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리뷰
1. 일상이 문학이 되는 순간
2. 허구와 사실로 버무려진 필연적 우연
3. 미시적 사건의 연쇄와 가능성의 세계
4. 이 메마른 현실에 사랑을 주입하라
일상이 문학이 되는 순간
어린 시절, ‘교환 일기’라는 것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친한 친구끼리 하나의 일기장을 번갈아가며 쓰고 돌려보는 것이었는데 그 속엔 온갖 비밀들이 그득그득했다. 지금 들춰보면 아무것도 아닌, 정말 ‘별 것’아닌 사실들이었지만 그 교환 일기장에 쓰이는 순간, 그 사실은 친구와 나 단 둘만이 아는 아주 ‘특별한 비밀’로 탈바꿈하곤 했다. 그 경이한 순간의 체험이 사뭇 놀랍고도 짜릿했는지, 내가 쓴 일기장을 친구에게 내밀 때와 또 어떤 비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그 일기장을 친구에게 건네받을 때 모두 못 견디게 설렜다. 비밀이라 해봐야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내가 누구한테 고백을 받았다, 오늘 꿈을 꿨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다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그 일기장은 당시 나와 친구에게 그 자체로 가장 재미있는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물론 사실에 기반한)’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교환 일기’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누군가와 그 일상을 ‘나누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우연의 연속은 하나의 ‘필연’이 된다. 조현은 이러한 원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리한 작가다. “텅 빈 밤의 전철에서 인류가 멸망하고 휴머노이드만 지구에 남아 인간이 쌓아 올린 지성의 흔적을 연구하는 미래에 대한 꿈을 꾼” 것을 계기로 조현은 불혹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소설이란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서로의 꿈을 교환한다는 것, 또는 문학이 아직도 이런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순진한 미신이나 과장”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을 소설 속에서 여실히 풀어낸다. 삭막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낭만적’인 문학관을 갖고 있는 ‘순진한’ 작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끔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담아 둔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잠시 일상과 분리된 꿈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하며, 소설이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일종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소설을 쓰고 또 어떤 사람은 그걸 읽으며 자신의 내부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내 친구가 그랬듯이.
소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서 ‘마이클 햄버거’라는 시인의 시가 『펭귄 현대 시인 선집』이라는 페이퍼백에 실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의 묘사를 통해 바로 이런 ‘문학의 힘’과 그에 대한 ‘작가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순전히 한 펭귄 사 편집자의 애틋한 개인사”로부터 비롯된 이 일련의 사건들은 소설 전반을 구축하는 서사가 된다. 편집자 이본 마멜은, 열여섯 살 되던 해 학교 강당의 샹들리에가 떨어져 남자친구를 잃은 비극적 사고를 당한 비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사춘기 시절의 상처로 인해 ‘내면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고, 그녀가 선택한 내면의 세계는 바로 ‘시의 세계’였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항상 “나의 베아트리체.”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고, 이본 마멜은 자연스럽게 ‘베아트리체’라는 호칭에 “애달픈 사연”을 가지게 된다. 이는 후에 그녀가 마이클 햄버거가 쓴 시 속 한 구절인 “핼쑥한 안색을 가졌으나 베아트리체는 너의 이름”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아득한 그리움’에 빠지게 한다.
