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지 되돌아갈지 모르고 헤매고 있는 당신에게.
* 영화 <8번 출구>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나온 지 한참이 되어 이번 주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거의 마지막 주인 듯하여 야근을 하다 영화를 보러 달려갔다. 원작 게임이 꽤 유명하고, 소재가 참신했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원작의 공포 게임을 실사화하여 만들었다고 하니 뻔한 내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개봉 초반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적었다. 하지만, 본 사람마다 모두 꽤 수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영화는 굉장히 영리하면서 훌륭한 부분이 많았다. 유명한 공포 장르 게임의 컨셉을 그대로 가져와서 훌륭한 스토리와 접목시켰다는 점이 그렇다. 게다가, 연출과 약간의 장치를 통해서 무한한 공간에 갇힌 상황도 효율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또한, 초반 관객들의 집중력을 얻기 위해 틀린그림찾기라는 소재도 가져왔다. 이런 여러 뛰어난 연출력과 아이디어들이 익숙하지만 허접하지는 않도록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지하철역에 갇혀 이상현상이 있는지를 관찰하며 미로를 헤맨다는 단순한 형식이다. 영화는 원작인 게임의 공간, 분위기를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차용했는데, 이는 사실상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개봉 전 '8번 출구' 게임 원작이라는 정보는 대중보다는 마니아층을 겨냥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이제껏 일본 실사화 영화들이 저질러온 과오들 때문에라도 홍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독의 영리한 연출과 뛰어난 스토리를 통해 그러한 걱정을 넉넉히 극복하고 있다.
영화 속 세트는 굉장히 단순하다. 세트는 새하얀 타일의 벽에 몇 개의 포스터, 문, 락커 등 주변에서 보는 익숙한 주변 소품으로 꾸몄다. 게다가, 카메라는 계속해서 인물을 따라가면서 찍는다. 영화의 제목인 '8'번 출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8'이라는 숫자는 자연스레 '∞(무한대)'가 연상된다. 주인공이 지하철역 복도를 끝없이 걷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당연하게 카메라로 찍는 장면에는 끊김이 있으면 안 된다. 만약 그러면 관객들에게 '공간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카메라는 끈질기게 인물을 따라간다. 중간중간 장면을 끊고 다음 공간으로 이어 붙이는 장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물의 뒷모습을 순간적으로 클로즈업하거나 벽을 훑는 장면을 통해 이전과 다음 장면들을 순간적으로 이어 붙여 무한한 공간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배경 음악으로는 볼레로가 깔리는데, 이 곡은 구조가 매우 단순한데 마지막 몇 마디를 제외하고 두 가지 선율이 악기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 음악 자체도 영화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는 1인칭 시점으로 찍었다. 흔들리는 hand-held 기법으로 찍은 1인칭 시점은 마치 게임의 시작 화면처럼 몰입하게 하면서 인물의 내면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줌으로써 원작 게임을 하지 않았던 관객들도 이미 주인공과 함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상현상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영화를 보면서 틀린그림찾기를 하게 만드는데 이것도 초반에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1인칭 시점으로 지하철역 미로에 갇히는 데까지의 장면들이 끝나고 카메라는 천장에 달린 '8번 출구' 표지판을 가리킨다. '8번 출구'가 영화의 제목인 것을 보면 초반 장면은 일종의 장대한 타이틀 시퀀스이다. 내용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영리한 연출, 인물의 내면까지 한 번에 보여준 뛰어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로에 갇혀 헤매며 틀린 부분을 찾는 것만 반복하면 영화는 자칫 답답함과 지루함을 줄 수 있는데, 매 스테이지마다 동일한 공간을 헤매고 있지만 지루하지 않도록 스토리에 끊임없이 변주를 주고 있다. 이상현상도 조금씩 달라지면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내적, 외적 상황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지루함을 느낄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 계속 같은 공간을 돌고 있지만 사실은 나아가고 있는 일종의 나선형 구조인 것이다.
원작 게임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인터넷상에도 잘 정리되어 있으니 패스하지만, 영화는 원작의 뛰어난 부분은 그대로 선별하여 가져오고, 영화의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들은 선별하여 굉장히 노련하고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영화의 인물과 공간은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은 '헤매는 남자', '걷는 남자', '소년' 뿐이며, 공간은 좁은 복도로 설정하였다. 좁은 복도는 당연하게 앞이나 뒤로 밖에 갈 수 없다. 이러한 공간은 어떠한 방향성을 갖게 되면서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이러한 인물과 장소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의미들을 내포한다.
인물들은 나이도, 직업도 다르지만 이 또한 사회의 방향성을 나타낸다. '걷는 남자'는 이미 사회에 들어간 직장인으로 이전 세대를 나타내며, 주인공들 중 제일 연장자이다. '소년'은 가장 어리면서 아직 사회에 들어가지 않은 다음 세대를 나타낸다. '헤매는 남자'는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그는 인턴이나 취업준비생 정도로 보인다. 걷는 남자는 직장인들이 필수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가식적인 미소를 가지고 있으나, 헤매는 남자는 그러한 웃음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수함도 아직은 잃지 않고 있다.
