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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25. 2021

‘의지(依支)’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意志)’

편해영, 『홀』


공포와 불안을 소비(조장)하는 사회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면 의외로 쉽게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사회적 결속력과 연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그것을 제법 잘 이용해왔다. 박정희 정권에서의 ‘반공논리’가 그랬고, 나라가 어수선 할 때마다 ‘북한의 도발’을 들먹이며 국민들의 ‘단합’과 ‘애국’을 강요하는 것이 그랬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AI’로봇과 그 이름도 섬뜩한 ‘인공 지능’의 등장으로 인간의 자리는 한 걸음 더 밀려난 듯 보이는 요즘, 아마도 현대인들의 불안은 더 가중되었을 것이다. “진보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긍정성으로 포장하고 자연의 불확실성을 지속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불안은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불안은 메울 수 없는 공동(Hole)처럼 개인의 일상 곳곳에서 은폐되어 있다.”는 정재훈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공유할 수 없는 저마다의 ‘공동’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결코 공유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것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더욱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 모두가 하나의 ‘재난’에 처해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북한의 ‘도발 관련된 뉴스를 쏟아내며, ‘국제 정세 운운하고, 당장 국가의 안보와 개개인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사건건 자잘한 일들에 신경 쓰는 것은 지극히 ‘무의미 일임을 일깨워주려 애쓴다. 비교적 최근 개봉한 좀비 영화(부산행) 제법 흥행을 거두었으며 ‘애국심 앞세웠던 영화들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 것들만 보아도 대중은 함께 짊어질  있는 ‘재난 상황,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정된  ‘공포 ‘불안 기꺼이 소비한다는 것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심연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소재는 영화, 문학과 같은 예술에서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재난을 소재로 다룬 서사들은 재난 발생 상황으로 말미암은 현장과  현장의 묘사,  현장 속에 내재된 폭력성을 들춰냄과 동시에 이러한 상황에서 극한에 치닫게 되는 공포감을 재현해낸다.

  한편, 문학에서 바라보는 재난과는 반대로, 신자유주의와 후기 근대가 바라보는 재난(근대적 재난)은 스펙터클을 전제한다. 그것은 재난의 현장을 카메라로 조망하며, 그곳 한가운데에 불타고 있는 희생물을 (생)중계할 뿐이다. 이처럼 근대적 재난은 탈(脫)인간 방식으로 중계되거나, 가공되어 시장에 유포된다. 이렇게 가공된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진정 어떠한 부분에 주목해야 되는지를 간과하기 쉽다. ‘재난’으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파멸해가는 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재난’ 그 자체에 더 집중해버리기 때문이다.

  근대적 재난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사건(부정성)임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구가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성도 함께 뒤따라 나온다. 여기서 ‘근대적 재난’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재난은 작용-반작용의 관계처럼 필연적으로 ‘해결책’이라는 재난 이후의 조치를 동반한다. 기술의 진보든, 넘치는 인간애를 발휘하여 이를 해결할 영웅적 인물이든 반드시 이것이 해결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동반하는 것이 바로 근대적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적 재난은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 발생하는 ‘탈(脫)인간화’의 문제를 앞서 언급했던 미미한 ‘긍정성’에 기대 해결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거나 혹은 터무니없는 말일 수 있다. 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현대인들은 ‘재난’을 소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난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에 따른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 이로 인해 현대인들은 공포와 불안을 소비하면서 역설적으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된다. 손쉽게 얻어지는 순간의 사회적 결속력과 연대가 ‘탈 인간화’ 현상, 그것도 ‘지속적’인 탈 인간화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작가 편혜영은 이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재난 그 자체나 재난 발생 경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재난으로 인해 내부의 공동을 자각하고 이로 침잠하는 한 개인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 것이리라.

     

‘의지’라는 잔인한 논리의 폭력성

  이 소설은 ‘재난’ 그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다. 재난이 발생한 원인과 정황, 사건의 경위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서술하기보다는, 재난 이후 불구가 된 ‘오기’의 삶에 집중하여 서술해 나간다. 따라서 불구가 된 오기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오기는 대학에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리잡은 교수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가던 중 언쟁을 벌이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이 일로 아내를 잃게 된다. 오기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게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이 후 유일한 가족인 ‘장모’에 의지해 살아가야하는 비극적 삶이 그에게 닥친 어떤 상황이 진짜 ‘재난’인지를 의심케 한다.

