회' 구조이다.

이홍위와 엄홍도는 배우의 이미지나 연기 방식 때문에 매우 다른 두 캐릭터의 버디 무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화 속 이홍위와 엄홍도는 사실상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은 모두 실질적 권력이 없는 왕이다. 이홍위는 폐위된 왕의 위치이고, 엄홍도 또한 한 마을의 촌장으로 사실상 왕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둘 다 현실에 좌절한 모습이지만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는 모습은 왕의 모습으로서 닮아있다. 반대로, 한명회는 왕은 아니지만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역사 속에서 단종의 이미지는 세조와 권력자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결에서 진 패배자의 기록이 아닌 이홍위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과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기의 사람들을 지키려는 태도


유해진 배우가 맡은 엄홍도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향을 혹평하여 유배지로 만들었다. 자신과 마을 사람이 더욱 잘 살기 위한 욕심이기도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들이 관아에 끌려갔을 때 그는 한명회에게 자신이 시킨 일이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아들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진실을 밝히고 증언을 선택하려던 이홍위 또한 역사적 증언보다는 자신의 백성들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사람을 살리는 것을 택하며,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엄홍도 또한 자신의 왕이 역사적 패배자로서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충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저 목숨만을 지켜주는 것을 뛰어넘어 주군의 명예 또한 지키려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화의 모든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연출로써 등장하는데, 엄홍도는 사슴에게 활을 쏘지만 번번히 빗맞춘다. 하지만, 마지막 호랑이에게 물리는 사슴을 자신의 화살로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짧은 일화로써 보여준다.


영화의 좋았던 점/아쉬웠던 점


영화의 강점은 단연 배우들과 연기력이다. 영화는 역사의 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무겁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유해진 자체가 사극과 코미디에 잘 어울리고, 긴장된 상황을 배우 특유의 웃긴 연기로 완화시켜 준다. 유해진 배우가 엄홍도라는 인물에 딱 맞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홍위 역을 맡은 박지훈 배우는 삶의 의지가 없는 모습부터 진중한 모습까지를 연기한다. 사실, 이전에 박지훈 배우에 대해 잘 몰랐다. 어찌 보면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훈 배우가 유해진 배우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영화에서는 두 명의 인물 모두 무너지지 않고 주인공성을 끝까지 이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두 주인공을 한 번에 제압하는 한명회의 이미지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마지막, 전미도 배우까지 과하지 않고 왕의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캐릭터를 잘 연기하고 있다.


영화의 아쉬웠던 부분은 몇몇 조연들을 더 드러내거나 아예 없앴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중반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의 민심을 얻은 것이 결말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부분이 아쉽다. 게다가, 유해진의 아들 태산은 초중반 힘을 주어 그리다가 중후반에는 캐릭터성을 잃고 이야기에서 제외된다. 마치, 영화의 초반에 구상했던 주제성이 후반부에 급격하게 변했는데 그 방향이 운 좋게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초반의 노루골 이야기 또한 엄홍도의 욕망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상적으로 그려졌지만 제외해도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감독의 스타일로 본다면 유쾌하게 넘길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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