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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Feb 08. 2023

부서지고 찢긴 존재의 환부를 보듬는 따뜻한 시선 1

― 조수경,『모두가 부서진』




분절되고 파편화 된 존재들

 뉴스를 뒤적거리다 “30대 여성 장애인 성폭행 70대 5명 구속”이라는 충격적인 기사의 헤드라인에 멍하게 시선이 머물러 있던 나는, 불현듯 몇 년 전에 읽었던 조수경의 ‘젤리피시’를 떠올렸다. 「젤리피시」는 성인용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고독한 장애여성을 그린 작품으로,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왔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끔 유도한다. 2016년 『모두가 부서진』이라는 첫 소설집을 출간한 조수경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을 통해 ‘모두가 조금씩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면면’, ‘그 안에 도사린 등골 서늘한 균열들’에 집중하고자 했다. “상처 입거나 결핍된 사람과 공간, 감정, 상태에 어쩐지 집중하게 돼요. 어려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이 있었어요. 울증일 때 안으로 쌓아 놓았다가 조증일 때 글로 쏟아내는 게 제 방식이지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항상 가장 ‘낮은 곳’, ‘음습한 곳’,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곳’에 머물러 있다.

 조수경의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은 그야말로 하나같이 찢기고 부서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표제 ‘모두가 부서진’에 해당하는 작품은 따로 없지만, 등단작 ‘젤리피시’에 보이는 “모두 분절된 신체 기구뿐”이라는 대목, 또는 미발표 단편 ‘마르첼리노, 마리안느’에 나오는 “여자의 몸은 부서지고, 찢기고, 으깨진 채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분명했다”는 문장이 말해주듯이 수록작에 나타난 거의 모두가 영육이 찢기고 망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그야말로 ‘부서진 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수록작 여덟 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도시 속에서 각자의 부서짐을 치열하게 경험해 간다. 이는 하반신 마비(「젤리피시」)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에서부터, 눈앞에 직면한 이혼(「유리」), 아버지의 외도에서 기인한 강박적 순결 콤플렉스(「마르첼리노, 마리안느」), 부모에게 버려진 뒤 방향을 잃어버린 청춘(「떨어지다」), 거짓으로 유지된 연인 관계의 파경(「할로윈―런, 런, 런」), 임신 문제를 둘러싼 고부 갈등(「지느러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젤리피시」는 이후 조수경의 소설 세계를 예고하듯 뒤틀리고 음습한 세계의 비밀을 주인공의 신체와 그가 거주하는 공간에 집약시켜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젤리피시」는 ‘부서진 우리의 내면’을 부감하는 듯하다. 성생활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자들에게 ‘도구’처럼 이용당하는 장애 여성 ‘나’는 분절된 신체 기구로 이뤄진 상품들을 보며 자신과 비슷한 속성을 발견해낸다.      

그것들은 나와 제법 어울렸다. (중략) 내 몸뚱이는 버려진 재료를 모아다가 아무렇게나 조립해 만든 결과물 같기도 했다. 나는 가끔 분해된 채로 가게에 진열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77쪽)     

 ‘나’는 분절된 상태로 존재하기에 하나같이 불완전한 형태인 성인용품 신체모형들을 보며 “아이처럼 작은 몸에 달린 성숙한 여자의 젖가슴, 근육이 잘 발달된 짧은 팔,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붙어 있는 가늘고 휘어진 다리는 몸통을 중심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으나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법”한 자신의 신체를 떠올리게 된다. ‘나’와 ‘나’의 가게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부분적이고 그 자체로서는 하나의 육체로서 기능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처럼 파편화된 신체들은 안타깝게도 하나의 완전한 구조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단지 분절된 ‘파편’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조수경은 이렇듯 어딘지 모르게 찢기고 분절된 ‘파편화’ 된 존재들, 상처 입은 ‘부서진 존재들’의 우울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심해로 침잠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녀가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는 항상 이렇게 ‘지하세계’에 있을 법한, 그래서 쉽사리 지나치거나 은폐시켰을지 모르는 곳에 놓여 있다. 주인공의 일터인 성인용품점이 특정 신체 부위를 과장되게 본뜬 “온통 토막 난 몸뚱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의 가게이자 살림집이 있는 곳은 건물 2층이지만, 하반신 장애를 지닌 여성이 성인용품점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유사 성매매를 일삼는 그 공간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축축하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다. 성인용품 판매점은 ‘음지’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드러난 곳이 아닌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말한 ‘지하실’의 속성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볼 수 있겠다.

