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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12. 2021

오늘도 엘리베이터에 누군가가 끼어있다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1.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누구인가 

  ‘나’는 우연히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낀 ‘대롱거리는’ 사람의 다리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나’는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는 그를 무심히 지나쳐가는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신의 눈높이에 있는 발을 살짝 당겨보기도 하고 ‘여보세요’라고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여기서 엘리베이터에 낀 사람에 대한 지칭명사가 ‘사람’에서 ‘그’로 바뀐다.     


 오 층을 지나가면서 보니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채로 6층과 5층 사이에 걸쳐 있었고 엘리베이터 아래로 사람의 다리 두 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죽었을까 살았을까.(중략) 나는 슬쩍 아래층 쪽을 내려다보면서 갈등했다. 할 수 없군. 나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살짝 당겨보았다 (발은 내 얼굴 높이에 있었다). 여보세요.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발이라고 할 수 없는 신음도 흘러나왔다.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를 구해낼 힘도 시간도 없었다. (p.102)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채 바쁘게 출근하던 무리들은 그 사람이 남자인지, 아직 살아있는지 따위는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엘리베이터에 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가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신음”을 흘러내는 것을 듣고 엘리베이터에 낀 사람이 ‘남자’라는 것과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정황을 파악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면서 어서 신고 해줄 테니 안심하라는 말과 함께 안됐다는 표정을 보여준다든지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순 없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거꾸로 처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가 굳이 엘리베이터에 낀 사람을 ‘거꾸로 처박힌’ 상태로 설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익명성’을 상징한다. 간혹 소설가들은 스토리 자체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정하지 않고 J라느니, K라느니, 김 혹은 최씨, 그 남자 정도로 설정하기도 한다. 김영하도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가 특정인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이러한 설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한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다수’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를 ‘얼굴’이 아닌 ‘다리’만 보이도록 한 것은 ‘소통 불가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리’와 소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보고, 눈빛을 주고받고, 최소한 면대면의 상태에서 말 한마디라도 주고받아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데, 이러한 설정은 애초에 소통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한편,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가 다리만 보인다고 상상해보면, 이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비일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것으로 엘리베이터에 남자가 끼어있다는, 그것도 ‘거꾸로’ 끼어있다는 것은 분명 비일상적이고 비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는 바가 있다.

  ‘나’의 면도기가 그것도 무려 질레트사의 면도기가 이유 없이 툭, 부러질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며 ‘운수 좋지 않은 날’의 진득한 체취를 풍기게 된다. ‘나’는 하필 15층에 살고 있어서 가뜩이나 늦은 출근길에 수염을 반만 깎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그리고는 연쇄적이고 다발적으로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들이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러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무시하고 온 죄를 받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엘리베이터에 갇혀버린다. ‘나’가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그를 구출해준 사람 역시 누군지 모른다는 것에서 익명성에 대한 암시가 또 한 번 드러난다.      


 노래 부르기에도 지쳐 잠까지 오려는 찰나, 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리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조금 열리고 그 사이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가 물었다. 이봐요. 도대체 왜 거기 있는 겁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건 엘리베이터 관리인인 당신이 답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중략) 엘리베이터 관리인은 잠시 후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p.115-6.)     


  여기서 ‘나’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 불쑥 엘리베이터에 얼굴을 들이민 남자를 당연히 ‘엘리베이터 관리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후 그가 정말 엘리베이터 관리인이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부분이 나온다. ‘나’가 엘리베이터 안에 벗어 놓은 구두를 찾아달라고 했으나, 끝내 받지 못해 경비원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볼 때이다. 그들은 끝내 나를 구해준 그를 찾지 못한 채 “저희로서는 모르겠네요”라는 무책임한 답변만을 내놓는다.     

 경비원들에게 엘리베이터 고장과 나의 구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누가 나를 꺼내어주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거나 무전을 쳐댔지만 삼십 분이 지나도록 그 문제의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저희로서는 모르겠네요. 사무실에 슬리퍼라도 있으면 신으시고요. 근처 구두 가게에 가서 하나 사서 신으시지요. (p.120.)     


