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카스테라> 리뷰
문학에서 말하는 환상은 단순한 공상 또는 망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문학적 환상의 출발점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거부 혹은 대립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처럼 환상성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떠도는 유령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환상의 영역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 이면에 감춰진 틈새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틈새 공간은 현실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존재들이 현실 질서를 위반하면서 출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틈새 공간에 거주하는 억압된 존재란 다름 아닌 숨겨진 욕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에 대한 논의를 문학 작품 속 장르적 특징으로 정리하고 용어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츠베탕 토도로프다. 그는 '환상'을 문학의 특정 '장르'로 규정하고 독자의 '망설임'을 강조했다. 모든 것을 감각의 미망으로 생긴 상상력의 산물이라 치부해버리면, 세상의 법칙은 손댈 것 없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 현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칙에 지배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악마란 환각이며, 공상의 존재인가? 아니면 악마 역시 다른 생물과 꼭 마찬가지여서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좀처럼 만나지 않을 따름인가? 환상이란 이런 불확실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어느 쪽인가 대답을 선택해 버리면 대번에 환상에서는 일탈, 괴기 혹은 경이라는 인접 장르 어느 것인가로 길을 틀게 된다. 환상이란 자연의 법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분명 초자연적 양상을 가진 사건에 직면해 체험하는 일종의 '망설임'인 것이다. 토도로프의 초기 연구는 환상문학 장르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문의 연구 방법론으로 채택되어 활용되고 있다.
로지잭슨은 토도로프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되,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을 덧붙여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밝혔다. 잭슨은 환상을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적 삶의 욕망 사이에 위차한 '틈새(접근축)'로 규정하고, 어떠한 방식이든 환상이 현실의 세계나 원칙과 관계를 맺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세속화된 문화 내에서의 문학적 환상 형태인 '근대적 환상성'이 바로 '전복적 문학'을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환상에 대한 국내 연구 중 주목해야 할 것은 최기숙의 연구다. 최기숙은 환상은 문학의 출발에서부터 작동되어 온 상상력의 적극적인 활동이자 그것이 구축한 세계 인식의 기본 방식이라고 정의 내렸다. 따라서 문학에서의 환상은 세계 인식을 겨냥한 적극적인 활동이자, 낯설고 새로운 우주와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 현실이 은닉하고 있는 법칙화의 오류나 언어적 기호의 한계 혹은 모순을 복원시키는 힘이 된다고 파악했다.
문학에서의 환상은 현실적으로는 부재하지만 심리적으로 실재하는 욕망이 가시화되는 지점(심리학적 지형학)에서 발생한다고 봤다. 인간의 욕망은 현실적으로는 망각과 배제의 형식으로 은폐되고 억압되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종종 환상의 형식을 통해 '충족'과 '도피'를 추구함으로써, 그 실체를 긍정하고 그것의 대리적 해소를 지향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한 심리적 반대 지점에서 환상은 현실이 억압하고 은폐했던 세계나 그 구성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에 대한 전복을 겨냥하기도 한다고 봤는데, 이들은 인간이 억압하거나 은폐했던 욕망들을 해방시키고 현실의 질서나 법칙들이 배제한 요소들을 복원하는 반문화적 힘을 행사함으로써 환상의' 심리학적 지형학'을 구축한다고 파악했다.
본고에서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환상 개념인 '머뭇거림(망설임)'과 최기숙과 로지잭슨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물의 환상성을 분석해 볼 것이다. 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환상적 존재로 변모하여 결국 소외되거나 도피하고 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박민규 소설은 메이저보다는 마이너, 권력자나 지배자 보다는 약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사회에 올바른 구성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꼬집어 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자유로의 전환, IMF 이후 피폐해진 현대인들의 생활과 처참하고 초라한 노동 현실을 그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인간의 모습이 환상성을 통해 나타난다.
먼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부터 살펴보면,이 역시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안정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주변부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나'는 원래 좀 노는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산수'를 알아버린 이후 '조용'한 소년이 된다. '나'는 상업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편의점에서도 일을 한다.
