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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Dec 30. 2022

죽으면 변기에 빠지는 게 꿈인 사람

막 죽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물론 죽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화장되어 죽고 싶었고, 뼛가루는 변기에 뿌려지길 원했던 적이 있다. 내가 알기로, 변기에서 내려간 물은 하천으로 가고, 하천은 강으로, 강은 바다가 된다. 이왕 바다로 갈 거라면, 나는 우선 변기로 갈래. 그건 멋있는 일이다. 세상의 원리를 따라 흘러가다 보면 가장 큰 곳에 도착해 있는 거. 바다로 가서 뼛가루가 물에 녹든지, 바다 생물의 먹이가 되든지, 그 넓은 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멀리멀리 퍼뜨려줄 것이고, 파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을 섞어줄 것이니, 나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물이 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물이 되고 싶었다. 내가 바다가 된다고 생각하면, 울렁이는 감정을 파도라고 생각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바다의 작은 물방울이라고 생각하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플랑크톤의 먹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고 불안한 마음마저 위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죽으면 물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는 장기 기증 신청을 했다. 나는 죽은 후에 복부가 찢겨 장기가 꺼내질 것이다. 장기와 각막이 제거된 신체는 더 깔끔할 것이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몸이 불에 다 타고나면 다음이 문제였다. 물에 뿌려질 거라면, 어떤 물에 뿌려질지 정해야 했다. 바다에 바로 뿌려지는 것은 왠지 무서웠고 강에 뿌려지는 것은 외로웠다. 하천에 뿌려지는 것은 찝찝했기에, 변기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변기물이 바닷물이 되기까지, 더 큰 물로 나가기 전에 일정한 하수 처리 시설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떤 에너지는 바다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바다에 뿌려지는 것과 변기에서 바다로 가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바다에 바로 뿌려지더라도 뼛가루가 파도에 걸러지며 자기들끼리 점점 멀어지고, 해양 생물의 먹이가 되었다가 다시 배설되고, 그것을 다시 파도가 섞고를 반복하면서 바닷물에 길들여져 가겠지만, 변기 물에 섞였다가 점차 바다로 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역시 그쪽이 더 고단했다. 정수 처리 시설의 깐깐한 감시를 거쳐야 할 것이고, 그러는 동안 뼛가루는 더 작게 부서질 것이고, 바다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바다로 가는 길에 내 뼈 한 조각은 상상할 수도 있다. 바다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꿈이 된다. 더 넓은 곳으로 나가는 꿈. 처음부터 바다에 있었던 이에게도 다음은 있겠지만, 바다로 가는 것은 정말 꿈이 될 것이다. 바다는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니까. 정수 처리 시설에서 깔끔하게 정수된 물이 모이고, 해양 생물이 다음 세대를 위해 아이를 낳고, 플랑크톤이 서식하고, 해초가 널브러져 있는 곳. 태평양은 대륙의 틈새를 거쳐 북극해로 이동하고, 남극해는 인도양으로, 인도양은 대서양으로 부지런히 이동해 하나가 되는 곳. 나는 그곳에서 놀이 공원에 온 듯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곳에서.


나는 꿈을 꾸고 싶다. 바다를 노닐고 싶고, 그곳으로 돌아가 젊은 시절 싸우고 다시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고, 애틋한 이별 후 그리워했던 연인을 다시 만나고,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고, 돌봐 주었던 고양이를 다시 만나고, 만지고,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샀다가 이틀 만에 별나라로 보냈던 노란 병아리를 다시 만나고, 그때에는 꼭 닭까지 키우고, 아, 어쩌면 지상에 피었던 목련이 바다에 필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꽃을 가지고 잃었던 사람들과 동물들과 마음들과 함께, 계절은 없고 꽃잎은 만개한 곳에서 꽃놀이를 할 수도 있다.


재작년 여름에는 수영을 배웠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수영장이었다. 보통 수영을 처음 하는 사람은 교습 기간을 두고 강사에게 몇 번 수업을 들은 후 자유 수영 코스로 나간다. 그런데 나는 겁도 없이 혼자서 수영을 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아는 한, 수영은 본능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어려울 때면, 다만 내가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호흡과 몸에만 집중하다가 도저히 감각을 잃은 것 같으면 물 밑으로 잠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자세를 보고 따라 하면서 수영을 연습했다. 오지랖이 넓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호흡하는 법 좀 알려 주시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


그렇게 수영을 터득하는 것은 강사에게 코스대로 수영을 배우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실제로 호흡을 하는 방법보다는 자신이 수영을 이십 년 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말을 더 많이 하기도 했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침을 튀기며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몸에 묻은 것이 물이라 괜찮기도 했다.


나는 다시 물로 나갔다. 내 팔과 다리를 믿으면서. 어떤 사람은 자유형을 할 때 왼쪽 어깨가 꼭 위로 올라오고, 어떤 사람은 꼭 고개를 오른쪽으로만 돌려서 호흡하는 것을 봤다. 나에게는 나만의 자세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을 휘감는 감촉과 몸이 밀고 나가는 물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물에 떠 있었다. 마치 본능처럼. 물이라면, 그렇게 감각해야 했다.


수영장도 그 정도였는데, 바다 수영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 것인가. 바다를 가르는 내 모습과 바다 깊숙이 떨어지는 느낌을 상상하면, 아득해진다. 어둡고 캄캄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감각만 남은 곳. 바다에 들어가면 내 몸에 꼭 맞는 나만의 방에 들어온 느낌일 것이다. 맘껏 소리 질러도 아무에게도 닿지 않고, 아무리 뒹굴어도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는 광활한 무한함 같다. 바다는 순수밖에 남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로 가고 싶다. 바다로 가서, 물이 되고 싶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변기가 필요할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물은 바다였고, 가장 작은 물은 변기물이었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나서 변기에서 죽고 싶었다. 사실, 모든 것은 변기라는 작고 더럽고 하찮은 물건에서 바다만큼 위대한 에너지를 뽑아내야 했던 내 어떤 일상의 사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오줌을 싸면서도 가끔씩 즐거울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막으려면, 그런 것이 필요했던 것도 같다. 물, 물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아직도 나에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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