  ‘나’를 구해준 사람은 엘리베이터 관리인이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경비원들이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그가 ‘엘리베이터 사고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무전을 해가면서 삼십분이 지나도록 그가 누군지 찾아내지 못한 것은 단지 그가 전화기나 무전을 확인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엘리베이터 관리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나’를 도와준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든 ‘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에 낀 존재는 어떤 특정 개인이 아니라 아무라도, 누구든지(anybody)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불특정다수의 성격을 띤다. 두 다리가 삐죽히 뻗어 있는 장면은 바로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위험의 상존성과 편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그는 왜 엘리베이터에 끼어있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엘리베이터에 ‘끼어있게 되었나’가 아니라 왜 ‘끼어있는 상태로 있나’이다. 이는 ‘나’가 엘리베이터에 갇혀있게 된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미스 정과 엘리베이터를 타다 별 이유 없이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었고, 아파트의 그 남자 역시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끼어있는 채로’ 혹은 ‘갇혀있는 상태로’ 지속하고 있느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는 사람들의 무관심, 이기주의, 지나친 개인주의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 낀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전혀 궁금해 하지 않으며, 아무리 긴급한 목소리로 심각성을 말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는 사람 취급을 해 버린다. 이것은 ‘나’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1) 약속 불이행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는 도움을 주기로 한 사람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상황이 크게 세 번 가량 반복된다. 첫 번째는 ‘나’의 약속 불이행이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출근하면서’ 신고해준다던 ‘나’는 바쁜 오후를 보내고 뒤늦게 서야 사무실 전화로 119에 신고를 한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넘어서야 오전 7시 50분쯤의 일을 신고하는 그의 말은 “이거 보세요. 저희 바쁜 사람들입니다. 농담할 시간 없단 말입니다.” 따위의 말을 들으며 무참히 무시당한다. 신고를 하긴 했지만, 제대로 신고가 접수된 것이 아니며, ‘출근하면서’ 신고를 해주겠다는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전화기’가 없어서 혹은 사건사고가 기가 막히게 겹치는 바람에 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출근길에 즉시 신고를 하지 못했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신고가 제대로 접수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나는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라며 체념해버린다. 그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끼어있던 남자는 행방을 감춘 뒤이다.

  두 번째는 먼저 올라가 ‘나’를 구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원관리부에게도 ‘나’의 사정을 말해주기로 한 ‘미스 정’이 있다. ‘나’가 우연히 한 남자에 의해 구출되기 전까지, 그리고 노래를 부르다 지쳐 잠이 들기 전까지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스 정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 후, ‘나’가 자신의 부서에 부랑자 꼴을 하고 갔을 때도 부서 사람들이 그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보면 ‘자원관리부’에 얘기하기는커녕 자신을 구해준 ‘나’의 부탁 자체를 까마득히 잊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녀는 설사 그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므로 그 약속을 지킬 ‘의무’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구두를 가져다주기로 한 엘리베이터 관리인의 약속 불이행이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의 구두를 꺼내어 가져다주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구두를 ‘나’가 직접 발견해서 발을 끼워 넣기 전까지, ‘나’는 맨발로 다녀야 했고 구두를 찾으러 가는 길에 경비원들에게 붙잡히기 까지 한다. 한 대리 덕분에 겨우 풀려난 ‘나’는 자신을 제지하는 경비원들에게도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구두의 행방을 묻지만 그들은 ‘모른다’고 답한다.

  이러한 세 번의 ‘약속 불이행’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의 모습이 부각된다. 타인에 대해 한없이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결코 신경 쓰지 않는 이기심의 발로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마는 상황이 펼쳐진다. ‘나’가 도와 줬음에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미스 정’을 보면, 남을 위한 자발적인 ‘희생’은 차치하고서라도 남에게 받은 도움을 갚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너를 도와줬으니 너도 나를 도와 줘라’는 일종의 ‘계약’ 혹은 ‘기브 앤 테이크’ 마저 이행되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든지 희생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결핍되어 이기주의만이 팽배한 도시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소통의 부재  

  ‘나’가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신고해 주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지만 거절당하는 부분 역시 소설 전반에 걸쳐 여러 번 나타난다. 먼저, 그의 말을 무시한 것은 핸드폰이 없다며 거절하는 한 중년 남성이다. 그러나 그는 후에 버스 사고가 나자 자신의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두 번째는 뒤에 서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힘겹게 손가락을 들어 공중전화기를 가리키면서 공중전화를 쓸 것을 권고한다. 세 번째는 사고가 난 버스에서 전화를 마친 사람인데, 핸드폰을 빌려달라는 나에게 걸 데가 있다며 빌려주지 않는다. 네 번째는 몸집이 풍성한 아줌마로, 전화카드를 빌려달라는 나에게 모르는 사람에게 카드를 빌려줬다가 요금이 많이 나오게 된 사연을 줄줄이 읊으며 거절한다.

