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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Dec 23. 2022

죄책감으로 인한 파멸의 양상

-고전소설 『장화홍련전』과 김지운의 <장화, 홍련>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2. 죄책감이 가진 두 가지 얼굴 -고전소설 『장화홍련전』                

 3. 사회 정의 구현과 가정의 파멸 - 김지운의 <장화, 홍련>    

 4. 현실 부정과 자기 파멸

 5. 나가며


1. 들어가며     

  고전 소설을 영상 문학적으로 변이하는 시도는 활발히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장화홍련전』은 우리의 사상이나 윤리적인 문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서사물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새로운 영상 장르로 재해석하고 재창조 하는 것에서도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고전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구비문학적 특성인 ‘적층성’을 가지고 있는 고전 문학은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이나 시대에 따라 변용되고 새로운 결말을 창조하는 등 끊임없이 재창작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수미가 ‘새엄마’라는 인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죄책감을 가시화시킨 영화,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한국 관객에게 낯익은 이야기인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을 끌어들여 수미의 환상을 구축하는 것을 돕는다. 아버지와 새엄마, 두 자매라는 인물구성을 제외하고는 원작과의 내용상의 유사성이 크지는 않으나, 제목을 <장화, 홍련>이라 붙임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친숙한 이야기 구조에 기대어 영화의 내러티브 즉, 수미의 환상에 감정 이입이 용이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운의 영화는 가공된 세계를 통해서 리얼리티를 얘기하는 것을 추구한다. 현실을 해체하고 다시 영화적인 가공과 재구성을 통해 자신이 살면서 느끼는 리얼리티를 역설적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그는 죄의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죄의식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그것이 <장화, 홍련>(2003)의 제작 의도라고 밝힌 바 있다. 감독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보편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고전소설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전문학이란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하면서도 이것이 다른 장르로 개작되거나 서사의 변주가 이루어졌을 때, 새로움이 배가 되면서 흥미가 유발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은 해석이나 관점,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장화, 홍련>(2003) 감독 김지운은 1964 7 6,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백수생활을 이어가다 《프리미어》에 「좋은 시절이라는 시나리오가 당선되었다. 1997  1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조용한 가족」이 당선되면서 작품이 영화화되었고, <조용한 가족>(1998) 통해 영화감독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 <반칙왕>(2000)으로  기세를 이어나가고, 공포 영화 <장화, 홍련>(2003) 발표했다. <달콤한 인생>(2005) <좋은 , 나쁜 , 이상한 >(2008) 발표하면서 나름의 흥행을 거두었고, <악마를 보았다>(2010) 통해 다시   주목을 받았다.

