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회피하는 현대인들이 느껴야 할 수치심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영화를 먼저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영화는 가히 파격적이다. 마스터베이션, 포르노, 원나잇, 콜걸, 음란 채팅과 같은 소재들이 날것 그대로 등장하고, 주인공인 마이클 패스벤더의 나체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자극적이고 야한 것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이고, 그보다 뛰어난 연출과 장면들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우울함과 고독,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주인공인 브랜든과 그의 여동생 씨씨. 회사 사장인 데이비드와 여직원인 메리안이 전부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브랜든이 영화 속에서 씨씨와 데이비드의 위치에 위치하며 그들 자체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브랜든이 테이블에 앉아 야동을 바라보는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브랜든의 뒤에는 전화기가 있는데, 음성메시지가 여동생에게만 오는 것을 봐서 이 전화기는 씨씨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오빠의 사생활을 동생이 보고 있는 구도이다. 여동생 이름 씨씨는 'See'라는 동음이의어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오빠의 마음속에 들어가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한다.
더 흥미로운 점은 브랜든도 그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영화 속에서 브랜든과 씨씨는 닮아있다. 영화 초반 지하철에서 브랜든은 결혼반지를 낀 여자에게 접근한다. 물론 진지한 관계를 위함이 아닌 오로지 성적인 목적이다. 이 모습은 씨씨와 사장 데이비드의 관계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씨씨도 가정이 있는 사장과 몸을 섞게 되는데 그 장소는 브랜든의 침대이다. 그때 브랜든은 닫힌 문 밖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인 것이다. 즉, 씨씨는 브랜든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고, 브랜든의 추한 내면을 바라보는 그 자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브랜든은 '역겨움과 분노'에 휩싸인다. 영화 후반부에서 동생에게 쏟아놓는 일침들은 뒤집어보면 자신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제껏 브랜든은 현실과 자신의 내면에게서 눈을 돌리고 회피해 왔다. 영화는 그런 그에게 여동생이 찾아오게 되면서 자신의 추악함을 바라보는 과정을 다룬다.
브랜든이 화가 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직장 사장인 데이비드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장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브랜든은 여동생에게 사실은 자기에게 했어야 했던 말들을 쏟아내게 되고, 화해나 회복 없이 집을 나가버린다. 이후 브랜든은 자신이 혐오했던 사장의 모습으로 추락하게 된다. 술집에 간 브랜든은 모르는 여자에게 너절한 말들을 쏟아내며 유혹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사장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주인공들은 서로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 자체를 경험하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추잡함이 나에게도 그래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이제껏 지켜본 추악한 모습들이 우리 속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제목은 shame. 즉, 수치심이다. 영화는 여동생 씨씨가 찾아오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브랜든이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브랜든이 느끼는 수치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랜든이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는 진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영화 초반부 회의 장면에서 데이비드가 냉소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브랜든 자체를 의미한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육체적인 쾌락만을 쫓는다. 그가 섹스 중동에 빠져 음란물에만 빠지게 된 것은 일종의 회피인 셈이다. 진지한 관계를 피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동생 씨씨와 소파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씨씨는 가족인 오빠의 당연한 책무를 이야기하지만, 브랜든은 책임을 회피하며 그것을 족쇄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아픔에서 눈을 돌리게 되고, 거기에는 나 자신의 아픔과 우울함도 포함되어 있다.
브랜든이 밤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보면 아름다운 뉴욕의 뒷거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브랜든이 한참을 달리는 동안 가게는 닫혀 있고, 거리는 어두우며 중요한 것은 길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랜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과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이 현실을 회피한 채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진지한 관계를 회피하고 꿈과 쾌락의 세계로 도망치는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우리는 브랜든을 나 자신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그와 똑같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즉, 관객에게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자신 내면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지 않고 눈을 돌리는 모습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수치심과 죄책감을 갖게 한다. 즉,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 브랜든의 노트북' 자체가 나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지하철에서 브랜든이 모르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단순한 스토리지만 수많은 의미가 들어차 있는 뛰어난 장면으로 보여진다. 브랜든은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그 여성을 바라보고, 그녀도 브랜든의 의미를 알아챈 듯하다. 마치 성적인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그들의 관계를 달리는 지하철로 표현한 듯하다. 중간에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정신을 다잡고 브랜든에게서 눈을 돌린다. 이때, 지하철은 다음 역에 도착하게 되어 멈추고 문이 열리는데, 마치 유혹을 향해 달려가던 생각을 멈추고 내려야 한다는 것을 지하철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앞에 앉은 여성은 다시 브랜든을 바라보게 되고, 열차는 다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여성이 내리려고 일어나 봉을 잡고 브랜든이 그 뒤에 서게 되는데, 아주 의미심장하게 봉이 화면상에서 그 둘 사이에 위치한다. 이는 브랜든과 여성이 성적으로는 끌리고 있지만 둘은 진지하지 않은 단절된 관계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봉은 마치 브랜든이 넘으면 안 되는 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선을 넘어 그녀를 따라간다.
이 장면은 뒤에서 다시 등장한다. 브랜든이 진지한 관계를 가져보려고 노력하며 회사 여직원과 식사를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끊긴다. 둘의 생각과 관계도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장면에도 둘 사이를 창문틀이 가로막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처음의 지하철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하지만, 브랜든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처음에 여성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던 브랜든은 상대가 자신을 유혹하는 눈빛에도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치심을 느꼈다. 지독한 수치심은 현실을 회피하던 사람들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유혹을 끊어내는 브랜든의 모습을 보여주듯 지하철이 서서히 멈추며 영화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