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새 스케치북을 선물받는 것이었다.
새 스케치북을 받았을 때 강렬히 설렜던 그 달뜬 기분을 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이것 저것 그리고 싶은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라 여지없이 신나던 그 순간. 스케치북을 받자마자 쪼르르 내 방으로 달려가 크레파스며 물감을 꺼내 마음껏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들. 그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쌓인 스케치북들은 아직도 본가에 고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설에 집에 내려가 오랜만에 그 스케치북들을 뒤적여 봤다. 대부분 완성작들이었지만, 그리다 만 것들에서부터 과감하게 X표를 쳐놓은 것들, 마음에 안 든건지 실패작이라 생각했는 지 알 수 없는 낙서를 해놓은 그림들이 중간 중간 나왔다. 그런 것들이 스케치북을 넘겨보는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더 이상 스케치북을 사용하지 않게 된 건 언제쯤 부터였을까. 고등학교 때 부턴가. 그때부턴 스케치북 대신 종이 낱장이나 캔버스를 사서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그림이 담긴 캔버스들이 내 방을 빼곡히 채웠다. 밑그림만 그려 놨거나, 마음에 안드는 그림들은 위에 다른 그림으로 덮어버리다 보니 미완성 캔버스는 남지 않았다.
왜 일까, 다시 스케치북을 한 권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스케치북을 넘겨보면서 문득 그 한 권 한 권이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내 한 해 한 해는 한 권의 스케치북이다. 그 중에는 지난한 실패도 있고, 미완의 사건도 있고, 여전히 미해결 중인 과제도 있으며 빛나는 성공과 반짝이는 성취의 순간들이 공존한다. 실패와 미완성작이 없는 성공작만 남은 캔버스보다는 한 권 통째로 묶여있는 그 다양한 그림들이 나는 더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한 해에는 성공도 실패도 달콤한 순간도 씁쓸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성장시켜 준 건 그 무수히 많은 실패들이었는데, 그걸 싹 없애고 반짝이는 순간만 남겨 놓는 건 왠지 덜 멋지단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런 날도 썩 괜찮은 날이 되고, 별 것 아닌 소소한 기쁨의 순간도 큰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인데.
매년 새로운 해를 맞는 건 새 스케치북을 받는 순간과 비슷하다.
나는 '2023년'이라는 새 스케치북을 다채로운 그림으로 채워나가려 한다. 선물받은 새 스케치북을 채울 생각에 한껏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소중히 아끼던 크레파스를 꺼내던 그 마음가짐으로. 계 중에는 성공작도 실패작도 있을 것이다. 실패작이라고, 미완성 작이라고 벅벅 찢어 구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다 남겨둘 것이다. 내 소소한 성취가 더 빛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