  김지운의 작품은 뚜렷한 장르로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역시도 자신의 영화를 특정 장르로 규명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 어떤 장르적 특성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장르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비슷한 지점으로 귀결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가 탄탄하고 완벽하게 구축된 내러티브로 진행되는 영화가 아니라고 말 한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에 관해서는 현실의 무료함과 권태, 무의미한 시간들을 견뎌내기 위해 계속 허구의 세계를 통해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충만 시켜가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김지운 감독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세트장 인테리어, 조명, 색감, 디자인 등 미술적인 부문이나 영화 음악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쓰고, 이런 예술적 감각을 연출 기법에 잘 녹여낸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인 <조용한 가족>(1998), <장화, 홍련>(2003),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 각각 한국 영화 평론가 협회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청룡 영화상에서 미술상을 수상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기존의 연구는 <장화, 홍련>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을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비교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특이한 점은 영화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초기의 논의에서는 두 작품의 관련성이 심각하게 의문시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원작소설 『장화홍련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영화라든지, 침대에 죽은 동물이 나오는 것만 빼면 아무 관계가 없는 영화라든지,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만 뽑아서 가지고 온 영화라든지 하는 평이 초기 평단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전의 이름을 제목에 빌려 쓴 그간의 영화들은 대개 고전의 스토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스토리, 주인공의 이름, 배경 등이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의 스토리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했을까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안겼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의 갈등 구도와 문제의식, 작품에 내재하는 다양한 모티프들의 차원에서는 『장화홍련전』과의 관련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김지운 역시도 <장화, 홍련>(2003)은 고전소설이 원작이며 이 작품은 고전의 재해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단이나 고전문학 연구에서의 관심은 주로 이쪽으로 수렴되었다. 조현설은 영화를 고소설의 이본으로 봐야한다고 전제한 뒤, 초기 비평의 성급함이 고소설에 대한 부족하거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비판하였다. 이정원도 조현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고소설의 이본으로 보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장화, 홍련>(2003)이 『장화홍련전』과 마찬가지로 여성에 대한 집합 기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이본이라고 하였다. 황혜진은 오히려 영화를 통해 고전을 이해하는 해석적 지평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초점을 맞춰 두 작품을 이해하고자 했다.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두 작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려 했다는 점에서 서은아의 논의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현자는 <장화, 홍련>(2003)은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 계모와 전실 자식의 갈등이라는 핵심 내용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사회적 이념과 개인적 삶의 부조화를 문제화하면서 전근대적 소설의 서사적 세계가 근대적 서사의 세계로 변화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였다. 권도경도 <장화, 홍련>(2003)을 『장화홍련전』의 현대적 재창조물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현자와 비슷하다. 다만 『장화홍련전』의 서사적 고정관념을 해체하여, 계모와 전처 자식에 대한 변화된 의식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 점에서는 차별화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대체로 <장화, 홍련>(2003)에 ‘이본’, ‘영상변용물’ 혹은 ‘각색’, ‘새로 쓰기’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면서 『장화홍련전』의 자장 안에서 <장화, 홍련>(2003)을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도 지적했듯이 서사물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구조의 유사성이 평론가들에게도 포착되지 않을 만큼 미약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접근법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특히 김지운 감독이 『장화홍련전』에서 예리하게 포착해낸 ‘죄의식의 부재’를 논의의 초점으로 가지고 오려고 한다면 서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죄의식’ 즉 ‘죄책감’이다. 수연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되는 <장화, 홍련>(2003)의 죄의식은 『장화홍련전』에도 나타나는데, 소설에서는 죄의식을 무력화시키거나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장치로 활용되는 등 이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김지운 감독이 『장화홍련전』에서 ‘죄의식의 부재’를 포착해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운은 원작을 읽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고, 모녀간의 대립구도 보다는 인물들의 정신적 압박감에 초점을 맞추었다. ‘죄의식’, ‘죄책감’, ‘파멸’은 『장화홍련전』과 <장화, 홍련>(2003)을 아우르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과 그 원작이라 할 수 있는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물들의 ‘죄책감’이 드러나 있으며, 이러한 정서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글은 두 작품에 드러난 ‘죄책감’의 정서가 각기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를 분석하고, 이 차이로 인해 어떤 방식으로 서로 다른 결말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죄책감의 개념을 정리하고, 고전소설 『장화홍련전』과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에 드러나 있는 죄책감의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이 죄책감의 정서가 각각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어떤 양상으로 변모하면서 작품을 전개해나가는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2. 죄책감이 가진 두 가지 얼굴     

  죄책감의 개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시각이 존재해왔다. 그것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프로이트(1930/1961)의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죄책감을 신경증을 일으키는 주된 정서로 강조했다. 이때 죄책감은 초자아의 발달에 중요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직접적인 결과로 설명된다. 따라서 심리역동 이론에서는 죄책감을 다양한 일상 경험의 결과로 바라본다. 에릭슨(1963)은 죄책감이 솔선감(sense of initiative)를 발달시키지 못한 결과에서 생긴다고 설명했으며, 클라인(1948)은 죄책감이 사랑과 배상의 문제의 중추라 설명했다. 또 루이스(1984)는 죄책감의 역할을 어머니와 아동 간의 분열로 생긴 감정적 유대의 회복이라 설명했다.

