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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Feb 09. 2023

부서지고 찢긴 존재의 환부를 보듬는 따뜻한 시선 2

― 조수경,『모두가 부서진』




재난이 곧 좀비인 세계

 어렵사리 받아들인 불편한 진실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고통을 직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현실’이라할 수도 ‘꿈’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악몽’으로 얼룩진 현실과 꿈이 ‘혼재’된 상태의 공간으로 인물들에게 주어진다. 「젤리피시」 속 분절된 신체들이 널려 있는 성인용품점, 「할로윈―런, 런, 런」의 폐장된 놀이 공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좀비랜드’, 한 없이 드넓지만 오로지 한 길밖에 없는 「오아시스」의 사막의 공간들은 하나같이 ‘현실’이라고도 ‘꿈’이라고도 볼 수 없는 악몽이 엎질러진 모호한 공간적 속성을 보인다. ‘꿈’과 ‘현실’ 둘 중 어느 하나라고 단언할 수 없는 흐트러진 경계의 세계가 그들이 꿈을 통해 실재를 받아들인 후 직면하게 되는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은 「할로윈―런, 런, 런」이다.     

살인마 수한은 꿈속에서의 수한. 현실에서의 수한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 꿈은 가짜. 현실은 진짜.
무엇이 진짜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몇 달간 계속 이어지는 꿈 때문에 이제 나는 정말로 수한이 두려웠다. 처음엔 가짜라는 걸 알고도 무서운 정도였지만, 점차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요즘에는 이불 속에 망치를 숨겨두고 그것을 한 손에 꼭 쥐어야만 간신히 잠이 들 정도였다. 오랜 불면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143쪽)     

 내가 살기 위해서 타인을 죽여야 하는 좀비들의 세계는 죽음과 공포를 상품화 하는 한 낡은 놀이공원에서 펼쳐진다. 좀비가 되어 사람들에게 ‘겁’을 주며 인간 사냥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가장 손쉬운 사냥감을 물색해 날렵하게 그것을 사냥한다. 그 곳에서 ‘나’는 ‘최고의 사냥꾼’으로 군림한다. 사람들은 경보음이 들리면 무조건 대피소로 뛰기 시작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린 탓에 꿈 속 ‘가짜’ 수한을 진짜라고 착각하다 이내 진짜라고 믿고 그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는 여주인공 미래처럼, 좀비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게임에 몰입하며 ‘가짜’ 좀비에 공포를 느끼다 이내 스스로 좀비가 되기도 한다.      

“미래야, 넌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니? ‘모든 재난이 곧 좀비’라는 말.
 그렇게 말하고 영수는 알겠다는 듯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혼잣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좀비가 아니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공포지. 공포를 던져주면, 그냥 믿는 거야. 아무런 의심도 없이.”(145쪽)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공포’를 소비하며 그 ‘공포’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상상은 실재가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정말 가만히 있었을 때, 그 후의 세상을 상상해 본 거죠. 진실로 둔갑한 거짓, 거기에 공포를 더할 때 그것이 갖는 위력에 대해서요. 진실을 덮기 위해 사람들에게 계속 공포를 심어주면 결국 진실보다 공포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런 모습이 ‘좀비’나 다름없죠. 세월호 이후 이 이야기가 계속 맴돌았는데 ‘혼이 비정상’이란 말을 듣고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인지가 선명해졌어요. 이야기가 빠르게 완성될 수 있었던 촉매제였죠.”      

  바이킹의 추락을 두고 “배는 순식간에 추락해버렸어”라고 묘사하는 영수의 말에서, 세월호 사건이 연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작가는 이를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조수경은 한 인터뷰에서 위의 인용문과 같이 말하였다. 재난의 순간에는 누구나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이 때 냉철하게 진위를 파악하고 진실에 귀 기울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배가 뒤집힌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명령을 따랐던(혹은 따라야만 했던) 학생들과 그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감, 그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들, 세월호 사건이라는 큰 재난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재난이 곧 좀비’라는 말을 그 자체로서 증명한 듯 보인다.