 조수경은 한 인터뷰에서 “육체적 폭력은 오히려 하위의 폭력이고, 더 큰 폭력은 사회적 폭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그의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는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없는 대우와 관심, 그리고 존중이 필요함을 당부한다. 정신적 불구자가 넘쳐나는 사회, 그런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조금쯤 ‘부서진’자 들이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 어떻게 보면 선천적 불구일 수 있는 불완전한 개체인 해파리가 불로영생을 하며 완전성과 생명력을 획득하고선,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나’와 함께 헤엄을 친다. 하반신 불구 장애인 ‘나’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이미 분절돼 버린 몸을 다시 잇는 ‘재생의 꿈’을 꾸는 것이다. 오로지 휠체어에 의존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나’는 비로소 ‘꿈’에서나마 자율적인 생명력 획득에의 욕망을 마음껏 표출한다. 작가는 젤리피시에 뒤덮여 그들과 함께 헤엄을 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외면당했던 소외계층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짚음과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생명에 대한 자율적인 의지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지 고독한 장애 여성이라는 문제적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 문제로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줄 것을 요구하고 공생을 위한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 당부와 더불어 조수경은 왜곡된 욕망에 이끌려 약자가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폭력을 자행하고 타인의 불행을 집요하게 캐내며 균열을 은폐해가는 방식으로만 생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잔인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결코 은폐하지 않는다. 대신 이 ‘악몽’같은 현실을 대면하고 그러한 현실을 ‘살아 내야’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불편한 진실을 향해 뻗는 손

 단편 「유리」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습관처럼 김포공항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작가 ‘명선’이 그 곳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 ‘유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명선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는 유리는, 그녀의 소설을 다 읽었다면서 그동안 명선과 마주치는 상상을 수없이 해왔다고 말한다. 한편 명선은 ‘나의 옛 친구’이자 내 소설의 ‘독자’인 유리와의 만남이 그저 유쾌하지 만은 않다. 그런 명선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내보이는 명선의 소설에 대한 유리의 다소 광적인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하기 까지 하다.     

 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너는 주로 내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두 권의 소설집에 실린 작품을 모두 꼼꼼하게 정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래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했고, 그때 내가 입고 있던 옷이나 서재에 놓여 있던 가구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묘사했다. 어쩐지 등이 서늘하게 느껴져 열 시트 온도를 한 단계 올렸다.(28쪽)     

 자신의 소설이나 행보에 대해 일종의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유리에게서 ‘나’는 섬뜩함을 느낀다. 유리는 명선에게 그저 ‘초등학교 동창’이 아닌,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이자 처음으로 “너는 분명 소설가가 될”거라고 말 해준 친구이기도 하다. 둘은 일찌감치 ‘작가-독자’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권의 노트를 공유하면서 소설을 읽고 쓰는 등의 경험을 나누었던 둘은 특별한 사이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 때의 노트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는 유리는 ‘나’의 소설의 ‘최초의 독자’인 셈이다. 그토록 각별했던 이 둘 사이에는 큰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명선이었다. ‘나’는 유리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이를 스스로 은폐해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리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으로 ‘나’의 소설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소설 말이야. 내 얘기는 쓰지 않았더라.”(21쪽)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동안 ‘유리의 이야기’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여태껏 ‘어린 날의 성숙치 못했던 행동’이라고 치부하고 덮어두었던 자신의 과오와 그로 인한 타인의 상처와 고통. 명선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지낼 만큼 그것에 대해 무심했지만(물론 그것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잊고자 한 그녀의 노력에 의한 것이리라.) 차마 그것을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어떻게든 그 ‘사건’을 잊어버려야 했다. 그렇게 은폐하며 외면했던 고통을 직면하기에 앞서 명선은 갈등한다. 그 ‘불편한 진실’의 실체를 마주할 것인가 혹은 철저히 다시 은폐하며 회피함으로 써 그것을 영원히 ‘무의식’속에 잠재워놓을 것인가. 물론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면 이로 인한 균열을 감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대체로 ‘안전한 선택’을 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명선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기꺼이 삶을 균열시킨다.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언젠가 분명 너의 이야기를 쓰게 될 거라고.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네가 들어간 대문을 바라봤다. 네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용서받은 기분이었다.(40쪽)     

 작가는 여기서 ‘용서’를 이야기 한다. 굳이 ‘용서’라는 표현을 쓴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어린 날 자신이 유리에게 줬던 ‘상처’를 무의식중에 마음의 부채로 가지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가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섣불리 결론 내리고 서둘러 자위하던 그녀의 안도는 “무의식이 쳐놓은 망(40쪽)"에 걸린 ‘어떤 풍경’에 의해 산산 조각나고 만다. 담장 한 쪽에 나 있는 ‘파란 쪽문’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 그 때처럼 그 쪽문 속의 ‘유리’를 상상해본다. “어쩐지 용서받은 기분이었”던 명선은 결국 진정으로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명선은 “쪽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파란 쪽문 안에는 ‘명선’이 생각했던 세계가 정말 존재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명선은 그 쪽문 안에 자신의 산산조각 내 버린 유리의 인생과 그로 인한 유리의 상처, 또 그 상처를 애써 무마사키고자 외면해왔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그것이 또 다시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어버린 환부, 그렇게 ‘고통’으로 뒤엉킨 죄책감의 실체가 존재하기를 바라면서도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쯤은 유추해 볼 수 있다. 자신의 ‘기대’가 처참히 배반당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곳에 있었으면 하는 ‘기대’로 명선은 그 안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이러한 명선의 태도는 ‘작가’의 ‘자기다짐’이자 ‘자기고백’에 다름 아니다.