  그 중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견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프로이트는 죄책감이 양심을 위반했을 때 발생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서이며, 문명의 기원과 발달은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죄책감이란 초자아에 대한 자아의 불안을 의미한다. 죄책감은 자아의 불안이 외부로 발산하지 못하고 내재화될 때 발생한다. 외부 대상에게서 갖는 불안은 일종의 공포인데 반하여, 죄책감은 내적 대상으로부터 내적인 처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을 의미한다. 내적 대상인 초자아는 항상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벌을 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초자아의 내적 처벌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위협처럼 생생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죄책감의 문제는 주로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대체로 금기를 통해 유지되는 집단성과 연관된다. 전통적 가치가 우선하는 금기나 규범은 집단의 원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집단의 가치에 반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죄책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죄책감이 부과하는 실제적인 힘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공동체의 일원일 때 느끼는 죄책감은 윤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가치에 반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며, 대체로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 등의 감정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죄책감은 주체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의 결과이며, 주체가 자책하는 구체적인 행위와는 관계없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체로 자신을 비난하는 순간 처벌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이 따라온다. 처벌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도감을 준다. 실존의 한계에서 경험되는 죄를 정화하고 죄책감으로 인한 불안이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벌이라는 신속하고 깨끗한 결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책감은 기능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눌 수 있다. 죄의식의 긍정적인 기능에 대해 프로이트는 그 핵심을 잘 제시하고 있다. 그는 죄의식 감정의 강화를 문명화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언급하면서, 우리 인간이 문명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불가피하게 죄의식이 발달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우리가 문명화에서의 진보를 위해 지불하는 가격은 죄의식이란 감정의 고양을 통한 행복한 손실이라고 하였다. 그는 문명에 대한 가장 큰 장애가 ‘인간 존재의 서로를 향한 공격적 성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의식적인 죄의식 감정’이라는 점을 이론화 하였다. 따라서 그는 죄의식 감정을 ‘윤리의 근거’로 보았으며, 윤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다른 문화적 활동들의 수단에 의해 성취되지 않은 어떤 것을 초자아의 명령의 수단에 의해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 곧 하나의 치료적인 시도(Lickona, 1976: 142)로 파악하였다. 죄책감은 사랑과 공격 본능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특별한 형태의 불안이므로 죄책감으로 인해 초자아가 내재화 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법과 질서의 존재를 유효하게 만든다. 불안, 공포, 죄책감 등의 핵심적인 정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죄책감의 부정적 기능은 실제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지나친 처벌을 감행하는 측면에 있다. 자기 처벌로 인한 무의식적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지나친 초자아의 발달은 불안과 억압을 불러오는 긴장을 초래하게 되고, 그러한 긴장은 사회적 관계를 저해하고 소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어쩌면 죄책감의 다양한 측면을 수용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융은 자신에게 그림자의 열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정신의 전체성(Self)으로부터 분리된 자아(Ego)가 총체적인 정신을 회복하기를 거부하는데서 나오는 정서를 죄책감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죄책감이라는 일차적인 정서만을 고집할 때 정서는 분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정서를 인식하거나 수용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면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는 분노와 공포는 죄책감을 일으켜 피폐한 삶을 살게 한다.

