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없이 칼로 자른 듯한 네모난 블루베리 파이. 정확한 격자를 이루고 있는 칼집 사이로 균일하게 튀어나온 보랏빛 컬러는 그의 신경을 그대로 갈라내어 놓아두는 그릇처럼 생겼다. 해로즈의 윈터 시즌 진열장에 놓여있을 듯한 미니 쿠션 같은 그 네모가 수없이 반복되는 무한한 공간에서 그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격자에 맞게 몸을 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그의 혈류가 혈관을 긁어대며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파이 틀에 들어가는 반죽처럼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맞춘다면 이 모든 걸 꺼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끓는 물과 같은 그 소리에 정신을 떼어두려 두 눈을 감았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은색 쇠구슬이 실에 매달린 채 그의 머리 속에서 양쪽을 오간다.
'진자는 가해진 에너지만큼만 반대편으로 이동합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진자운동의 뒤편에 아까와 같은 보랏빛 격자가 그를 노려보지만 그는 애써 그걸 무시하려 해본다. 왼쪽, 오른쪽... 오가는 은빛 쇠구슬이 만들어내는 정적인 움직임은 그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소음이 밀려와 그의 진자 줄을 끊어버린다. 쇠구슬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보랏빛 격자 패턴의 일부가 비스듬히 비껴져 있다.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 중년 남성의 포쉬한 발음이 좁은 방에 울려 퍼진다. 남자는 자신의 양손을 결박한 수갑을 바라보곤 두 팔을 힘껏 펼쳐보았다. 찰그랑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음이 반갑다. 이내 공간에 던져진 남자는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문이 닫힌다. 공간은 아까 전보다 좁지만 의자와 책상이 있으며 그를 반겨주는 한 중년 남자도 있다.
"인테리어, 1점. 디자인 패턴이 너무 단조로워. 식사, 1점. 같은 메뉴만 가져오니까 식상하잖아. 지배인? 0점. 뭘 개선하려는 생각도 없으면서 빈 질문을 해대는 게 더 재수 없거든."
"다음 번 손님이 오실 때 반영하도록 하지."
중년의 남자는 차갑게 대꾸하고는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철에 새겨져 있는 마크는 남자의 눈길을 끌었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중년 남자가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의 양쪽 귀를 기점으로 진자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왼쪽 귀에 머물러 있던 쇠구슬이 이내 그의 오른쪽 귀 쪽으로 관통해 지나간다. 그제야 남자는 중년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름은?"
"식상하네. 그것보단 좀 더 재미있는 걸 물어볼까 했는데." 남자는 금세 눈이 풀리며 중년 남자에게서 시선을 내려버렸다. "설마 이름까지 물어보려고 서류를 준비해온 건 아니겠지?"
"묻는 말에 대답해. 이름은?"
"짐 모리아티." 짐이 말했다.
중년 남성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서류에 뭔가를 갈겨 적는다. 서류철 표지를 그대로 들춘 채 적고 있어서 짐에게 그 내용이 보이지는 않는다.
"이름은?" 이번엔 짐이 묻는다.
"내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잖아."
"부모님에게 통성명하는 법도 못 배웠어?"
중년의 남자는 잠시 한숨을 내리쉰다. "마이크로프트."
"홈즈." 짐이 마저 대답한다. "성까지 덧붙여줘야지. 예의에 어긋나잖아?"
마이크로프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대신 그 비밀의 서류철에서 몇 가지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차단한 주변 사이로 동그랗게 들어온 탁자 위의 공간에 낯선 이미지들이 뿌려진다. 짐은 수갑을 찬 손을 오므려가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마이크로프트는 그 모습을 조명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피려면 펴."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짐이 말한다. 그의 아이리시 억양이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마이크로프트가 시선을 던지자 짐이 말을 이어 나간다.
"왼쪽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은 스털링 말이야."
마이크로프트가 피식 웃더니 이내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짐이 흘낏 그의 오른손을 바라본다. 잠시 후 손에 들려 나오는 것은 은빛 라이터이다. 왼쪽 주머니에서는 구겨진 스털링이 잡혀 나온다. 찰칵, 칙... 미묘한 고요 속에서 담배 연기가 스스럼 없이 피어오른다.