“내 심장에 얼얼한 것은 남들의 가슴도 울컥하게 한다.”는 다소 과격한 그녀의 편집철학에 걸맞게 마이클 햄버거는 손쉽게,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집자적 주관’에 의해 『펭귄 현대 시인 선집』 속 한 시인으로 선택된다. 이본 마멜은 마이클 햄버거의 시 속에서 ‘베아트리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자신의 내면세계에 있던 ‘베아트리체’라고 호명 되던 자신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그 이름을 부르는 시인의 ‘베아트리체’와 자신의 남자친구가 불러주던 ‘베아트리체’가 설령 다른 이름이라할지라도 그녀는 ‘그리움’이라는 정서적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서로의 ‘꿈’을 나누는 과정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누군가에겐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가할지 모를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은 그녀에겐 애칭이자, 어린 시절 사랑의 기억이자,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기억 속 메아리이자,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렇듯 문학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모두에게 각자의 역사가 있듯, 문학이 한 개인에게 가닿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지극히 개별적이고 산발적이라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이본 마멜의 편집철학은 ‘햄버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사건을 생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녀의 감수성을 자극한 단 ‘한 구절’ 아니, 어쩌면 ‘단 하나의 단어’가 후에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은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를 각자의 관점에서 ‘나에게만은 특별한 햄버거의 역사’로 탈바꿈 시킨다. 이렇게 필연인 듯 보이는 우연의 연속적 결합은 문학의 서사구성 방식 즉, 우리의 일상이 문학이 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조현은 문학에 대한(더 구체적으로는 소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코웃음 칠만한 ‘순진한 헛소리’ 쯤으로 치부될 지라도 굳건히 그 믿음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그 믿음이 “순진한 미신”이나 “과장”이든 아니든 그 여부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어쨌든 조현은 자신의 내부로 여행을 떠나고 나아가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한 가장 친숙하고도 쉬운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했다. 무엇이든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후회가 없듯이, 그는 어린 시절 꿈을 나누던 그 때처럼 독자들과 서로의 꿈을 교환하기 위해 기꺼이 문학의 힘을 빌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이제 그의 논리에 따라 독자가 소설의 힘, 문학의 힘에 설득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허구와 사실로 버무려진 필연적 우연
먼저 ‘필연적 우연’이라는 말 자체는 역설적이다. ‘우연’은 사건들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인데 반해, ‘필연’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연의 역사’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필연적 우연’들이 상존하는 가운데 구축되는 서사이다. 작품에는 마이클 햄버거, 이본 마멜, 마틴 커닝스, 커닝스 주니어, 에밀리하이스미스, 제인 갈런드, 김경주 등 많은 사람들이 스치듯 등장한다. 1925년 3월 22일 베를린, 2007년 6월 7일 용산구 한남동 등 구체적인 때와 장소를 언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제시된 해당 년도에 이슈화 됐었던 사건들(이를 테면 ‘코카콜라 학교 퇴출 운동’ 등)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소설세계는 허구와 사실 사이에 극명한 경계가 있다기보다는 허구와 사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형상이다. 그는 실재를 허구와 섞어 진실에 대한 혼란을 주는가 하면, 진실 사이에 허구를 집어넣어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해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를 낱낱이 따지기 이전에 소설의 ‘몰입도’를 높여 빠르게 소설이 읽히도록 도와준다. 소설 속에서 언급 된 인물들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 해도 어색할 것이 없고,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촘촘히 서사를 구축한 것은 작가 조현의 빛나는 능력이다. 자잘하게 등장하는 사실 정보들은 가끔 눈에 띄면 반갑기도 하다. ‘맞아, 저 당시에 저런 일들이 있었지.’하고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읽다 보면, 마치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의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는 “오늘날 현실적으로 가장 능력 있는 시인”인 카피라이터 김경주가 ‘시적 상상력’의 발휘하여 정크푸드의 역사를 바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햄버거’라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숨어있는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이자, 작가가 작품 서두에 언급했듯이 “한 권의 페이퍼백에 얽힌 우연 내지 시적 상상력의 역사”이다. 이 ‘햄버거’라는 이름 하나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름이 하필 ‘햄버거’인 마이클 햄버거의 시가 실린 이 페이퍼백은 펭귄사 편집자인 이본 마멜의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사와 베아트리체와 맥도날드의 창업주 레이크록과 마틴 커닝스와 커닝스 주니어, 용산 미군 기지의 한국인 청소원, 헌책을 수거하는 나까미상의 손을 거쳐 이태원에서 약 15년간 인고의 세월을 견디게 된다. 이 작은 페이퍼백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친 것이다. 마침내 이것이 다시 카피라이터 김경주의 손에 들어가 장엄하게도 ‘정크푸드의 역사’를 뒤바꾼 사건, ‘마이클 버거’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본 마멜에서부터 김경주 사원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진행된 그 필연적 우연의 결과는 결국, ‘시’가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특별함으로 전해지기까지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실제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것과 ‘사실처럼’ 느끼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속는 것’이고, 후자는 ‘속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 속에서는 사실정보도 허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마이클 햄버거’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이 웬일인지 미덥지 못한 것처럼 ‘소설’이라는 틀 안의 ‘진실’은 ‘거짓’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거짓’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 배치한 ‘거짓’같은 사실정보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기꺼이 속아 줄’ 마음이 들게 만든다. 친구와의 교환 일기 속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 ‘의혹’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일 법한 일’ 자체가 흥미로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작가는 곳곳에 사실 정보들을 배치하고, 독자의 공감을 얻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현이 구축한 사실과 허구가 뒤엉킨 소설 세계는 ‘공감’을 요구하고, 그 마지막 선택지를 독자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재치가 돋보인다.
