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람평/약스포] 햄넷(2025)

삶의 비극이 예술 속에서 희극으로 되살아난다

by 뇨리

* 영화의 일부 후반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더 깊고 자세한 이야기는 향후 다시 올리겠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과 그의 아들 햄넷(Hamnet)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설에서 출발한 픽션이다. 16~17세기에는 두 이름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는 기록과 아들 햄넷이 흑사병으로 죽고 7년 뒤에 햄릿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아들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햄릿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영화 후반부에나 등장한다. 이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명성에 영화의 주제나 감정선이 묻힐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약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화의 주인공은 아내인 '아녜스'인데, 영화는 그녀의 상황과 감정 나아가 연극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녀를 위로하고, 애도한다.


스토리만 본다면 매우 단순하고 자칫 진부한 스토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름다운 자연과 영상미, 나아가 배우들의 숨을 죽이게 하는 연기와 폭발하는 감정으로 관객들에게 사무치는 여운을 준다. 연극으로 대변되는 예술이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쌍둥이: 햄넷(현실에서의 죽음)과 햄릿(예술에서의 부활)


영화에서 햄넷은 쌍둥이다. 어머니인 아녜스는 남편 '윌리엄'에게서 쌍둥이를 낳게 된다. 쌍둥이 중 남자아이의 이름은 '햄넷'이고, 여자 아이의 이름은 '주디스'이다. 이 둘은 영화 속에서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부모를 속이는 장난을 자주 한다. 그만큼 서로를 아끼고, 나아가 자신처럼 아끼는 사이일 것이다. 당시에 흑사병이 세상을 휩쓸었고, 불행하게 쌍둥이 중 주디스가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빠진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아녜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딸을 살리려 하지만 병세는 더욱 심해진다. 모두 지쳐 잠든 밤, 햄넷은 사신을 속이기 위해 주디스의 자리에 누워 자신이 대신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디스를 살린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쌍둥이 관계가 많이 등장한다. 햄넷과 주디스, 시간(죽음)과 삶, 희극(Comedy)과 비극(Tragedy), 현실과 예술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여 죽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햄넷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아녜스는 큰 상실감으로, 윌리엄은 큰 죄책감으로 빠져든다. 그때부터 아녜스는 시간이 멈춘 죽음 속에 머무르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아녜스는 타인의 손에 의해 남편이 쓴 <햄릿(Hamlet)>이라는 연극을 보러 런던으로 향한다. 과거 아들이 죽는 자리에 없었던 남편을 원망하고, 머릿속 세상에서 나와 현실의 죽은 아들을 직시하라던 아녜스가 연극 세상에 들어간 것은 어쩌면 숙명처럼 보인다. 연극 초반부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멋대로 사용한 남편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만, 햄릿이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한 순간 그녀는 그대로 예술의 세계로 빠져들어 다시 살아난 아들을 만난다. 그 연극에서는 윌리엄은 선왕의 배역을 맡는데, 이로써 아버지는 대사를 통해 자신이 아들 대신 죽었어야 했던 것을 한탄한다. 이는 아버지가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아들 대신 죽음으로써 그의 죄책감을 씻어내고, 대신 아들을 부활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image.png

아녜스는 그러한 남편의 죄책감과 사무치는 고통을 마주한다. 그 뒤에 그녀는 다시 살아난 아들의 손을 마주 잡은 뒤 그제야 모든 분노와 슬픔의 감정과 함께 아들을 떠나보낸다. 마지막에 돌아보는 햄넷에게 그녀는 '앞으로도 기억할게'라는 손짓을 하고, 햄넷은 그대로 연극 무대 중앙의 공간으로 되돌아 퇴장한다.


예술은 꿈의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 속에서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은 예술을 통해 영생을 꿈꾼다. 이 영화에서처럼 예술 속에서 햄넷은 햄릿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예술은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의 행위이고, 죽음을 대신하여 다른 의미의 영생을 준다. 또한, 현실의 숲에서도 슬픔과 분노로 고통받던 아녜스도 숲 그림으로 꾸며진 예술의 무대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전에는 비극(Tragedy)이었던 아녜스와 햄넷의 삶이 예술을 통해 다른 쌍둥이의 모습인 희극(Comedy)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이는 이 영화의 엔딩은 진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예술의 세계는 꿈의 세계지만, 그것이 죽음 앞에 선 인간을 살아가게 만든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단편적인 이야기를 이토록 뛰어나게 만드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단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들 수 있다. 아녜스를 연기한 배우 '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대단하다. 영화 자체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보다는 그의 아내인 아녜스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즉, 중요한 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아내인 아녜스가 아들을 잃고 남편의 연극을 보는 데까지 변화하는 그녀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을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녜스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제시 버클리는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신비로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 마지막 아들을 떠나보낼 때의 표정은 짧은 쇼트지만 수많은 감정과 의미를 전달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햄넷을 연기한 '자코비 주프'이다. 모든 장면을 나오지는 않지만 모든 장면 속에서 아른거린다. 쌍둥이 주디스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사신을 속이기 위한 행동의 연기는 '아역배우 치고'라는 단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매우 몰입력이 있다. 마치, 햄릿이라는 주인공의 실사화 모습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아버지 윌이 아들에게 '용감해지라'고 말하며 안아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의 아이의 다짐과 주디스 대신 용감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영웅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의 연기는 <햄넷>에 몰입을 뛰어넘어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image.png

영화 후반부의 연극에서 햄릿을 연기한 배우 '노아 주프'는 실제 햄넷을 연기한 '자코비 주프'의 친형이다. 연극 속에서 처음 햄릿이 등장했을 때 '다른 배우가 등장했구나'가 아닌 '시간이 지나 햄넷이 자랐구나'라고 느껴졌다. 영화의 편집이 아닌 배우와 연기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표현하는 부분이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눈에 띄는 연출 : 시간(사신)의 시점쇼트


영화에서 쌍둥이 아역배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방 안을 훑으며 '천천히 패닝' 한다. 쌍둥이들은 서로 떠들며 물건을 찾는데 카메라는 배우를 잡지 않는다. 마치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종종 이렇게 묘한 카메라 무빙을 보여준다. 마치 공간 어딘가에 떠 있는 무언가의 시점쇼트처럼 보인다. 집 안을 천천히 패닝 하는 장면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주디스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햄넷이 당황하는 상황에서도 카메라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무심하게 천천히 패닝 하면서 그 장면을 지나친다. 무력한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해도 시간과 죽음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카메라 무빙을 통해 보여주는 탁월한 장면이다.


또한, 햄넷이 주디스 대신 사신을 속이는 장면에서도 햄넷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는 사신이 찾아왔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를 통해 앞서 말한 모든 장면이 사실은 사신의 시점쇼트처럼 생각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사신보다는 시간의 시점인 듯 보인다. 인간의 삶을 무심히 바라보는 그 시점의 주체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image.png


작가의 이전글[영화/관람평/약스포] 센티멘탈 밸류(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