 주인공은 꿈에서 자신을 압박해오는 그림자(수한)가 자신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망치를 휘두르는데, 현실에서는 남자친구로 의심되는 누군가의 진짜 칼에 찔리고 만다. “동이 틀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그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녕 이 ‘악몽의 세계’, ‘악몽보다 더 악몽 같은 현실’로부터는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작가는 미완의 결말들을 남기며 악몽과 현실이 혼재된 세계에서 탈피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무한연쇄의 인간먹이사슬

  「사슬」은 작가의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모두가 부서진”이라는 표제처럼 그의 소설에는 권력의 먹이사슬에, 극악한 폭력 앞에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찢기고 부서진 사람들이 하나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이들은 머리가 잘려나가거나(마르첼리노, 마리안느), 절단된 사지들이 바다를 부유하고(젤리피시), 좀비가 된 애인이 흉기를 들고 덤비는(할로윈-런,런,런) 악몽을 거듭 꾼다. 「사슬」에서는 개와 돼지가 소녀를 겁탈하고 동물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기괴하고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인간사회’란 그야말로 ‘악몽’보다 더 끔찍하고 참담한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저는 사람들이 들여다보기 두려워하는 내면의 지하실 같은 곳에 시선이 머물러요. 고통스럽기는 저도 마찬가지지만, 꼭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집요함이 있어요. ‘사슬’은 자연에서의 먹이사슬과 완연히 다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그래서 무서운 인간사회의 먹이사슬을 주목했어요. 더 무서운 건 이 먹이사슬이 무한 연쇄로 이어져 있다는 거죠.”라는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이, 지하실의 전형적이고도 극단적인 형태는 「사슬」에서 볼 수 있다.     

철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사방이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철문은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입니다. 안쪽에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바깥쪽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기 때문이지요. ‘방’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정체가 애매한 이곳에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창이 없어 낮과 밤을 알 수 없고, 창이 없어 공기가 흐르지 않는 이곳은 잃어버린 시간이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고, 고약한 냄새가 기름때처럼 눌어붙어 있습니다. 어쩐지 손등이 가렵고 등이 서늘해지는 기분 나쁜 곳이지요.(157쪽)     

 「사슬」의 무대인 이 지하의 밀실은 입구와 출구가 모두 봉쇄된 끔찍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사납고 표독스러운 검은 개와 세 인간이 섞여 있다. 방 안의 풍경은 왠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공간에 짐승과 인간이 동서(同棲)하면서 인간이 돼지라 불리고 개가 소녀를 겁탈하는 등 짐승과 인간의 경계가 식별되지 않은 채로 혼재한다. 벽에 고정된 사슬마다 짐승들이 묶여있는데, 이들을 묶고 있는 ‘사슬’보다 더 주목해야할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 즉, ‘먹이사슬’이다. 저 공간에 있는 짐승들은 그들만의 위계 질서체계를 정립하고,  그들 나름의 ‘위계’에 의해 ‘먹이사슬’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상식과 달리 이들 사이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개다. 검은 개가 소녀를 겁탈하면, 다음으로 돼지 차례, 그 후에 노인의 차례가 주어지는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검은 개돼지노인) 종종 ‘주인’이라 불리는 사내가 먹이를 들고 문을 열 때가 있는데, ‘사내’는 이 먹이사슬의 ‘최고 포식자’에 해당된다.

 짐승과 인간의 지위가 뒤바뀐 이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한 공간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지하실 바깥의 먹이사슬에서 최하위 피식자에 해당하는 나약한 인간임을 알려주는 소설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포식자와 피식자,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서로가 물고 물리며 끝없는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인간 사회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적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사슬은 반드시 다른 사슬과 고리를 만들게 되며, 이 사슬의 고리는 또 다른 사슬과 연결된다. 이렇게 한 없이 사슬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먹이사슬’ 구조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 먹이사슬은 다른 먹이사슬과 접해있고, 연쇄적으로 무한한 양상을 보인다. 악몽이 끊이지 않고 계속 중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슬의 고리들은 맞물리고 연결된다.

