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꽃 한 송이 우리를 지켜주는 꽃
꽃을 선물하던 날의 단상
이상하게 꽃을 선물하는 날에는 내가 기분이 좋다. 어제 저녁에는 정지우 작가의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북토크에 참석했다. 이틀 전쯤부터, 북토크에서 정지우 작가와 김정주 작가, 두 분께 꼭 꽃을 드려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도움을 주고, 영감을 주고, 그렇게 반가울 두 분께 무슨 선물을 드리고는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적절한 게 꽃이었다.
막상 장소에 도착하니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꽃집을 검색해 보고 지도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그 자리엔 꽃집이 없었고 전화번호도 이상했다. 곧 북토크가 시작할 시간이었고 숨도 차고 발도 아파 그냥 빈손으로 갈까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로 조금 생각하자 바로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선물을 주지 못한다고 우울할 건 뭔가 싶지만, 꼭 주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이상하게 그런 마음도 생긴다.
큰 길가 건너편에서 드디어 꽃집을 발견해서, 뛰었다. 가게는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었고 꽃도 딱 한 종류밖에 없다고 했다. 아네모네라는 꽃이었다. 꽃이 청초해 보이기도, 화려해 보이기도 하는 게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예뻤다. 한 송이 드릴 수 있다고 하길래 두 송이를 팔아주면 안 되겠냐고 꼭 선물을 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가는 길에 검색해 보니 아네모네의 꽃말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대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어쩐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책과도 어울리는 꽃말이라고 생각했다. 꽃을 건네면서, 꽃말에 대해 이야기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막상 쑥스러워서 그런 이야기도 못했다. 들어가면서도 왠지 살짝 꽃을 등뒤로 감추게 됐다.
그러다 정지우 작가님과 눈을 마주치자 단번에 나를 알아보신 듯 아주 환한 미소를 지어 주셨는데, 그 미소에 순간적으로 힘이 솟아서 꽃을 건넬 수 있었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도 못했고 테이블 위에 얹어 놓으면서 여기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렇게 건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너무 쑥스러워서 다 준비해 놓고 그냥 드리지 말까 고민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내가 그렇게 쑥스러워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꽃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꽃은 말없이 건네더라도, 꽃말을 모르더라도, 시간이나 장소와 상관없이, 보통 멋진 선물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생각도 느리고 말도 느려서 반가워도 바로 반갑다고 잘 못한다. 다 지나간 후에 "그때 참 반가웠어요" 말하면 그나마 다행인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말하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리는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고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혼자서 글을 쓰는 걸 취미처럼 삼아버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꽃을 주면 내가 얼마나 이 만남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는지가 잘 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꽃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바로 약간 우울해졌던 것도 이해가 된다. 사실, 상대는 내 생각처럼 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비닐 포장지가 낭비나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반가움의 표현을 말 아닌 다른 것으로도 할 수 있고, 그것이 하필 꽃이라서 좋았다.
꽃은 아름다우니까. 그 아름다움 한 송이를 위해 포장하고, 리본을 매고, 겉포장지 색깔을 고르는 건 낭만적이니까. 꽃은 당연하게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많은 것 같다. 살다 보면 바쁘고, 오늘의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길가에 핀 꽃도 가만히 서서 잘 쳐다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아름다움을 잘 포장하고, 선물하는 행위가 아름다움을 지킨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꽃을 건넬 때, 꽃이 아름답듯 당신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좋다. 내가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서, 그 아름다움이 내 마음속에도 똑같이 생기는 것 같아서 좋다. 꽃을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드린 꽃이 꽃병에 꽂혔으려나, 그 꽃병은 무슨 색깔이려나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나는 꽃을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내 마음의 탁자 위에 꽃병이 놓이고 아름다운 아네모네 한송이가 꽂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아름다움, 내 아름다움, 우리의 중간을 꽃이 지켜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