조현의 문학이 ‘감동’을 시사하는 지점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 ‘공감’을 통해 일종의 ‘울림’과 ‘떨림’을 형성하게 될 때라고 할 수 있다. 조현은 그 어느 작가보다도 부드럽고 젠틀하게 독자에게 소설의 완성지점의 ‘선택권’을 쥐여 주는 작가다. 독자 없이는 그의 소설이 완성될 수 없으며, 그에게 ‘문학’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현은 독자들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이며, ‘소통’이 무엇인지 아는 노련한 작가이다. 우리는 그런 그의 노력을 알아주고 그저 즐기면 된다. 그가 구축한 ‘필연적 우연’의 세계는 사실에 가깝게, 혹은 허구에 가깝게 그렸다고 하기 보다는 정말 둘을 적절히 ‘버무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 몰입하여 적당한 공감 선을 유지하면서 적절한 템포로 이야기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진담도 농담처럼, 농담도 진담처럼 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가 의도한 것은 “와, 진짜네.”가 아니라 “와, 진짜 같네.”이기 때문이다. 허구와 사실을 그만의 ‘황금 레시피’로 버무린 필연적 우연의 세계는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미시적 사건의 연쇄와 가능성의 세계
“사실 기묘한 사건은 몇 가지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22쪽)”는 조현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 드러난 표면적 서사는 그저 ‘우연’에 의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필연적 우연은 불시에 우리의 삶을 급습한다. 예기치 않게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우연’들은 각각의 미시서사를 형상하는 주축이 된다. 그리고 그 미시서사들이 모여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햄버거의 역사’처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 역사를 형성하기까지 모든 것이 ‘햄버거’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사건들처럼, ‘우연’이 역사를 형성하는 순간 그것은 ‘필연’이 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가 어느 순간 특별해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표면적 서사가 아닌 이면의 세계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표면적 서사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코 우연에만 기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꼼꼼하게 선택하고 촘촘하게 배열되어진 ‘미시서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작가는 이런 미시적 사건의 연속을 단순히 ‘필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만 가지고 원인을 절대화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필연’이 아니라 ‘미시적 사건’의 집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사실정보와 거짓정보가 마구 뒤섞여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는 조현의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가려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심어 놓은 숨은 의도는 바로 “나의 의도된 거짓말을 알아 달라!”는 외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독자들이 그 ‘힌트’를 읽을 수 있도록 진실과 허구로 범벅된 소설 내부의 세계를 교란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김경주’의 ‘직업’이나 ‘마이클 햄버거’의 ‘출생년도’에 관한 정보를 들 수 있다. 소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속에서 ‘김경주’는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로 존재하지만, 2018년 ‘현실세계’에서도 실존하는 인물인 ‘김경주’의 직업은 ‘시인’이다. 한편, 시인이자 번역자로 알려진 ‘마이클 햄버거’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며, 그가 시인이지만 번역가로 더 잘 알려졌다는 매우 구체적인 사실까지도 ‘진실’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에서 제시된 ‘1925년’생이 아니라, ‘1924년’생이다. 작가는 진실에 기반 하되 조금의 변용을 거친 형식으로 사실정보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즉, 작가의 의도는 독자가 ‘실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과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다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작가가 도달한 세계 속에서 이렇게 ‘취사선택’된 ‘미시적 사건’들이 과연 최선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으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 최선의 ‘조합’인가?