원래 좀 노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나는 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 뭐랄까, 그 때는 몰랐지만 그순간 마음속에 <나의 산수>와 같은 게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랬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말그대로 수였던 것이다. 말수가 줄어든 대신, 나는 열심히 알바를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아프고 아버지가 실직한 상황에서 '나'는 또 지하철의 푸시맨이 된다. 시간당 삼 천 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흔 다섯 살에 시간당 삼천오백 원을 받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한 나에게 이것은 불기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정기적금, 정기적금, 또 한통의 자유적금. 시급 천오백 원과 천원이 따로따로 쌓여간 통장들을 생각하면 세상에 힘든 일은 없"는 '나'의 인생에는 '수학' 정도가 필요하지 않다.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너무도 일찍, 갑작스레 깨우쳐 버린 '나'는 재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주변부에서 표류할 뿐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편의점 일을 할 때 받았던 시간당 천 원 남짓한 시급이 푸시맨 일을 하면서 삼천 원으로 올랐다고 해도 그것은 '수학'이 아닌 '산수'의 세계이고 그 세계의 지속일 뿐이다.
나이 마흔 다섯에 시간당 삼천 오백 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여하튼 무슨 상사에 다녔는데, 여하튼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이었다.
나는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를 사람들이 득실대는 지하철 속으로 '억지로' 구겨 넣는다. 그렇게 매일 아침 미어터지는 만원 지하철 속에서 고통에 찬 사람들의 표정을 목도한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런 현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나' 역시 그런 일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산수'가 고스란히 '나'에게 되물림 될 것임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참으로 잔인한 산수인 것이다.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 속에서 '나'의 눈동자는 아버지처럼 잿빛으로 변해갈 뿐이다. 이렇듯 처량한 현실 속에서 도저히 벗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 현실이 전복되며 환상성이 발효된다.
이버지는 회사에도 가지 않았고, 집으로도 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실종. 경찰은 요즘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는 말로 나를 위로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 없었다. 그 후의 기억은……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회사를 상대로 밀린 두 달 치 임금을 받아냈고, 이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고, 이런저런 서류를 마련해 할머니를 관인 <사랑의 집>에 보내고, 이 또한 정말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으며, 경찰서와 병원을 꾸준히 오고, 가고, 또 여전히 일을 했다. 해야만 했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밀지 말라니까.
아버지는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힘들고 고달픈 상황이지만 자신이 그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낄 뿐이다. 주인공은 힘든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버틴다. 그러던 중 마지막 지하철에서 기린을 보고, 그 기린이 아버지라고 확신한다.
저것은 설마 기린이 아닌가. 그것은 정말 한 마리의 기린이었다. 기린은 단정한 차림새의 양복을 입고, 플랫폼 이곳저곳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오전의 역사는 한가했고, 아무리 한가해도 그렇지 -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뭐, 의 표정으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중략) 기린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곧장 나는 가슴 속의 말을 꺼냈고, 기린의 무릎 위에 내 손을 올려 놓았다. 떨리는 손바닥을 통해, 손으로 밀어본 사람만이 기억하는 양복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져 왔다. 구름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기린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맞죠?
실종된 아버지는 '기린'으로 변신한 후 나의 앞에 나타난다. 아버지는 더 이상의 산수마저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기린'으로 변모하면서 나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왜 하필 기린으로 변했을까? 기린은 초식동물로, 동물의 세계에서도 강한 지위를 선점하고 있는 동물이 아니다. 기형적으로 긴 목은 기린을 잘 노출시켜, 포식자로부터 눈에 띄게 하는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즉, 현실의 고단함을 버티지 못해 '동물'로 변신해버리는 '탈주'를 감행하지만 이마저도 '기린'으로 변함으로 써 여전히 약자의 위치를 표류하고 있는 '아버지'의 위치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위치는 곧 '나'의 위치나 다름없다.