"이 남자를 알겠나?"
마이크로프트의 섬세한 손가락이 사진 속의 남자를 가리킨다. 짐의 눈썹이 들썩이다 이내 잔뜩 찌푸려진다. "으음..."
사진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의 옆모습이 찍혀있다. 주변 풍경만을 비추는 선글라스는 그의 눈동자를 완전히 가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아래 자리한 그의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강인한 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침 맞은편의 마이크로프트처럼 담배를 꺼내 갖다 대는 사진 속 남자의 오른 손목에 새겨진 특유의 문양은 그가 어느 부대 출신인지를 알려준다. 공격 임무 전담자를 뜻하는 역삼각형. 관찰자를 필요로 하는 저격수. 하지만 대부분의 임무는 스스로 결정하고 끝을 볼 것이다.
고심하는 듯한 그의 표정이 이내 장난스레 펴지더니 짐이 말한다. "모르겠는데."
마이크로프트는 대답 대신 또 다른 서류들을 꺼내 들었다. 혼돈에 가득 찬 사람들이 연기와 불살에 휩싸여 고통받고 있는 사진이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볼법한 지옥도네.” 짐이 중얼거렸다.
“이틀 전 금요일 9시 경에 런던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어. 이 일로 약 200명에 달하는 사람이 다치고 15명이 사망했지.” 마이크로프트가 입에서 뗀 담배가 그의 손 끝에서 끝없이 연기를 피워 올린다.
“설마 내가 저질렀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짐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곤 물었다.
“사진 속에 있는 남자가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말인데 - “ 마이크로프트는 다시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나? 이 남자에 대해서.”
담배 연기가 선을 타듯 위로 올라간다. 미묘한 격자를 만드는 것만 같다. 아니면…짐은 잠시 고개를 들어 연기를 바라보곤 이내 눈을 감아보았다. 오른쪽, 왼쪽…이제는 그 허공 속에서 마이크로프트의 연기를 가르며 진자가 움직인다. 언제나 그의 눈앞에서는 정면으로 움직인다. 절망 같은 안정감이 그를 잠식한다. 기억이라는 걸 헤집는 게 그는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단순한 구조에서라면 더더욱.
“보통 손목에 문신을 새기는 이유를 알아? 특히 군인 놈들 말이야.” 고개를 내린 짐이 우스갯소리라도 하듯 웃으며 말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즉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저격수는 특히 머리가 자주 날아가는 유형이거든. 피유-하고. 대가리가 날아가면 적어도 손목으로 정체라도 알 수 있겠지? 뭐 등이나 다리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새기는 데 유용해서 그런 것도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남자는 ‘저격수’야.” 짐이 말했다. “그것도 아프간에서 활동한 영국인. 손 크기로 봐서 키가 꽤 크고 성격은 그리 수다스럽지는 않겠군. 제법 오래 활동했어. 귀에 이어피스를 착용한 채 변형이 일어났는데. 마치 레슬러들처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난 모른다고 했잖아.” 짐이 잠시 마이크로프트를 보며 말하더니 다시 사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렇게 발달한 턱은…껌을 많이 씹었거나 아니면 요크셔, 로우랜드 쪽 출신일지도 모르겠군. 이 선글라스는 발매된 지 약 2년 정도는 된 거야. 아마 제대 후에 구매했겠지. 뭐 그간 폭발만 해대고 다녔다면 지금쯤 피커딜리 서커스가 아니라 런던 반쪽이 다 날아갔어도 할 말은 없지만.”
“흐음…” 마이크로프트가 이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칭찬 좀 해줄 수 없어? 지금까지 이 사진 한 장으로 얼마나 많은 걸 알아냈는데.” 짐의 말에 마이크로프트가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다시금 책상으로 고개를 떨구곤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거의 한 개비를 다 피웠는지 이내 재떨이에 비벼 끄곤 다시금 담뱃갑으로 손이 가는 걸 보더니 짐이 한 마디 내뱉는다.
“원래도 골초 같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너와 이야기하려면 꼭 필요하거든.”