  정리하면, ‘죄책감’은 ‘양날의 검’의 속성처럼 긍정적인 기능과 부정적인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얼굴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사회 구성원이 윤리적 규범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죄책감이라는 정서를 유발하여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은 실제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지나친 자기처벌을 감행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고전소설『장화홍련전』과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이러한 죄책감의 기능적 측면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즉, 이 죄책감의 두 가지 기능이 각각의 작품에서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지를 비교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로 인해 ‘죄책감’이라는 정서가 어떤 식으로 인물들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지, 나아가 이것이 어떤 결말을 초래하게 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3. 사회 정의 구현과 가정의 파멸 - 고전소설『장화홍련전』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은 계모와 전처자식의 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윤리적 문제점과 무능한 가장으로 인해 가정이 파멸되는 비극적 모습을 가족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후처제의 제도적 모순과 함께 가장의 무책임을 함께 다루는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모 허씨를 악인으로, 장화홍련을 선인으로 묘사하면서 선·악의 대립에서의 선이 승리하는 전형적인 고전소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허씨는 배좌수와 결혼 후 아들 셋을 낳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수가 장화와 홍련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쏟자 이에 질투를 느껴 두 딸들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게 된다. 허씨는 장화가 임신을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배좌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딸 홍련에 대해 수치심을 가진다. 그는 장화를 없애야 한다는 허씨의 말에 동조하고, 장쇠를 시켜 장화를 처리하게 한다. 즉, 딸의 살인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것이고 이에 가담한 것이다. 이는 우연한 사고였던 영화 <장화, 홍련>(2003)에서의 수연의 죽음과 대비되는 것이다. 허씨의 계략으로 장화가 죽은 후, 언니의 부재를 이기지 못한 동생 홍련마저 따라 죽게 된다. 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허씨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죄의식의 부재’를 포착할 수 있다. 이에 죽음의 원한을 풀고자 장화, 홍련 자매가 사또 조동현의 꿈에 나타나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여기서 원귀의 억울함과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조동현’이 있다는 것이 영화와 가장 구별되는 주목할 만한 점이다. 허씨는 자신의 악행이 탄로나 처벌 받을 것이 두려운 나머지 얄팍한 술수로 사또 조동현을 속이려 한다. 조동현은 처음에는 허씨에게 속아 장화와 홍련의 말을 믿지 못하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고 오히려 장화와 홍련을 의심했던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크게 반성한다. 사또 조동현은 장화를 죽이라고 지시한 허씨와 그 죽음에 가담한 장쇠에게 죄책감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죗값을 치루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장화와 홍련의 ‘죽음’이 ‘죄책감 발견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악행을 주도한 허씨는 조동현에게 죄가 들켜 처벌받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진정한 죄의식은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즉 윤리적인 모습이 결여된 전형적인 ‘악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외부 대상에게서 ‘외적인 처벌’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죄의식 이전 단계의 본능적 불안이므로 죄의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본능적 불안과 달리 죄의식은 내적 대상으로부터 ‘내적인 처벌’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예를 들면, 공격 충동이 외부로 분출되지 못할 경우에는 환상이나 몽상 혹은 꿈을 통해 대리적으로 분출된다. 그런데 자아는 나중에 이런 공격성이 내면의 관찰자인 초자아에게 발각되어 벌을 받을 거라는 불안을 갖게 된다. 외부로 발산되지 못한 채 내향화 된 원자아의 공격 에너지는 상당부분 초자아에 위임된다. 초자아는 자아가 ‘자아이상’을 위반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경우, 자아를 향해 이 공격 에너지를 가혹하게 분출한다. 그 결과로 자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비난의 목소리와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허씨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죄를 지은 허씨와 장쇠가 죽으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되고, 장화와 홍련의 부탁으로 인해 배좌수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선이 승리하고 악인이 벌을 받는 구조를 통해 ‘권선징악’이라는 전형적인 고전소설의 주제의식이 도출된다. 다시 죄책감에 초점을 맞춰보면, ‘조동현’이라는 심판자적 위치에 놓인 인물을 통해 악행을 계획하거나 이에 가담하거나 혹은 방관했던 계모 허씨, 장쇠, 배좌수에게 ‘죄책감’이라는 정서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사또 조동현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사회적·정치적 장치’ 혹은 ‘도구’로 기능한다. 도덕성을 상실한 인물들이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을 경우, 마땅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도덕적인 사회 형성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으며, 나아가 기존의 질서체계를 유지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반사회적인 개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실된 죄책감 능력’ 즉, ‘죄의식의 부재’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이 죄책감을 부여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질서에 재편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소설『장화홍련전』에서는 죄책감이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즉, 죄책감이라는 정서의 ‘순기능적인 측면’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윤리적 의식 즉 죄의식이 부재하는 악인 허씨는 이야기 초반부터 끝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주변적 인물들은 다소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예를 들어 허씨에게 속아 첫째 딸 장화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진실을 알게 된 배좌수는 이에 뒤늦은 회환과 후회를 하며, 허씨의 음모에 속아 무고한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을 반성하고 이에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규탄하면서 죄의식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야기 내내 무능하고 다소 어리석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나 있음 역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장화를 죽게 한 장쇠는 호랑이에게 팔과 다리를 물어뜯기고, 그 다음부터 공포감을 느끼며 장화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주변인물에게서 죄책감의 정서가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원작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 주가 되는 죄책감은 죄책감이라는 정서 그 자체보다는 기능적인 측면이다.