즉, 현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쳇바퀴 도는 듯한 '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약자'들의 절망이 도피로 나타난 하나의 '탈주'는 결론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목이 길어 슬픈 기린은, 자본주의의 질서에 순응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현대인들의 비애와 닮아있다. 기린으로 변신한 아버지의 환영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상처 받은 약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상처를 준 현실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환상적 요소이자 소설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기린으로의 변신은 곧 나의 미래를 예고한다. '나' 역시도 '기린'으로 언젠가 변모할 인물인 것이다 아버지의 탈주가 실패함을 목도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일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무관심한 기린으로 변신한 아버지는 현실과는 다소 괴리된 존재이자 기존의 아버지와는 다른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는 인물로 변해있다. 이는 '인물 기반적 환상'이다 즉 이렇게 변신한 후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봐야만 견딜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환상은 독자들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동조하여 현실의 암담함과 슬픔을 느끼도록 만드는 기능을 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은 대학 시절 교수에게 시원하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로커로 발탁되어 로커 생활을 하던 나름의 반항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으나, 군대를 다녀오니 이상하게도 짜증이 눈 녹듯 사라지고, 더 이상 음악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성실한 취업 준비생으로 변모한 주인공은 인턴 사원으로 회사생활을 하게 되는데, 7명의 인턴사원들과 경쟁에서 이기고자 끊임없이 고군분투한다.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을'을 자처하고, 이에 순응하면서 어떻게든 이 속에서 살아남고자 온갖 모욕과 수모를 견딘다. 차비 정도의 월급에도 강도 높은 노동 조건을 기꺼이 수용하고, 남색가인 직장 상사에게 성적 유린을 당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주인공은 회사에서 손 팀장을 만나게 되고, 손 팀장은 회사를 떠나기 전에 주인공에게 '너구리 게임'을컴퓨터에 깔아달라고 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너구리 게임을 다운 받아준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너구리 게임에 몰두하던 손 팀장은 급기야 점점 너구리로 변해간다. 너구리는 기업이라는 구조를 교란하고 와해하는 외부의 적으로 상징화되는데, 이 때문에 결국 손 팀장은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하게 된다. 손 팀장 역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너구리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인물 기반적 환상이 포착된다.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탈락하기 이전까지 손 팀장은 '지나치게 완고한 표정'을 가진 엄격한 인물로 나오지만, 너구리로 변해가면서 점점 이상행동을 보이게 된다. 너구리로 변신하는 환상의 등장과 함께 손팀장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점차 인간에서 너구리로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인 '나'나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는 생각과 행동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너구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손팀장에게는 당연한 생각과 행동이 된다. 이런 관점의 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현사상에 지배되어, 획일화 되고 몰개성적으로 변한 인간의 시선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한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너구리에게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손팀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인사부장이 은밀하게 접근해 온다. 인사부장은 남색가였다. 나는 이를 어느 정도 눈치 채면서도 인사부장의 부름을 거부하지 못한다.
너구리 게임속에 등장하는 너구리는 과일을 따먹고, 벌레들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이를 실패하면 압정에 찍혀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너구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끊임없이 벌레를 피해 과일을 따먹으며 생존하거나, 압정에 찔려 죽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이 정식 사원이 되기 위해 인사부장에게 성을 상납한 것은 압정에 찔려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벌레를 피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생존하는 너구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래서 '나'는 목욕탕에서 너구리를 만난 게 아닐까?
도저히 발기할 것 같지 않던 페니스가 발기한 것은 왜였을까. 그리고 그 순간 <스테이지 23>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왜 였을까. 왜 세상은 스테이지 1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되지 않는 것일까.
후회는 없다. 돌이켜보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청춘이다. 경쟁자는 많고 취업은 힘들고, 세상은 엉망이었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이제 잠깐 후면 나는 저 허공 너머 점 한 칸 크기의 착지점 위에 무사히 착지해 있을 것이다. (중략) 나는 그 거대한 욕탕의 바닥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피부가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수치의 온수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증기가 피어 오르는 그 물줄기 속에서 나는 갑자기 혼자란 느낌이었고, 쓸쓸했고, 눈물이 났다.