  불구가 된 오기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의사의 물음에 눈을 껌뻑이는 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오기 씨, 장해요. 큰일을 해냈으니까 이제 다시 힘을 내봅시다. 알았어요?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예요. 이제부터는 오기 씨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의학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하단 말이에요.”(11쪽)라고 말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의학보다는 의지’가 진정으로 재난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의지’라는 것은 오기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후에도 오기는 끊임없이 ‘의지’의 중요성을 주입받는다. 앞서 언급했던, 재난이 해결될 수 있다는 모호한 ‘긍정성’의 부분만 세뇌 받는 셈이다. 이러한 반쪽짜리 응원은 도리어 오기를 기만하는 폭력적인 처사이다. 이럴 경우, 재난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충분한 ‘의지’를 발휘하지 못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의학 보다 의지’라는 잔인한 논리에 따르면 말이다.

  오기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병원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비로소 “넘치는 광량과 친절하게 오기를 살펴주던 간호사, 두 눈만 끔뻑이는 오기에게 정말 잘했다고 격려해주는 의사가 있는 평실이 아니라, 시끄럽고 번잡스럽고 줄을 서고 기다리고 힐끔거리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의사의 말대로 의지를 발휘해야만 살 수 있는 세계로 말이다”(13쪽) 라고 깨닫는다. ‘의지’를 강요하는 폭력성의 그늘을 마주한 순간일 것이다. 어쩌면 의사가 교묘하게 삭제한 근대적 재난의 ‘부정성’의 부분을 슬쩍 스치듯 본지도 모른다. 오기는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지, 이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도 살고 싶기는 한지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내 대신 운전대를 잡아 이렇게 식물인간으로나마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다행스러운 일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오기는 죽은 아내를 부러워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이렇게라도 살아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소리나 들었다.”(51쪽)는 부분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지도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지도’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는데, “지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75쪽)는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지도’는 ‘의지’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지도의 불완전성은 근대적 재난의 반쪽짜리 긍정성이나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된 ‘의지’의 속성과도 맞닿아있다. 지도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의지’ 없이는 병(혹은 재난 상황)을 극복할 수 없지만 ‘의지’만으로 병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도는 “실패를 통해 나아”진다는 점에서 오기의 삶보다 훨씬 나았다. “삶은 실패가 쌓일 뿐, 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75쪽)라고 말하는 오기는 그래서 지도학을 전공했던 것일까. ‘실패’를 겪으며 점점 더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도와 달리 ‘재난’으로 인해 한 순간에 ‘병신’이 되어버린 오기의 삶은 다를 수밖에. 따라서 ‘의지’라는 그 반쪽짜리 긍정성이 얼마나 부질없고 터무니없는 것인지, 그에 비해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의 무게는 얼마나 무지막지하고 버거운 것인지 그 잔인하고 폭력적인 논리를 오기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오기는 더더욱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무서운 생존력을 가진 덩굴식물이 징그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기는 점점 자신이 징그럽게 여기던 ‘덩굴식물’과 유사해진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듯 달라붙어서 기어이 파고들어 몸통을 불리는 게 지독”해 보였다던 오기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변인들을 이용하려 안간 힘을 쓴다. 기댈 수 있거나 타고 오를 수 있는 곳만 있으면 줄기를 타고 올라가 결국 면 전체를 덮어버리는 덩굴 식물처럼, 자신을 도와 줄 가능성이 보이는 인물들에게 집요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물리치료사에게, 또 제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한 오기의 시도는 다 좌절되고 만다.  

  오기의 생존방침을 두고 정재훈은 “오기의 생존 방침은 덩굴식물의 그것처럼 생명 유지만을 위해 움직이는 지극히 퇴화된 성향을 띤다. 이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오기가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불구가 된 자신을 ‘계속 돌봐줄 사람’인가, 아니면 ‘완전히 버릴 사람’인가로 말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다소 동의하기 힘들다. 오기가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를 ‘이분화’ 했다는 해석은 조금 과장된 바가 있다. 그는 장모에게 그와 같은 철저히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댔을 뿐이지, 모든 타인에게 ‘나’를 계속 돌봐줄 사람인가, 버릴 사람인가를 따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순전히 ‘물리치료사’나 ‘간병인’을 이용하기 위해, 마지못해 믿은 것이고 ‘계약’의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인들에게 ‘계속 돌봐줄 사람’인가 ‘완전히 버릴 사람’인가 라는 ‘신뢰’를 잣대로 두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기는 오히려 이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혹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쓸모없는 사람’인가 하는 ‘유용성’과 ‘실효성’의 측면에서 타인을 판단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연대되지 못한 산발적 개인과 속물적 자아