미시적 사건의 조합에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는 점에서 가히 ‘가능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수학적인 가능성에 의한 ‘경우의 수’가 아니라 ‘우주적 질서’에 의한 ‘가능성’이다. 하나의 역사는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아주 작은 한 두 개의 미시적 사건들이 조금만 바뀌어도 달라질 수 있으며, 그것들이 어떤 연쇄를 가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조현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가 지금이 ‘이런 형태’가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나 있는 문을 열어젖히면서, 이 ‘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조현은 실제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존재하는 세계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선택지가 있는 세계일 것이다. 현실세계는 조현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세계처럼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가 아니다. 그가 믿는 세계에선 ‘시’를 기꺼이 소비하고자 ‘마이클 버거’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 현실을 바라봐도 알 수 있다. 현실은 그런 친밀감, 사랑, 애정으로 한 발 다가설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조현은 그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메마른 현실에 사랑을 주입하라
조현의 소설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각기 다른 얼굴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독자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전할 줄 아는 작가이다. 작가의 말처럼 “대저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콤플렉스의 발현”인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자와 공감의 영역을 형성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인다. 독자들은 그의 콤플렉스를 발견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렇게 교감하는 방식을 구현하는 조현은 그가 지향하는 ‘우주적 문학’의 목적을 일부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 햄버거의 역사에 대한 짧은 요약에서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인간에게 세계는 사랑의 기억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나 가족에 대한 이해심, 혹은 시적 상상력과 진보에 대한 점진적인 확신이 적절하게 버무려지면서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법인 모양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을 터이지만 말이다.(37쪽)
소설의 말미에 다다르자 그는 이제 이렇게 노골적으로 독자들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 마치 “제발 이렇게 읽어 달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그 방식이 투박하고 다소 세련되지 못할지라도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인간애’, ‘사랑’이다.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야 말로 유의미한 역사를 창조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인간의 사랑스러운 세계들이 모여 ‘우주’를 구성하는 것이며, 문학은 그 우주들을 서로 매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우주적 질서의 원리가 ‘사랑’으로 귀결된다니, 조금은 허무하고 빤한 결론이라 단정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그것에 빠지게 되고, 이내 내 사고를 완전히 잠식시켜버리는 것은 문학과 사랑의 공통점이다. 이런 둘의 공통점 때문에 사랑에서 문학이 시작되고, 문학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문학에 대한 조현의 ‘자기 고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문학을 생각하는 방식, 그에게 문학이란 어떤 존재인지, 또 그가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믿는지 혹은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한 태도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앞서 인용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의 견해를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우주의 질서와 조우하는 것은 무릇 ‘문학’의 능력이고, 이런 우주적 세계를 사랑스럽게 만들고 보듬는 것은 ‘인간애’ 나아가 ‘사랑’이라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비법은 ‘사랑을 담아 정성스럽게’ 그 세계를 빚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 ‘꿈을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나누는’ 일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애초에 그가 하고자 했던 문학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소설 속의 세계에는 ‘시’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시적 상상력’을 갈구하는 ‘시’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즉 시를 읽어주는 독자가 있기에 ‘시’는 유의미한 상품이 되듯,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문학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작가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끝으로 조현은 자신이 소설 속에 제시한 현실들이 ‘허구’임을 짚어주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설 속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우연과 필연을, 허구와 사실을 뒤섞어 제시한 것은 꽤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어느 순간, 소설 속에 존재하는 세계가 현실과 정 반대의 가치를 지향하는 전혀 다른 범주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작가의 의도를 단숨에 깨닫게 되고 전율하게 된다. 이 과정은 그 방식이 다소 진부하다 할지라도 짜릿한 전율과 함께 그 의도를 명료하게 전달해주므로 효과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