  이들에게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어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내 핸드폰을 굳이 빌려 주어야하나’인 것이다. 굳이 귀찮게, 타인을 위해 나의 물건을 내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기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공중전화를 이용하라고 손가락을 까딱하고, 자신이 낭패 본 경험을 읊는 식으로 방어를 한다. 정말 우리는 핸드폰이 없다면, 누군가가 핸드폰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정말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끼어’있다고 해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는 걸까. 하루가 다 가도록 ‘신고’조차 할 수 없는 걸까.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다가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어이없는 실소가 나온다. 김영하는 작가와의 대화에서 핸드폰과 같은 매체가 인간소외를 부추기게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저는 소통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호출기나 핸드폰, 인터넷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소외를 더 부추기고 있는 현상에 관심이 있습니다.(중략) 현대인의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들은 기본적으로 반소통적입니다. 영화가 그렇고 비디오가 그렇고 핸드폰이 그렇습니다. ( 김영하·김동식,「 작가와의대화」, 『제 44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1999, p.83.)    


  소설이 나왔을 당시보다 지금은 핸드폰과 관련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상태이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핸드폰’은 단순한 ‘통신 수단’, ‘전화기’의 의미를 넘어서 현대인의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스마트폰 중독’에 걸린 소위 ‘스좀비족’이 생겨나는가 하면 폰을 보고 걷느라 일어나는 사건·사고도 비일비재하다. 핸드폰이 없으면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원활하고 편리한 ‘소통’의 ‘매개’가 되어야 할 핸드폰은 오히려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퇴색’시키는데 열렬히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랜선 친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핸드폰이나 SNS, 인터넷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과시하고 비교하고 그럼으로써 가상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철저히 갇혀있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같다.     

  소설 전반에 걸쳐,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사건을 줄줄이 나열하는 ‘나’는 제 갈 길 바쁜 도시인들에게 일종의 ‘위협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굳이 그런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도, 그가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핸드폰을 빌려주는 것도, 나아가 모르는 사람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도 일종의 ‘시간 낭비’인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여 서로를 소외시키고, 소통하려들지 않으니 엘리베이터에 그 남자는 ‘끼어’있을 수밖에 없으며 나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미스 정을 보낸 채 속절없이 ‘갇혀’있을 수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3. 오늘도 엘리베이터에 누군가가 끼어있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위해 신고를 하고, 그를 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아주 잠깐의,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도움의 손길이 도무지 구해지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된 채로 시간이 흐르게 된 것이다. 철저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바쁜 출근 시간대에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구하는 것은 ‘오지랖’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혹은 제 갈 길 바쁜 이들에게 ‘귀찮은 일’ 혹은 ‘나와 상관없는 일’ 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부터 ‘오지랖’이 되어야하는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우리 모두가 ‘나’가 아닐까, 혹은 ‘미스 정’이 아닐까.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게 언제든 엘리베이터에 끼어있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대한 답을 상상하는 것은 제법 무서운 일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는 일은 썩 유쾌하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끔찍함’에 가깝다. 사람들은 폰으로 전화를 걸어 신고를 하는 대신에 동영상을 찍어 SNS에 업로드를 할 것이다. 혹은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제법 불쾌하고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것, 타인이 처한 위급하고 난처한 상황은 단지 ‘사건’일 뿐, ‘사고’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소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있음에도 신고할 생각보다는 영상을 찍기 바쁘다는 것이 어쩌면 핸드폰이 ‘없어서’ 신고를 하지 못했던 ‘나’의 상황보다 더 참혹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못해 그것을 ‘가십거리’ 정도로 치부하고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즐기고 있다는 것이 끔찍스럽다.     


 담배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 빨려 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들러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된 채로 뱉어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p.285.)     


  이처럼 김영하는 작가 후기에서 ‘담배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하의 글은 가볍게 ‘읽을거리’정도 인가 싶다가도 곱씹어 보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고 피식했다가도 찜찜하고 음울한 기분이 며칠 째 가시지 않는 걸 보면, 그리고 대롱거리는 그 두 다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부유하는 걸 보면 나에게 있어서 그는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담배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일정부분 달성한 듯도 싶다.  

  결국 ‘나’는 끝끝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걸까.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거나 피해버리는 탓에 그 남자의 행방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엘리베이터에 누군가가 끼어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을 당신이 그냥 지나쳤을지도, 혹은 그 누군가가 당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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