  고통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속으로 진입하는 명선의 태도를 통해 부서진 삶의 환부를 대면하고자 하는 조수경의 투철한 작가의식이 드러난다.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39쪽)"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진 유리는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자신의 이야기를 머지않아 명선의 소설에서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유리가 명선의 소설을 지켜보듯, 우리 역시 조수경의 소설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명선이 쓸 이야기가 ‘유리’의 고통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처럼 조수경이 다루게 될 이야기 역시 그러한 부서진 존재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명선의 의식에 작가 조수경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단편 「유리」는 자전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아마 그런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자 자신의 등단작인 「젤리피시」보다도 앞세워 「유리」라는 작품을 자신의 소설집 도입에 배치했으리라. 조수경은 타인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글을 쓰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작가의식과 글쓰기 방식은 오늘 날 타인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양심의 가책’을 선사할 가능성을 보유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꿈’을 통한 진실과의 독대(獨對)

 조수경의 소설에선 ‘꿈’ 특히 ‘악몽’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 소설의 서사적 구성에서 ‘꿈’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마르첼리노, 마리안느」에서 마르첼리노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를 품에 안고 구렁이로 들어가”(46쪽)는 꿈을 꾸는 장면이라든지, 「젤리피시」에서 분홍빛 바다 속에서 절단된 사지들이 부유하는 꿈, 「할로윈―런, 런, 런」에서 애인 수한이 흉기를 들고 미래를 압박해오는 꿈들, 「오아시스」에서 “커다란 방울뱀이 귓속을 파고”(209쪽)드는 꿈의 장면들만 보아도 작가의 소설에서 ‘꿈’이 얼마나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 알 수 있다.

 이 지독한 악몽들은 스산한 기운과 불쾌감을 자아내고 이것은 꿈꾸는 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이 꿈들이 ‘불쾌’하고도 ‘께름칙’한 이유는 꿈꾸는 자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세계를 ‘기어코’ 대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리첼리노의 꿈은 마리안느와의 사랑이 비윤리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죄악’임을 일깨워주는 작용을 한다. 하지만 마르첼리노는 끝내 그 꿈이 알려주려는 진실을 거부하고 마리안느와의 관계를 지속시켜 나간다. 한편, 「할로윈―런, 런, 런」에서 ‘미래’의 꿈은 수한과 미래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흉기를 들고 다가오고 그 그림자의 주인이 결국 수한이었다는 꿈을 꾸게 된 후로 ‘미래’는 ‘수한’에게 일종의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그 꿈에 대해 결코 수한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몸이 피곤해서 푹 자고 싶다는 핑계로 그와의 동침을 거부하면서 동거 생활을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꿈의 작용은 「오아시스」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나’는 자신을 애무하는 G의 혀끝에서 반짝이는 피어싱을 보고 꿈에서 자신의 귓속으로 파고들던 방울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방울뱀과 ‘그녀’와 G의 피어싱 방울 이미지가 교차되면서 그는 ‘그녀’를 피해 먼 곳 까지 달아난 곳에서 그가 만난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G를 비롯하여) 결국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녀’의 ‘허물’에 지나지 않는 대상들임을 깨닫게 된다. 끝내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들의 중심에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수경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꿈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그들에게 그 꿈이 전하고자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자 ‘비극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꿈들은 하나같이 ‘악몽’으로 인식된다. 각 소설 속 인물들은 악몽 속 내용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려 한다. 자꾸만 달아나는 그들만큼이나 꿈 역시 집요해서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부단히 애쓰며 꿈으로부터 도망치는 인물들을 향해 ‘악몽’은 끝끝내 메시지를 전달하고 각 인물들은 이에 승복하듯이, 기어코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받아들인다. 조수경의 소설에서 ‘꿈’은 인물들이 실재를 직면하게 하는 기재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악몽은 그들이 자신의 ‘비윤리성’ 혹은 ‘비정상성’을 인지하고 회피하려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로’인 것이다. 고군분투하며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물들을 외면하지 않고, 집요하게 ‘반복적’인 꿈을 재생하는 작가의 지난한 노력을 통해 윤리성이나 인간성을 상실한 ‘부서진 존재’들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작가의 윤리적인 시선과 태도가 돋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겠다고 표명한 의지와 부합하는 것이며, 이러한 ‘윤리적 글쓰기’의 태도는 요즈음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꿈’을 통해 진실과 홀로 대면하는 일은 앞서 다루었던 「유리」에서 불편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 파란 쪽문으로 손을 뻗는 행위와 결코 다르지 않다. 작가 ‘명선’, 작가 조수경, 그리고 독자를 진실로 이끌면서 ‘고통’이 부여될 것이 너무도 빤한 그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떡하니 ‘악몽’이라는 ‘통로’가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조수경의 소설 도입부에 제시되는데 이 통로를 거쳐야만 ‘악몽’보다 더 ‘악몽’같은 현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참고자료     

<단행본>

조수경, 『모두가 부서진』, 문학과 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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