  자의든 타의든 장화가 죽은 후 홍련이 스스로 장화를 따라 목숨을 끊고, 잘못을 저지른 죗값을 치루기 위해 허씨와 그의 아들 장쇠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로써 사회 정의를 구현해내고 기존의 윤리질서를 유지하는 죄책감의 긍정적 기능이 나타나지만, 하나의 ‘가정’을 구성하고 있던 인물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면서 사실상 한 ‘가정의 해체’를 초래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가정의 파멸’로 귀결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장화홍련전』에서는 계모의 음모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으로 인해 장화와 홍련이 죽게 되고 이에 대한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매는 원귀가 되어 떠돌게 된다. 사또 정동현의 활약으로 진실을 알게 된 배좌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회환과 후회를 하지만, 이때는 이미 두 딸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으며, 장씨와 허씨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이 해체 되고 가정이라는 체계 자체가 붕괴되는 참혹한 파멸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결말에 아쉬움을 느낀 몇몇 독자들이 배좌수를 윤씨와 재혼시키고 두 딸을 낳아 장화 홍련이 환생하는 결말을 개작하기도 하였다.    

           

4. 현실부정과 자기 파멸 – 김지운의 <장화, 홍련>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지만 그가 책에서 밝혔듯이, 계모와 자매간의 대립구조만 빌려왔기 때문에 세부적인 인물설정이나 전개 양상이 원작과 크게 다르다. 따라서 두 작품은 각기 다른 결말에 도달하게 되고 이 때문에 두 작품관이 연관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장화홍련의 인물 설정이나 서사의 변주는 기존의 『장화홍련전』의 문맥을 벗어난 새로운 것이며, 현대적 관점에서 주제의식을 재조명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장화, 홍련>(2003)에서는 생모가 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화홍련전』과 달리, ‘자살’이라는 수단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이 아픈 상황에서 간호인과 바람을 피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서 옷장에 목을 매고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린 것이다. 동생 수연은 옷장에서 목을 맨 엄마를 보고 놀라 엄마를 옷장에서 끌어내리려다가 옷장에 깔리게 된다. 은주가 이를 발견하지만, 도와줄지 말지 갈등하다가 도와주기 위해 가는 도중 언니 수미와 말다툼을 하게 되고, 그 사이 수연은 죽게 된다. 수미는 그 때 자신이 은주와 말다툼을 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버리는 바람에 동생 수연이 죽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된다. 자신이 직접적인 행동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동생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은 그녀를 ‘해리성 인격장애’로 몰고 가게 되며, 원귀를 느끼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장화, 홍련>(2003)에서는 원귀가 원작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원작에서는 원귀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또 정동현의 꿈에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로 등장하며 이것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실마리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가 망상 속에 갇히는 것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그 망상 속에서 스스로 귀신의 존재를 만들어 내게 된다. 즉, 귀신의 존재가 현실 부정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수미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수미를 그 날 그 사건 안에 가두게 된다. 동생에 대한 죄의식의 표출은 은주에 대한 혐오와 망상으로 변하게 되고, 또 스스로 은주가 됨으로써 정신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연에 대한 죄의식을 이겨 내기 위한 방법으로 그만큼 은주를 미워하고 자기 생각속의 또 다른 은주를 만들어냄으로 써,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은주에 대한 증오로 치환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동생 수연과 친엄마의 부재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수연이라는 어린 동생이 목숨을 잃었고 그것에 대한 언니인 수미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수미의 정신분열은 다분히 이러한 ‘죄의식’에 말미암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척 사랑했던 동생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자책감과 이러한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은주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귀신처럼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런 이 죄책감으로 인해 수미는 수연을 떠나보낼 수 없었고 분열된 자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계모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최고의 공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 때의 공포는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신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장면들이 수미에 의해서 창조되고 가공된 죄의식의 발산이라는 것에서 관객들은 놀라게 된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죄의식의 크기와 그 짓눌림의 강도는 우리를 정신적인 공포에 휩싸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소설 『장화홍련전』에서는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죄의식이 새롭게 포착되고 영화에서 묘사된 다양한 그로테스크함과 함께 정신적인 공포로 승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의 반전에 이 영화의 핵심이 놓여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계모의 악행에 대한 고발이라는 해묵은 주제를 죄의식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어놓는 새로운 창조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장화홍련전』에서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죄의식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발굴하여 작품 이해의 전면에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장화, 홍련>(2003)의 의의와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좀 급격하다고 느끼는 경우, 고전소설『장화홍련전』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초기 평단의 논의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이라는 일차적인 정서만을 고집할 때 정서는 분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책감의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정서를 인식하거나 수용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면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는 분노와 공포는 죄책감을 일으켜 피폐한 삶을 살게 한다. 수미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매몰되는 과정을 통해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죄의식에 있어서 실제로 잘못한 것과 단지 그가 잘못했다고 상상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죄의식이 ‘상상적’인 것일 때 그것은 정신병적인 강박관념에서 나온 죄책감에 해당된다. 수미의 죄책감은 사실적인 사건에 연유한 죄책감이라기보다는 그것에 어떠한 ‘상상적’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죄책감은 병리적인 것으로 치환된다.

