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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Feb 04. 2023

스케치북




어린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는  스케치북을 선물받는 것이었다.

새 스케치북을 받았을 때 강렬히 설렜던 그 달뜬 기분을 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이것 저것 그리고 싶은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라 여지없이 신나던 그 순간. 스케치북을 받자마자 쪼르르 내 방으로 달려가 크레파스며 물감을 꺼내 마음껏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들. 그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쌓인 스케치북들은 아직도 본가에 고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설에 집에 내려가 오랜만에 그 스케치북들을 뒤적여 봤다. 대부분 완성작들이었지만, 그리다 만 것들에서부터 과감하게 X표를 쳐놓은 것들, 마음에 안 든건지 실패작이라 생각했는 지 알 수 없는 낙서를 해놓은 그림들이 중간 중간 나왔다. 그런 것들이 스케치북을 넘겨보는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더 이상 스케치북을 사용하지 않게 된 건 언제쯤 부터였을까. 고등학교 때 부턴가. 그때부턴 스케치북 대신 종이 낱장이나 캔버스를 사서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그림이 담긴 캔버스들이 내 방을 빼곡히 채웠다. 밑그림만 그려 놨거나, 마음에 안드는 그림들은 위에 다른 그림으로 덮어버리다 보니 미완성 캔버스는 남지 않았다.



왜 일까, 다시 스케치북을 한 권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스케치북을 넘겨보면서 문득 그 한 권 한 권이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내 한 해 한 해는 한 권의 스케치북이다. 그 중에는 지난한 실패도 있고, 미완의 사건도 있고, 여전히 미해결 중인 과제도 있으며 빛나는 성공과 반짝이는 성취의 순간들이 공존한다. 실패와 미완성작이 없는 성공작만 남은 캔버스보다는 한 권 통째로 묶여있는 그 다양한 그림들이 나는 더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해에는 성공도 실패도 달콤한 순간도 씁쓸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성장시켜    무수히 많은 실패들이었는데, 그걸  없애고 반짝이는 순간만 남겨 놓는  왠지  멋지단 생각이 들었다.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런 날도  괜찮은 날이 되고,   아닌 소소한 기쁨의 순간도  행복이   있었던 것인.







매년 새로운 해를 맞는 건 새 스케치북을 받는 순간과 비슷하다.


나는 '2023년'이라는 새 스케치북을 다채로운 그림으로 채워나가려 한다. 선물받은 새 스케치북을 채울 생각에 한껏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소중히 아끼던 크레파스를 꺼내던 그 마음가짐으로. 계 중에는 성공작도 실패작도 있을 것이다. 실패작이라고, 미완성 작이라고 벅벅 찢어 구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다 남겨둘 것이다. 내 소소한 성취가 더 빛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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