 지하 밀실의 안과 밖에는 서로 다른 ‘먹이사슬’이 존재하고, 이것들은 서로 연접해 있다. 작가는 사내가 최하위 포식자로 존재하는 이야기와 최상위 포식자로 존재하는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배치한다. 이 두 이야기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별개의 에피소드로 ‘별개의 사슬’인 것 같지만, 방심하는 사이 일순간 맞물리며 연쇄적인 ‘먹이사슬’ 구조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사내의 아버지가 다른 먹이 사슬에서는 최하위 포식자일 수도 있고, 지하철의 폭행자 역시 마찬가지로 지하철을 벗어난 공간에서는 다른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듯 현실 세계는 무한연쇄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코 이 잔인한 먹이 사슬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이것을 깨닫는 지점이 선사하는 충격과 공포는 지하밀실이라는 공간만큼이나 서늘한 것이다. 작가는 이를 굳이 에둘러 전하지 않고 우리 눈앞에 제시함으로써 잔인한 인간 생태원리에 대한 사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기꺼이 악몽 꾸기

 조수경은 그간 발표한 소설들로 보아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흡인력 있는 서사’를 구축하는데 재능이 있어 보인다. 이를 통해 인간 사회의 어둡고 추한 민낯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의미가 있다. 특히 작가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꿈’은 이 불쾌한 진실을 고지하곤 하는데, 일반적인 도피처로서의 꿈이 아닌 지독한 악몽을 통해 어떤 각성을 이끌어낸다.

 조수경은 표면에 드러난 현실이 아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춰진 진실’에 주목하고 이 진실이 다소 불편하다 할지라도 대면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한 작가다. 서로의 생명줄을 뺏기 위해 달리며 물고 또 물어뜯기는 좀비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단지 ‘좀비랜드’라는 테마파크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좀처럼 벗어날 방도가 없어 보이는 먹이 사슬과 그것과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의 세계는 단지 소설 속 공간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이보다 더 가혹할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부서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고 건네는 조수경의 염세적인 말은 왠지 모르게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악몽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현실이 더 악몽 같은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의 말은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이런 현실에서 희망을 전하고, 핑크빛 전망을 제시하며 위로하기 급급한 ‘문학’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처사에 불과하다. 그러한 위로는 언제 칠지 모르는 파도 앞에서 모래성을 쌓아올리는 행위에 불구한 것이다.

 조수경은 ‘모래성’도 ‘성’이라는 달콤한 위로를 건네는 대신, 그 성이 ‘모래’로 되어있고, 따라서 언제든 ‘파도’가 몰아치면 부서질 수 있는 것임을 기꺼이 알려준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높은 파도를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균열이 있고 조금쯤 부서진다 할지라도, 파도를 피하는 것만이 모래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님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고단한 현실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문학의 역할은 순전히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악몽’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조수경은 그 역할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부서진 “삶을 붙잡는 방식(252쪽)”으로 언제나 ‘글을 쓰는’ 일을 택했다는 조수경은 소설을 통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찢겨지고 부서진 조각난 존재들에게 안부의 인사를 전한다.      

“세상에 부서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쩌면 저는 이 인물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안부를 묻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괜찮으냐고…. ‘사는 게 재앙’ 같은 날들도 많지만, 최승자의 시처럼 결국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몸이든 마음이든 부서진 사람들이 이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생을 꽉 붙잡았으면 좋겠어요.”      

 이렇듯 그녀는 ‘모두가 부서진’ 현실을 살아가는 ‘부서진 존재’들의 찢기고 부서진 ‘환부’를 외면하지 않고 이를 보듬는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는 게 재앙”일지라도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생을 포기하지마라고 당부하는 그녀 역시도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악몽’들을 제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꺼이 악몽 꾸기’를 권고하고, 이렇게 마주한 진실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실체와 대면하는 깨달음을 선물하는 작품들을 계속 써주길 기대해본다.          


◇ 참고자료     

<단행본>

조수경, 『모두가 부서진』, 문학과 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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