  오기가 가진 속물근성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오기는 재난을 겪기 전과 후에 모두 일관적으로 어떠한 ‘속물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동료였던 케이의 약점을 떠벌렸던 일 등은 과도한 경쟁 속에서 까발려진 이기적인 개인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임용 당시 동료의 약점을 이용해 술수를 부렸고,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으며,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한(184쪽)” 오기는, 지나치게 ‘경쟁’만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에 이미 타성적으로 젖어든 개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만 내가 설 자리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오기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에 대해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기에 그는 이미 너무도 순종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순응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윤리의식의 부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생존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비윤리성’과 ‘이해타산’은 오기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통해왔기 때문에 그의 확고한 전략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오기의 이런 속물성은 ‘사회’에서 그가 한 자리를 차지 할 수 있게 도와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철저히 자신을 ‘고립’시키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던 ‘아내’가 그에 대한 ‘고발문’을 쓰게 되었다든지, 재난 상황이 발생한 후에 유일한 가족으로 남게 된 ‘장모’에게 조차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장모로부터 벗어나 고립되고자 한다든지 와 같은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는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가족들’에게 ‘관찰 대상’이 되어야 했던 것일까. 결국 오기가 순응해왔던 시장 논리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강력한 것이어서,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스스로 상실해가며 기꺼이 그 체제에 휩쓸리는 동안, 그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던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재난이 발생함에 따라 그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장 논리와 경쟁사회로부터 도태되고 나자, 그는 결국 자신이 그 세계 속에서조차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은 얼굴이 찢어지고 몸이 부서지고 망가져 누워 있는 동안 모두 보란 듯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오기의 부상은 세상에 어떤 교란도 일으키지 못했다.”(153쪽)     

  즉, 오기는 그 어디에도 연대되지 못했던 것이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개인으로서 그렇게 자신의 내부의 공동을 키워갔을 따름이다. 정재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품의 말미에서 오기가 마주한 “내부의 공동”(185쪽)은 그가 직면하게 될 비인간적인 삶의 공허함이자, 인간다움이라는 기반이 붕괴되어 버린 윤리적 파산 상태를 암시한다. 오기는 고립 당하기도, 스스로 고립되고자 노력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 ‘고립상태’는 개인의 ‘의지’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차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적 재난의 문제인 지속적인 ‘탈 인간화 현상’과 관련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개인의 고립이 어찌 ‘의지’로 해결될 수 있겠는가. 이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안일한 태도가 또 있을지 의문이다.

  오기는 나중에 살려달라는 뜻인 “다스케테쿠다사이”라고 중얼대는 장모의 행동을 따라 자기도 끊임없이 “다스케테쿠다사이”라고 되뇐다. 가족을 잃음으로써 자신이 가진 삶의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모 역시 오기와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이러한 장모에게 딸의 죽음은 ‘재난’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기와 장모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기의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장모가 그들에게 농담조로 오기를 조롱하며 뱉었던 ‘오기’와 ‘자신’의 공통점은 슬프지만 진실로 그러했다. ‘홀아비’와 ‘과부’의 상관관계, 둘 모두 ‘홀로’ 남겨진 존재라는 것. 그로 인해 ‘고립 될’ 존재라는 진실 말이다.

  한 편, 오기는 아내를 존중한다고 포장해왔지만 실은 무관심하게 방치해왔다. “오기는 아내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정원에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얼마든지 돈을 써도 양해할 수 있었다. 아내는 그럴 자격이 있었고 오기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아내의 삶과 취향, 선택 같은 것을 존중할 작정이었다. 사실 상관하고 싶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었다.”(89쪽) 라는 부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존중’이었으나 이면적으로 그것은 ‘무관심’이자 ‘방관’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내마저도 ‘고립’시키고 만 것이다.      



하나의 편린으로 흩어지는 죽음

  오기는 사랑하는 아내와 살면서도, 아내가 이상해져간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아내의 입장에서 아내를 이해하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늘 오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넘어갔다와 같은 방식으로 아내를 대했다. 그는 아내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실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고 어쩌면 그것이 당연했다.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심리적으로 가장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내는 그와 같이 살 이유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기는 아내를 ‘성공한 멋진 여성’이 되고 싶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끊임없이 좌절되었다는 것에만 주목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방에 두었던 사진들 속의 여자들은 모두 ‘성공한 멋진 여성’인 동시에 ‘자유분방하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오기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속물’이었던 오기의 눈에는 아내 역시 ‘속물’로만 비춰질 수밖에.