“그래…그거참 재미있네. 그래서, 이제 질문은 이게 다인가?”
“아니.” 남자는 다시금 담배를 꺼내며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 정도로 많은 걸 추리해낸다면 다음 폭발 장소도 알아낼 수 있겠지.”
“그건 이 사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난 사진이 아니라 네 ‘계획’을 묻는 거야.”
“하…” 짐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 날 이렇게 가둬놓고 다음 계획 같은 걸 떠벌리게 하려 애를 썼다? 뭐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걸 말해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물론.” 마이크로프트가 말하며 담배를 쥔 손 그대로 아까 전 꺼내 들었던 남자의 사진을 짚었다. “이 남자를 만나게 해주지.”
짐의 눈이 그대로 사진을 향했다. 남자의 이름은 세바스찬 모런이다. 아프간 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의 일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유일한 존재이자 진정한 그의 ‘사냥개.’ 원래도 뭘 맞추는 것 하나는 기가 막혔지만 훈련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더 요긴해져서 그가 수영장에 셜록을 데려다 놓고 협박할 때에도 가장 선두에 섰던 공격수였다. 물론, 폭발을 전담하는 부류의 일손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정교하고 개인적인 일에 연루되는 게 세바스찬에게는 더 잘 어울렸다. 애초에 쓰고 버리는 인간이라야 그 크기와 모양 차이겠지만 그런데도, 짐은 끝끝내 남자의 이름을 마이크로프트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세바스찬도 결국 붙잡히게 된 걸까? 짐은 점점 더 머리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블루베리 파이 같은 그 무한한 격자의 방 바로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방이 하나 더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 세바스찬이 있다면…마치 정교한 두 개의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듯 두 공간은 진자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훈련, 사냥개, 연기, 속삭임…귓속이 점점 더 간지러워진다.
“짐. 짐 모리아티.”
두 눈을 번쩍 뜬 짐은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는 반밖에 태우지 않은 스털링을 비벼끄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왼쪽 조끼의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걸로 당신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시시하잖아.” 마이크로프트가 말하며 노려보았고 짐이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닦아냈다. 흥건한 땀 때문에 주변 온도가 올라간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마이크로프트는 이내 세 번째 담배를 손에 들었다. “동의하는 것으로 하고…” 그는 다시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술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반복적인 묘한 기분에 짐은 잠시 눈을 찌푸렸다.
“아까 말한 부상자와 사상자를 생각하면 아마 폭발물은 RDX 기반이겠지.” 짐의 눈이 아까 전 마이크로프트가 올려 둔 피해자들 사진에 던져졌다. 그 눈빛은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무심하고 건조하게 사진들을 쓸어내려 갔다. “스마트폰으로 기폭되는 장치이니까 압력센서와 이중 타이머를 내장한다고 하면…”
“그 정도는 피커딜리 서커스에서 발견된 잔해로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가로막고 입에서 담배를 빼내며 물었다. “내가 말해달라고 한 건 ‘장소’였어. 네가 터뜨리는 그 장소들의 ‘조건’ 말이야.”
“유동 인구가 10만 이상은 되어야지.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히고 싶으니까.”
“그런 게 조건이라면 런던 중심지 어디라도 해당하잖아.” 마이크로프트가 담배를 물었다. 순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마이크로프트는 급히 일어나서 문 쪽으로 사람을 밀어둔 뒤 조심스레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짐이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한 행동 같았다. 이내 문이 닫히고 마이크로프트가 돌아왔다. 아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피우다 만 담배를 그대로 재떨이에 얹어두었다.
“장난하지 말라고. 한 번이라도 의미 없는 공간에 폭발물을 설치한 적 있나? 우리가 네 과거까지 하나둘 다 해석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해서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 다른 이야깃거리라도 던져줄까?” 짐이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마이크로프트는 자리에서 화가 난 채로 일어서더니 그대로 의자를 밀어 넣고는 의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마치 그 두 손 사이에서 다시금 진자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끊긴 대화가 만들어낸 여백 속에서는 기이한 소리가 계속해서 짐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는데 지금 이 곳에서 너랑 말장난이나 해야 하다니…여기에서 썩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마이크로프트는 책상에 널브러진 서류와 사진들을 모아서 그대로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짐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뭔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밤이었지만…세상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멈췄고…”
마이크로프트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재떨이에 놓인 담배는 저 홀로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가기 바빴다.
