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삶보다 먼저 도착하려 할 때
페이스북에서 누군가의 글을 보다가, 아 진짜 글 잘 쓰네, 짜증 나게, 그랬더니 남편이 잘 쓰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꾹꾹 눌러 대답해 보았다.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고 과장 없이, 자기만의 속도대로,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의미대로라면 나는 며칠간 잘 쓰지 못했던 게 맞다. 글쓰기에 하루에 두 시간씩은 투자하며 세 편의 글을 썼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고, 솔직하고 과장 없이 하지도 못 했던 것 같다. 수필의 문학성은 체험의 진실성에 있다고 했던가. 아마 나는 내가 경험한 것보다 더 거대한 의미를 글에서 끌어내려고 했지 싶다.
글로 가닿고 싶은 어떤 영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글을 먼저 목적지에 도착시키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글에서 부리고 싶어 하는 허세가 내 눈에도 보였다. 그게 부끄러워서 글을 도저히 마무리 짓지 못했고 자꾸 고치고 싶어 했다. 글을 통해 삶에 관한 욕심을 돌아보는 며칠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백 일의 글쓰기 도전은 연속성에 의미를 둔다고 했다. 쓰긴 했지만 올리지 못한 글이라면, 연속성에서 어긋나는 걸까. 물론 내가 혼자서 쓴다고 해도 아무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적당히 게으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야말로, 용기 내서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글이야말로 글 한 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올리면 그렇게 끝을 맺는 게, 글에 대한 고민을 멈추게 되는 게 싫기도 아쉽기도 용납이 안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글을 올려 달라는 동료들의 말에 힘입어 이런 글이라도 쓴다. 그게 다행이다. 오래 품는 글이 있다면 금방 내보내는 글도 있는 게 좋다. 글을 오래 품다 보면 내가 쉽게 뚝딱 쓸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게 된다.
요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며칠 푹 고아야 하는 사골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골만 끓이다 보면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 정도는 요리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릴지 모른다. 반대로 십 분 만에 끓일 수 있는 김치찌개만 먹다 보면 사골을 끓이는 게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긴 시간의 사유가 필요한 글, 오래 붙들어야 하는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김치찌개 같은 글도 놓지 못하겠다. 라면에 비하면 김치찌개도 요리이듯, 말만 하는 사람 말고, 하루의 끝에 짧은 글 한 편이라도 쓰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이 정도의 글도 적당히 배부른 의미를 가질 테니까. 때론 뜬구름 잡는 거대한 이야기보다 밥상머리의 작은 온기가 삶에 더 커다란 희망이라고 믿으니까.
영어 공부하다가 잘 안 되면 수학 공부를 한다는 모범생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아마 그렇게 되어가는 걸까.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그걸 소재 삼아 또 다른 글을 쓰면서 마음을 풀고 있다. 아무렴 좋다. 나는 쓰는 게 좋으니까. 사골을 끓이다가 김치찌개도 끓이고 라면도 끓이듯 다양한 시간과 난이도의 글을 쓰고 싶다. 어쨌든 요리하는 감각을 잊지 않고 성실히 칼질을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