주인공들이 갇힌 무한한 복도는 시작과 끝이 없으며, 앞쪽과 뒤쪽의 방향성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는 당연스럽게도 현재 우리 사회를 의미한다. 사회에서도 암묵적인 규율이 있는 것처럼 미로 안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상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상현상이 있다면 뒤로 돌아가야 한다. 이 단순한 규칙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헤매는 남자'는 시작부터 망설이고 외면하는 사람이었다. 취업준비생으로 사회에 나가지도 못하며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으며, 여자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대해서도 전진할지 되돌아갈지를 결정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모습은 어른과 아이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는 세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끝없는 공간에 갇혀 헤매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사회에서 헤매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상현상은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도 괜찮다'라고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다음은, 이상현상을 발견하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급급하여 뒤에 남겨진 약자들은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다. 이는 영화에서 가장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걷는 남자는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이상현상을 찾는 모습에서도 그는 포스터나 문의 숫자만을 세고 이상이 없다고 빠르게 전진한다. 마지막에도 그는 넘어진 아이를 외면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미로에 갇혀버린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지하철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쳐가는 어떤 직장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년은 앞선 세대들 때문에 함께 미로에 갇혀 있는 다음 세대이다. 약자들을 외면하며 나아갔던 이전 세대,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지금의 세대 때문에 당연하게 혼란스러운 사회에 다음 세대를 뜻하는 소년도 함께 갇혀 버렸다. 소년은 주위를 살피기 때문에 이상현상을 쉽게 발견하지만 혼자서는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없다. 따라서, 소년은 미로에서 이전 세대로 대표되는 '걷는 남자'와도, 현재 세대를 대표하는 '헤매는 남자'와도 함께 동행한다. 하지만, 소년과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걷는 남자'는 소년보다 앞서서 소년을 끌고 간다. 소년이 이상현상을 발견하고 멈추었을 때에도 강제로 앞으로 잡아 끈다. 그리고, 소년이 넘어졌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 반면에, '헤매는 남자'는 소년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면서 소년이 발견한 이상현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두 인물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똑같이 지하철역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다음 세대와의 공존과 관심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소년과의 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주인공의 핸드폰을 통해 SNS에 올라온 여러 기사들을 보여주는데, 이 SNS 속 내용들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SNS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뒤에서 벌어질 미로 속 이상현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들은 군인들, 폭동으로 학교, 병원, 상점들이 피해를 받았다는 내용, 고양이, 재생의학의 발전으로 몸에 귀가 달린 쥐의 사진, 쓰레기 더미에 사는 노숙자, 바다의 풍경, 쓰나미, 그리고 불균일하게 배치된 조명에 관한 그림이다.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사회의 약자나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런 SNS 속 내용들을 엄지손가락 하나로 슥슥 넘기며 외면해 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아이가 울고 있는 지하철에서 어떤 피곤해 보이는 직장인이 나무라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도 주인공은 그러한 장면을 외면한다. 지하철에 내려서도 그는 헤어지기로 한 여자친구로부터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어떠한 의견도 말하지 못하며 그대로 미로에 갇혀버린다.
이러한 주인공은 미로에 갇혀서야 '이상현상을 발견하면 반드시 돌아가라'라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 '돌아가라'는 말은 '이상현상을 외면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로 보인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생각해 본다면 미로를 탈출하는 여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헤매고 있는 현실에서 이상현상이 없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발견한다면 절대로 외면하지 말라는 메시지 그 자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은 8번 출구를 통해서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 장면은 미로를 탈출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8번째 라운드에 진입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주인공은 똑같은 지하철의 풍경, 무표정으로 핸드폰만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거슬러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의 아기가 우는 지하철칸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이어진다. 다시 처음의 동일한 장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왜 이렇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수미상관으로 배치했을까? 주인공이 영원히 반복되는 미로 속에 아직도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초반부와는 분명하게 달라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반부에는 주인공의 시점 쇼트로 걸어가며 불행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듯 화면이 많이 흔들리는데,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다시 지하철로 들어가는 장면을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가지만 화면은 흔들림이 없다. 마치 인물의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어떠한 굳은 신념이 새로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초반부에서는 헤어진 여성으로부터 오는 전화를 회피하지만, 미로 속에서는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다가, 후반부에서는 먼저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한다. 어쩌면 8이라는 숫자가 영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평생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더 이상은 주변의 이상현상에 외면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돌아가는 것은 보통의 게임에서는 스테이지가 떨어지게 되지만, 이 영화 속 세계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갔을 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어린아이에게 호통치는 사람을 향해 지하철의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며 끝맺는다. 지하철로 대표되는 사회의 진행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지만 주인공은 또다시 다음 단계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표현한 매우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