주인공이 남색가인 인사부장에게 성을 상납하는 장면은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권력에 순응하고 이를 감내하면서 어떻게든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사투를 보여준다. 그는 "돌이켜보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청춘이고, 경쟁자는 많고 취업은 힘들"기에 견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어쭙잖은 자위에 불구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취업에 무사히 성공할 수 있다면 목욕탕에서 인사부장의 욕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쯤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려던 '나'는 너구리의 환각을 보게 된다. 스스로의 속물적인 욕망을 목도하고서 "뭔가를 얻기 위해선 자신도 뭔가를 내줘야 하는 인생의 법칙"에 순응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의 산수와도 맞닿아 있다. 정말 기막히고도 잔인한 산수인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에 편입되기 위해 '성기'와 같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내어줌으로 말미암아 너구리와 대면하며 <스테이지 23>으로 진입하게 된다. <카스테라>에 속해 있는 수많은 동물 제목의 단편들은 동물이 되어야만 견딜 수 있는, 즉 '인격'을 버려야만 지탱할 수 있는 첨예하고도 모욕적인 자본의 질서를 대변한다. "냉장고는 인격이었다"고 오히려 냉장고가 '인격'으로 전치되는 까닭도 이와 관계된다. 냉장고는 적어도 부단히 "부패와 싸우"며 끊임없이 소음을 냄으로 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기를 물어도 찍소리도 못하는 인간에게 인격은 하나의 사치품 혹은 퇴행 기관에 불과하다. 이에 박민규는 자본의 구주에 물린 스스로를 동물로 강등하고 오히려 사물에 그 인격을 부여하는 역설을 감행한 것이다. 사람을 너구리로 변신하게 만들고, 인턴사원이 정식사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남색가에게 유린당하고도 아무 말 못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곳이 바로 인격이 결여된 이 세상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등가 교환 관계에서 약자는 늘 약탈당하는 위치에 놓이며 생존을 위한 교환 관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인간성이 박탈 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구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만 우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며, 이 환상이 결국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잔인한 산수를 몸소 체험한 인턴사원과 너구리에 대해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과 동일시 하기 싫어하는 다소 모순적인 감정과 조응하게 된다.
강유정은 아예 박민규 소설을 읽기에 앞서 몇 가지 '협정'을 맺자고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소설의 관습에 대한 기대나 예측을 버릴 것, 자본주의는 현재 인간의 생태를 규명하는 가장 적확한 언어라는 것, 외계인은 존재한다는 것, 이 협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 읽기는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발되는 우연성이 개연성을 조소하는 일탈의 장인가 하면, 산문인지 운문인지 모를 무규칙 이종 문장의 격전지라는 것이다. 소설의 흔적을 지우면서 출현한 새로운 소설이며, 동시대라는 시대적 맥락의 전제를 벗어나서는 헛소리가 되는, 그야말로 사사로운 현재의 이야기가 바로 박민규의 소설인 것이다. 이 행각이의 경우, 문맥 안에서 어떤 언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를 강조하기 위해 행갈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행갈이를 하여 그 언어를 강조하게 된다. 오히려 사소하기 때문에, 잊혀진 것이기 때문에, 또는 억눌린 것, 숨은 것, 숨긴 것, 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행갈이를 통해 그 '특정'언어를 강조하고 부추기고 그것에 생동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박민규는 매끈한 외형을 지닌 미학적 소설이 아닌 어딘가 한군데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파이터형 소설로서 현실을 응대한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일부이면서 시스템을 내부로부터 교란하고자 하는 변종 바이러스처럼 박민규는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점점 키우며 변종해간다. 이는 "온몸의 균형이 골고루 잡힌 보디빌더가 아닌 한쪽의 근육만이 기형으로 발달된 이종 격투기 선수가 되어보겠노라"고 호언장담했던 그의 인터뷰 속 자기다짐이 실효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의 소설 언어의 가벼움은 그 운동하는 사유가 운동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한 계기임을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가벼움은 인간적 가벼움을 세계내적 가벼움으로 사유하는 가벼움이다. 