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 연가

by 김뇨롱

모델명 LSP-104. 모현동의 한 광장에는 최근 떠오르는 굴절형 디스플레이는 아니지만 나름 견고하게 버틴 전광판이 하나 있다. 빽빽한 회사들이 늘어선 광장 앞에서 봄이면 꽃잎을 흩날리고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를 출력하며 뭇사람들을 숨 쉬게 하는 이 전광판은 올해로 벌써 15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봄의 따사로움이 만발하는 광장 앞에서 지금 이 전광판은 헤어지는 연인을 지켜보고 있다. 출력 중인 광고는 아랑곳 않고 연인의 가벼운 다툼이 기어코 이별까지 이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전광판은 약 1분 정도 멍을 때렸다. 한 장면이 오래도록 지속되자 몇몇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전광판은 정신을 차리고 다음 영상을 틀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있어서 전광판에 두 사람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지만 전광판은 집중해서 둘을 바라볼 수 밖에는 없었다. 남자의 앞에서 눈물짓고 있는 여자는 최근 그 앞에 자주 등장하던,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침 9시 30분에서 50분 사이. 이른 때에는 여유로운 얼굴에 비해 재촉하는 발걸음으로 걸어오지만 늦으면 머플러를 날리며 뛰어오는 그녀는 최근 몇 개월간 전광판의 눈을 사로잡은 존재였다. 광장 앞에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유독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말없이 공원을 거닐며 주변을 바라보거나 이따금 늦은 오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전광판 앞 벤치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를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한 공간에 우두커니 서서 모두를 관찰하기만 하는 존재. 그녀는 종종 벤치에 앉아 이따금 전광판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화면이 울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그녀를 두고 남자가 떠나간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여자는 다시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제자리에서 주변을 비추는 일을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남자의 몸을 빌려서라도 여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광장 한 복판에 있는 그 작고도 쓸쓸한 존재. 바람은 세차게도 불었다. 여자의 머플러가 하늘거렸다.


전광판은 그 이후부터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하루에 10초짜리 광고 6개와 7.5초짜리 광고 8개를 약 1만 회 넘게 송출하면서도 중간중간 그녀가 나타나면 전광판은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광장에 나타나면 중간에 하트를 띄운다거나 심지어 그녀가 전광판 앞을 지나가면 사랑 노래를 출력해서 그녀의 시선을 끌어보려 노력했다. 한 번은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쓴 그녀가 전광판에 뜬 하트를 바라보며 웃어준 적이 있었다. 디스플레이 오류랍시고 지적을 받은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종종 전광판이 그녀를 향해 사랑의 메시지를 날리면 그녀도 종종 전광판을 바라보고 미소 지어주었다. 작은 교감이 이어지던 나날, 바람이 많이 불었던 어느 날의 오후였다. 하루 날씨 요약과 미세먼지 내용을 출력하고 있던 전광판 앞에 하늘거리는 물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머플러였다. 다채로운 빛깔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바람 안에서 나풀거리던 것은 이내 전광판 앞에 떨어졌다.


별안간 여자의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전광판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픽셀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 전광판 앞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으니까. 다급한 표정이었지만 큰 눈에 오뚝한 코, 작은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칼을 흔들었고 이내 그녀는 몸을 숙여 머플러를 집어 들고 잠시 전광판을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머플러를 자신의 목 부근에 두르고는 다시금 사라져 갔다.


강한 바람이 광장을 휩쓸고 지나가며 이제 막 트는 새싹까지 흔드는 와중 그녀의 존재와 소리만이 전광판에 이어져서 그만 1분 넘게 한 장면을 유지하고 있던 전광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음 영상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칫하면 영상 송출을 멈출 뻔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간 곳에는 지난번 무참히 그녀를 버리고 가버렸던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내 포옹을 하더니 천천히 걸어서 광장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이벤트 광고를 송출하는 그대로 전광판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결국 전광판은 암전 되었다.


이내 전광판 옆쪽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그곳에서 나왔다.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이미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떠나간 자리만 내내 바라보았다.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는 씁쓸한 얼굴을 하더니 그대로 전광판을 떠나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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