“우리가 처음 입맞춤한 그 순간-”
마이크로프트는 그대로 문을 열어 사람을 불렀다. 이번에는 짐에게 들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말했다. “당장 조사팀을 버클리 광장으로 보내줘.”
짐은 개의치 않고 노래를 마무리했다. “버클리 광장에서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불렀지요…”
이후 몇 사람이 급히 방으로 찾아와 마이크로프트에게 지시를 받고 떠나간 뒤 그대로 마이크로프트가 서류를 챙기는 순간, 짐이 그에게 물었다. “... 약속은?”
마이크로프트는 한숨을 쉬며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납작하고 종이 같았지만 종이가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이내 그것을 반듯하게 들어 짐의 앞에 그대로 비쳐 보였다.
“이건…” 마이크로프트가 들고 있는 거울 속 남자도 똑같이 입을 움직였다. 그 남자는 분명 방금 전, 마이크로프트가 보여준 사진 속의 선글라스를 낀 채로 담배를 물려 했던 저격수 세바스찬 모런의 모습이다. 이번에는 마치 그의 머리와 거울 속 남자의 머리 사이로 진자가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갔다가는 그대로 공기를 가로질러 이마를 때릴 것 같은 기묘한 공포감을 느끼며…귓가에는 계속해서 기분 나쁠 정도로 고동 소리가 커졌다.
“나는…”
“블랙 에코 3-1 세바스찬 모런.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아프간에 주둔했지. 그게 자네 정체야.”
“아냐…” 그는 이내 마이크로프트가 든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묶여있던 터라 닿지를 않았다. 불현듯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갑 너머 그의 오른쪽 손목에 새겨진 역삼각형 문신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 문양은 그대로 색을 바꿔가며 그의 몸 곳곳을 기어 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수면제라도 먹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짐 모리아티…”
“짐 모리아티는 사망했네.” 세바스찬의 눈이 커졌다. “자네는 지난번 피커딜리 서커스 폭발 사고로 여기 연행되었지. 아마 기억나지 않겠지만.”
“죽었다니…그럴 리가…” 담배 연기를 따라 다시금 머리가 아득하게 흐려졌다. 방의 차단한 등불 사이를 부유하는 담배 연기는 여지없이 그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세인트 바솔로뮤의 옥상 주변에는 초점을 잃은 풍경들이 아득한 안개처럼 흩어져있고 하늘과 섞인 대기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의 주인님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늘 그의 귓가에서 그를 어루만지고 지시하고 명령했던 그의 주인이 그의 라이플 헤어라인 너머에 자리한 순간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던져주었다. 때문에 그의 주인이 몇 번이나 신호를 주었음에도 차마 그를 쏠 수가 없었다. 기어코 주인은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해버렸다. 그의 주머니에 있었던 플랜 B가 제 역할을 한 것이다.
“평범한 아프간 참전군도 그런 세뇌 저항은 배우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어떤 최면이라도 필요했거든. 가령 자네가 약간의 담배 연기로 자신을 짐 모리아티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제대로 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마이크로프트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담배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기묘하게 타오르는 연기가 그의 정신을 희미하게 만들던 것을 상기했다. “그래도 궁금하겠지. 왜 내가 이런 사실들을 지금 자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고해바치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단순해. 자네는 다시 돌아갈 예정이거든. 우리가 다시 닫아둘 거라서 말이지. '굴레를 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차라리…”
마이크로프트는 이내 거울을 거두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제껏 담배를 붙일 때에만 희미하게 일렁이던 불꽃이 그의 눈앞까지 다가오자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눈이 서서히 감겨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저갱으로 떨어지며 그려졌던 것이 지워져 백지가 되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며 그의 두뇌 속 어딘가에 무참히 갇힌 채 감은 그의 두 눈알은 그대로 깊은 꿈이라도 꾸는 듯 진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