  모든 사회의 규범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합의가 개인적인 견해의 자의성을 배제한다는 점에 있어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고 할 때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수미가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규정짓고 자신에게 과한 책임을 묻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한 다음 후회할 때, 우리는 그가 정말 잘못했던 것에 대해서 느껴야 마땅한 만큼 후회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서로 모순되는 욕망들과 모호한 기억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즉, 씁쓸하게 자책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하는 대신, 내면에 피난처를 만드는 행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죄책감’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저지를 죄와 관계없이, 그것을 기억하는 자가 그에 따른 고통을 겪는 다는 것이다. 수미는 동생 수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 속으로 도피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수연의 죽음이 수미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수연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는 ‘가해자’라고 할 수 있다. 은주와 언쟁을 벌이던 당시에 수연이 처한 상황을 몰랐다고 할지라도 결과론 적으로 수미가 ‘가해자’의 위치에 놓임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수미는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이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수연의 죽음을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정'이 수미를 정신분열증환자라는 파멸로 이끌면서 오히려 수연과 친모의 부재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수미의 이러한 행동은 앞서 방법론에서 언급했던 죄책감의 부정적인 기능과 맞물리면서, 실제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지나친 처벌을 감행하는 측면 있다. 자기 처벌로 인한 무의식적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수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이로 인해 망상에 빠지면서 아빠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새엄마 은주와의 관계마저 완전히 파괴되는 것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무능하게 그렸다는 것은 원작과 동일하다. 이는 가부장제에 대한 김지운 감독의 비판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현은 수미에게 “제발 그만 좀 해.” 등의 말을 하고, 꼬박꼬박 약을 주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것이 없다. 아이들의 친엄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새 아내를 맞았다는 것과 딸 수연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이는 어리석고 무능하게 묘사된 『장화홍련전』의 배좌수와 호응되는 모습이다. 딸에 대한 죄책감이나 회환이 드러나는 『장화홍련전』과 비교했을 때, 영화 속 무현의 모습은 더욱 건조하게 느껴진다. 물론 원작에서는 계모의 계략에 속아 딸의 죽음에 아버지가 암묵적인 동의를 했으므로 이로 인해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릴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수연의 죽음이 일종의 사고였으므로, 무현이 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의사와의 통화에서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아.”하고 덤덤히 수미의 상태를 전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장화를 살해하는 데 가담하는 장쇠나 그들의 원귀를 보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동호 등의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은주의 동생 선규와 선규의 처 미희가 등장한다. 선규의 처 미희는 무현과 은주와의 식사에서 간질 증세를 보이며 발작을 일으키고, 그 발작의 과정에서 싱크대 밑의 원귀를 목격하게 된다. 이렇듯 선규나 미희의 역할은 지나치게 주변인물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원작에서의 배좌수나 정동호처럼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이야기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죄책감의 문제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할 때 죄책감을 느끼게 되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할 때 느끼지 못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영화 <장화, 홍련>(2003), 후자는 원작에 각각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건강한 아동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훔치기, 거짓말하기 등 일반적인 못된 행동들은 죄책감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한 무의식적 시도에서 행해지는 것들이다. 이러한 행동은 환상 속에서 제한된 범죄나 공격성을 시도함으로써 죄책감으로부터 안도를 얻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각하고 반사회적인 개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실된 죄책감의 능력인데 이는 원작의 계모 허씨를 통해 잘 드러난다.