즉, 그의 소설 언어와 구성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따로 살면서도 서로 침투하고 작용하며 생명체처럼 진화를 꿈꾸는 상황, 그의 표제작이 상징하듯이 '카스테라'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엇인가 행동을 취할 때, 그것은 '매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복학을 한 선배가 지나치게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말투를 무의식적으로 쓴다거나,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지나치게 선배 행세를 할 때 친구들은 이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복학생 말투'를 쓰는 선배는 '웃긴 선배'로 간주되며 유머감각이 있는 선배가 되는 것이다. 즉, '지질함'이라는 것은 일부러 그것을 취할 때 매력적이며 그것이 바로 '의도적 키치'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장르문학이야말로 21세기 문화콘텐츠의 근간을 이루는 창의력과 상상력의 보고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문화연구에 치중하는 논자들의 비교적 일치되는 입장인 듯하다. 다른 한편 중간문학 또는 제4문학으로도 일컬어지는 장르문학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무척이나 분분한 편이다. '본격문학'과의 관계설정에서 때론 날선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이 경계가 흐려지면서─그와 동시에 각각의 문학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새로운 형태의 형식 실험이 활발해지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나 장르문학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입장일수록 특정 연령이나 성, 계급에 집중된 독자층의 성공적인 확보가 오히려 게토화로 이어져 장르문학의 지평을 왜소화하는 것에는 비판적인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박민규의 언어는 능청스러우며 그 능청의 수위가 위태로워서 그랬는지, 당시에도 "과연 박민규의 이러한 시도가 소설사적으로 그리고 세대론 적으로 의미 있는 징후인지, 아니면 단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한때의 에피소드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평가가 있다.
박민규의 문학이 '시간을 죽여주는' 기성 대중소설의 오락성과는 분명히 다른 발상과 재미를 도발적으로 제기하고 느끼게 하기 때문에 의문이 더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을 훨씬 구체적으로 압박하는 정밀한 '사실적 상징'을 독자는 바란다. 이 바람은 대중성과 정치성을 좀 더 정교하게 결합함으로써 장르문학의 게토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문과도 통하는 것이다. 박민규의 말처럼 "지난 수십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다면, 장르문학의 실험에서도 리얼리즘 유산을 활용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이제는 단순한 따라잡기를 넘어서 박민규와 여러 작가들이 모색하는 장르 문학의 창의적 활용 가능성을 구체화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은 강조할 만하다.
박민규는 마이너적 감성을 통해 메이저의 언어를 공격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나 문체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민규식 특장은 호흡의 마디에 따라 행갈이된 시각적 문장의 해체에서도 드러난다. 박민규의 문장은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시각적 한계를 호흡의 마디로 기준 삼아 배치된다. 마치 모니터 킨트들이 애용하는 인터넷 카페의 지면이나 미니 홈페이지의 게시판처럼 박민규의 문장은 개인용 컴퓨터 시대의 관객을 염두에 둔 채 배열된다. 필연적으로 박민규의 소설에는 따옴표나 말줄임표 혹은 인용 부호 따위가 없다. 행갈이가 곧 따옴표이고 여백이 곧 말줄임표이며 문단이 사고의 단락인 박민규식 문장 구성은 인터넷 키드와 모니터 킨트를 위해 친절하게 도용된 셈이다. 이러한 가시적 문단 구조는 시스템을 내부의 언어를 통해 와해하고자 하는 박민규식 공격법이기도 하면서 그만큼 동시대의 문화에 깊게 침윤된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민규의 문학은 '장르 문학'의 새로운 서사적 지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문체나 문학적 특징들이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문학이 '재미'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특유의 '박민규스러움'이 있고, 그것이 바로 다른 '박민규 아류' 작가들은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아이덴티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