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유일하게 sns를 들어가 보고, 작업물을 정독하는 구남친 한 명이 있다. 헤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참 응원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를 위해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너는 특별한 피사체야, 너를 위해 사진을 찍고 싶어 말하며, 하루에 몇백 번씩 셔터를 눌렀다. 데이트가 끝나면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색깔과 느낌이라며 보정을 해서 선물로 주곤 했다. 자신의 시선을 기필코 전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고, 그것이 그 사랑의 방식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낮고 쓸쓸하면 했지 전혀 부담스럽거나 일방적이지는 않아서, 그때마다 아주 고요하고 명징하게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노트북 폴더에 소중하게 사진들을 쌓았다. 몇 달 후에는 나도 그의 말하는 방식에 전염된 듯,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함께 사진을 보정하며, 이게 네 시선이구나, 이건 나의 시선이야, 하면서 우리의 눈을 포개어 보곤 했다.
그는 나를 따라 글도 썼다. 글을 참 잘 썼다. 명확한 메시지가 있다기보다, 수채화 같은 글들이었다. 바라본 것 하나에 관해서 그는 참 명확했다. 가을에 요가 수업을 하고 있으면, 귀뚜라미 소리에 관한 글을 지어 보내던 그였다. 내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요가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혼자 떨어진 방에서 귀뚜라미를 마음에 그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우리의 시간이 초월적 궤도에서 만나는 듯했다. 그런 특별함이었다.
우리의 대화에는 별로 틀이 없었다. 대뜸 거짓말을 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뜨거운 핸드폰을 붙잡고 대충, 침대에 놓인 쿠션 하나가 어떻게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로 소설을 쓰곤 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박수를 쳤다. 그것들이 모두 가장 소중한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만의 사랑 방식이, 어쩜 나를 내면의 세계를 훨훨 날으는 파랑새처럼 만들어줄 수 있었던 건지 여전히 신기하다.
삼백여 일간 그를 사랑한 기억 덕분에 내가 조금 더 특별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인연일지라도, 그를 떠올리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한 사람 안에서 그토록 특별해질 수 있었던 기억 하나가 밥을 먹여주지는 못해도, 마음의 어떤 든든함을 준다. 내가 가끔 현실에서 넘어진다고 느낄 때, 내면의 무언가가 외부의 충격에 의해 무너뜨려진다고 느낄 때, 내 마음에게 '파이팅'을 해 주는 존재처럼 그를 생각한다.
사람은 기억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내가 자연이라면, 그는 반짝거리는 별일 것이다. 아마 지나간 사랑은 그런 모습이 되나 보다. 사람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내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만질 수는 없어도, 바라볼 수는 있는 별처럼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