  영화는 수연과 수미의 즐겁고 우애 좋은 모습을 묘사하면서, 수연의 죽음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수미의 모습을 극대화 시킨다. 결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엄마의 귀신과, 옷장 속 귀신의 존재는 수미가 죄의식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이다. 이처럼 <장화, 홍련>(2003)에서 죄책감은 수미에게 수연의 부재를 부정하고 원귀라는 새로운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써 동생이 느꼈던 감정과 고통을 느끼고자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국 영화에서 죄책감은 현실 극복이 아닌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의식의 발현이며, 이것이 결국 더 힘들고 비극적인 현실을 초래하여 가족 구성원 간의 불화를 조성하고 나아가 한 개인을 파멸로 치닫게 만든다. 수미의 죄책감이 단지 개인적 파멸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한 개인이 느끼는 죄책감이라는 ‘윤리적 기억’은 그것이 트라우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힘이 없는 것, 혹은 무의미 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5. 나가며     

  관객수 314만명을 동원하며 공포영화로서는 최대 흥행작 반열에 올랐던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현대 공포영화의 새로운 경향, 즉 이미 한국에서 공포의 아이콘이 된 여귀를 ‘활용’하여 환상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마련했다. 즉, 여귀 및 그녀의 행위를 추적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여귀의 이미지를 차용 혹은 전유하여 여성의 죄의식을 표현하는 자의식적인 공포영화의 등장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관심의 초점은 여귀가 아니라 여귀를 전유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여주인공의 무의식이 된다. 이를 여귀 공포영화에 대한 자의식에 가득 찬 공포영화라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자기반영적인 한국 공포영화의 등장’이라는 영화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고전소설『장화홍련전』의 콘텐츠로서의 가치와 가능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은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인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고 이를 개작함으로서 그만의 독자적인 감성으로 원작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매력과 예술성을 구현해내었다. 아울러 ‘공포’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리고 ‘크게 무서운 장면은 없지만 무서운 영화’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였으며, 공포 영화상 흥행작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또한 ‘죄책감’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이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전개해 나가며, 이를 극대화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긴장감 있게 이끌어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죄의식’이라고 명시하거나 이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아도 그 정서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죄책감으로 인한 한 개인의 정신적 파멸에서 나아가 가정 자체의 체계가 흔들리고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원작과 달리 죄책감의 중심을 언니 ‘수연’에게 옮겨와 여린 감수성을 가진 소녀가 파멸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을 더욱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철저히 감독의 의도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수미의 죄의식을 가시화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영화이다. 즉, 이 영화에서 수미의 망상은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한 소녀의 사투를 가시화한다. 동생 수연을 구하지 못했다는 한 소녀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망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한 소녀가 ‘죄책감’과 벌이는 사투를 다룬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죄책감’을 어떻게 가시화하며 또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 쾌락을 선사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 공포영화의 문화적 기능과 관련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죄’를 어떻게 무대화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장르를 생산하고 수용하는 집단의 윤리 의식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이 ‘과거의 죄’를 망각하기 보다는 수미를 통해 그것을 가시화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의 위치를 오가는 수미의 의식을 관객 앞에 전시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주체의 위치를 경험하게 한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 느끼는 ‘공포’는 매우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이 영화의 관람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망각’하지 못하도록, 즉 ‘과거의 죄’가 전시되는 장면들에서 소외되지 못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내내 과거가 제공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음산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 소설은 고정적인 서사가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고전 소설이 오늘날 까지도 활발히 개작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은 고전소설『장화홍련전』, 그리고 나아가 고전소설의 서사적 지평과 콘텐츠로서의 가능성까지 넓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기초자료]

한국어읽기연구회 편, 『장화홍련전』, 서울 : 학이시습 :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김지운, <장화, 홍련>(2003), 제작 영화사 마술피리·영화사 봄, 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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