  작가는 재난 즉, 교통사고가 일어난 사건의 정황을 다소 모호하게 서술하고 있다. 오기가 스스로 앞의 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인지, 그 때 아내가 오기가 앞 차를 향해 돌진하게 막았는지 아니면 돌진하지 못하도록 제지했는지를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독자는 누가 죽고자 했는지 불분명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오기는 차가 앞차에 부딪히고 가드레일을 받고 난 뒤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을 때 “편안해졌다”(185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마음이 놓였다”고. 어쩌면 오기는 아등바등 현실 속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삶에 대한 그 자신의  반포기적 결정으로서의 죽음에 애꿎은 아내를 함께 한 셈이다. 결국 자신은 죽는 데 실패했고, 아내만 세상을 떠났다. 오기가 원했던 ‘고립’을 아내는 성공한 것이다. 오기는 아내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날 아내와 자리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끝까지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재난’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고, 이를 기리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 어떤 윤리의식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윤리의식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서 아내의 죽음이 어떠한 ‘슬픔’으로 기려지기 만무하다. 오기가 느끼는 것은 고작 ‘부러움’ 따위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장모 역시 딸이 남긴 사위에 대한 ‘고발문’과 몇몇까지 산발적인 기록들로 딸의 삶을 반추할 따름이다. 오기는 장모가 읽은 글들이 어떤 것들인지, 따라서 장모가 오기의 아내에 대해서, 또 오기에 대해서, 나아가 오기와 아내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무언가를 ‘알고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오기에 대한 장모의 행동과 태도의 변화로 이를 알 수 있다. 정재훈의 글에서는 “장모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위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딸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작중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오기에 대한 장모의 행동을 ‘딸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장모는 딸의 기록들을 보며 분명 분개했을 것이고, 한 편으로는 아득해지며 답답했을 것이고, 오기가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웠을 것이지만 이것이 ‘딸’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딸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만큼, 딸을 자신과 동일시했다고 해도,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그만두었던 자신의 남편과 동료 제이와 바람을 폈던 오기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해도 이것을 딸에 대한 ‘연민’이 아닌 ‘실망’으로 치부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명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해석이다. 그것을 되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소중한 사람일 수 있는 가족을 잃고도 오기와 장모는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것을 기리고 추모할 여유가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대로 망자의 삶을 조립해나가고 마침내 그들 멋대로 재구성하고 해석한 그 삶을 진정 그 ‘죽은 자의 것’으로 보아야할지, 볼 수는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도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처럼, 아내의 죽음, 딸의 죽음은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Hole’로 ‘홀로’ 들어가는 개인

  편혜영은 ‘재난의 일상화’를 파격적이고도 섬세한 감각으로 작품에 구현한 작가이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재난, 광범위한 재난이 아니라 교통사고라는 일상적인 재난을 통해 한 개인의 ‘지속적인 탈(脫)인간화’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홀’의 특징이다. “근대적 시스템-재난은 일시적인 사태로서 부정성인 동시에, 그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근대적 재난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안하고 불행한 상황에 처한 개인일수록 ‘절박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상황일수록 ‘주술’에 걸려들기 쉽다. 그것이 비록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반드시 어딘가에 ‘의지’해야만 한다는 주입에 쉽게 흔들리고 노출될 수 있으며, 어긋난 의도를 곡해하고 기꺼이 그것에 마음이 동한다. 결국 ‘의지(意志)적’으로 ‘의지(依支)함’으로써 고립되거나 소외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이러한 모습을 살펴보았을 때, 근대적 재난은 사회 질서나 체제를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속시키고 이러한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같은 이유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난’을 소비하며, ‘불안’과 ‘공포’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를 철저히 ‘소비’함으로 써 고갈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성찰’은 결여된다.

  가장 쉽게 연대를 느끼는 방법은 위기상황에 함께 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재난’을 그들의 범주에 끌어들임으로써 손쉽게 연대를 얻고자하고 ‘같은 처지’에 처해있다는 공포와 불안을 공유하며 어쭙잖은 ‘자위’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속적인 탈 인간화’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그 어떤 해결책도 될 수 없다. 결국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는 방법은 그것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것도, 이를 소비하며 허울뿐인 ‘연대’를 시도하는 것도 아닌 ‘성찰’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모두의’ 혹은 ‘공동의’ 재난이 아니라, ‘교통사고’라는 보다 미시적인 범주의 ‘한 개인’의 재난을 다루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우연한 재난을 겪은 한 개인의 생애를 조망하면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는지, 또 그 극복이 어떤 식으로 좌절되는지, 마침내 한 개인이 어떻게 파멸하고 마는지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찰’이니 ‘인간성 회복’이니 하는 진부한 얘기가 결국 해답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한 개인을 무너뜨리는 것은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재난 이후 저 깊은 곳으로 침잠해버리거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한 채 의미 없이 부유하는 개인의 정신상태이기 때문이다. 병든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자신뿐이라는 것을,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결국 ‘의지’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불안’과 ‘공포’속에 놓인 개인은 ‘의지(依支)’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意志)’를 가져야 함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Hole’로 ‘홀로’ 들어가는 것도 ‘개인’ 스스로이며, 그 ‘홀’에서 사유하고 다시 ‘홀로’ 나올 수 있는 것도 결국 ‘개인’ 그 자신뿐이다.           



          

<참고문헌>

정재훈, 「묵시적 재난에서 개별화된 재난으로 - 편혜영 ‘홀’」 , 세계일보 신춘문예, 2018.

편혜영, 『홀(The Hole)』, 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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