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람평/결말포함] 프랑켄슈타인 (2025)

by 뇨리

*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개봉한 지는 체감상 꽤 된 듯하다. 회사일이 바쁜 탓도 있지만 원작인 <프랑켄슈타인>의 내용을 알고 있어서 조바심이 덜했나 보다. 기예모르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연출력에 끌려 보러 가게 되었는데 역시 원작의 스토리가 탄탄하게 받쳐주고, 감독 특유의 연출력과 동화의 톤이 더해지니 즐길거리가 매우 풍부했다. 보는 내내 고전 소설로, 동화로, 현대의 오페라의 형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의 스토리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작품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이 아닌 그 생명체를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다시 느낀 것이지만 영화의 중심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맞는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과 크리처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보일 수도 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서 후자의 관계에 더 힘을 실어서 표현하고 있다.


빅터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관심이 없는 아버지였다. 단지 자신의 명성을 위해 아들을 위대한 외과의사로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학 지식을 가르치면서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면 혼을 냈는데, 영화에서 빅터의 아버지는 손은 의지를 실현시키는 도구라고 말하며 허영의 상징인 얼굴만을 회초리로 때린다. 그리고, 빅터의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를 살리지 못했다. 빅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지만, 그의 아버지는 실수였다고 말한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외과의사가 실수를 했겠는가?'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빅터는 죽음조차 극복하겠다는 목표에 집착하듯 휩싸인다.


그런 빅터는 연구를 통해 크리처를 만든다. 크리처가 태어났을 때 빅터는 햇빛을 가르친다. 해는 영어로 'Sun(태양)'이지만 당연하게 동음이의어인 'Son(아들)'으로도 들린다. 그 후에 빅터는 '햇빛 = 생명'이라고도 이야기해 준다. 붉은색의 이미지가 빅터에게는 어머니의 상징인데, 동일하게 자신의 아들로 그려지는 크리처에게도 새빨간 태양을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따뜻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빅터가 사슬로 크리처를 묶어 통제하는 모습이다. 그의 이름인 'Victor(정복자)'에 걸맞은 모습이다. 게다가, 크리처가 계속해서 '빅터'만을 되풀이하자 자신이 크리처를 만든 것을 '실수'라고 표현한다. 마치 최고의 실력을 가진 아버지가 실수를 했던 과거를 그가 다시 아버지로서 크리처에게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전체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반복되는 갈등화해의 이야기로 보인다. 처음 태어난 크리처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의 혹독함을 겪으면서 크리처는 점차 괴물이 되어간다. 크리처가 괴물이 된 시점은 빅터가 크리처를 버린 시점부터이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빅터도 자신의 한쪽 다리를 잃고 다시는 똑바로 서지 못하게 된다.

아버지인 빅터와 크리처는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 죽이기 위해, 서로를 반복하여 쫓는다. 화해를 하지 않은 불편한 관계를 영화에서는 태양이 뜨지 않는 어두운 풍경으로 그리고 있다. 마침내, 마지막에 가서야 빅터와 크리처는 대화를 하게 되고, 그제야 서로는 다시 처음처럼 회복되지는 않지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하게 된다. 아버지인 빅터의 유언이었던 '한 때 너의 세상의 전부였던 나의 이름을 다시 불러다오'라는 대사는 빅터와 아버지의 관계, 빅터와 크리처의 관계로 이어지던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이름을 다시 되찾으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크리처를 괴물이 아닌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크리처는 다시 떠오르는 태양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뜻하게 끝난다.



내면의 괴물에 대한 스토리


크리처를 괴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태어났을 때 크리처는 괴물은 아니었다.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속 크리처가 태어났을 때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보였다. 게다가, 감독은 크리처를 현대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고 한다. 크리처는 여러 사람의 시체 조각을 엮어서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쟁의 시대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다시 크리처로서 부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게다가, 탄생하는 순간도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붉은 망토를 걸친 모습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갓 태어난 크리처는 순수하고 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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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리처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빅터'만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는 실망하면서 되려 억압한다. 빅터가 크리처를 버린 이유는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빅터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를 사랑할 수 없었다. 이야기 구조상 빅터와 아버지의 관계가 그대로 빅터와 크리처로 대응되는데, 그렇다면 크리처는 거꾸로 완벽하지 않아서 혼이 나던 아들인 빅터 그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빅터는 자신의 내면에 크리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고, 그의 불완전함 때문에 자신과 크리처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은, 크리처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내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처에게는 성스러운 모습도, 괴물 같은 모습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나의 속에도 빅터가 가졌던 열정적인 면도, 살인자가 되어버린 괴물의 모습도 동시에 존재한다. 영화는 나에게도 '불완전하지 않은 상대와 나의 내면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빅터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괴물을 없애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괴물은 절대 죽지 않는다. 영화는 '완벽해지기 위해 자신 내면의 불완전한 모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라고 못을 박고 있다.


빅터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이다. 그가 이런 2가지 직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다. 과학자로서 빅터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혼을 믿지 않는 의사의 눈으로 본다면 크리처는 단지 시체를 모아 놓은 의미 없는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내면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메시아의 모습으로도, 괴물의 모습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한 끗 차이지만 보이는 모습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빅터처럼 내면의 괴물을 없애려고 한다면 괴물은 사람조차 가차 없이 죽이는 끔찍한 모습으로 나의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고, 영화 속 지혜로운 눈먼 노인처럼 그를 대한다면 가장 친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나'는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꽤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는 영화였다.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갈 것이다.
-바이런-


분노에 찬 크리쳐가 빅터를 좇는 모습은
마치 부모 손을 놓친 아이가 울면서 뛰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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