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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ul 15. 2024

달콤한 '안이'로부터의 탈피

심보선, 「아침의 안이」 단평

 


    ‘안이’라는 것은 ‘너무 쉽게 여기는 태도나 경향’인 동시에 ‘근심 없이 편안한 상태’다. 그렇기에 중독적이고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것이리라. ‘아침의 안이’에서 화자는 자니 캐시가 흘러나오는 오를레앙의 카페에서 한없이 안이해진다. 오죽하면 마신 커피의 ‘첫 모금’이 어제일 것 같을까. 아침은 매일 새롭게 밝아 오는 것이자,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아침’을 ‘나’는 ‘선량한 사람’으로 여겨왔으나, 밤이 되면 “꿈의 뻣뻣한 뒷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그가 섬뜩하리만큼 소름끼치기도 한다.


   ‘안이’가 삶을 잠식하는 순간, 인생은 끝난다. ‘타성’에 젖는 것, 너무도 흠뻑 젖어 더 이상 의 새로움을 찾지도 바라지도 않을 때 비로소 ‘안이’의 그림자가 슬며시 드리우게 되고 인간은 마침내 그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지경이 이른다. 살아가는 것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시인은 “습관적이고 연속적인 순간들”, “쉽사리 떠오르는 과거들”, “사랑과 무관한 상실들” 따위를 떠벌리며 “개자식들이 담배를 나눠 필 때” 즉, 전혀 새로움이 없는 어떠한 ‘나태’와 알량한 ‘안이’의 순간의 파편들이 삶을 잠식할 때 “어쩌면 인생 전부가 여기서 간단히 끝난다”고 말한다. 정말 시인의 말대로 ‘간단히’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안이’를 경계하고자 화자는 ‘자니 캐시’를 ‘오늘’의 ‘아침의 이름’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을 아침의 속성으로 부여할 때 마침내 아침은 “안이하게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하심! 사샤! 시몬! 로자!”와 같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을 외쳤을 때, 비로소 나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섬뜩한 ‘아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했듯, ‘안이’가 삶을 잠식하는 순간,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면 인간은 죽고 싶어진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타성에 젖어 들어가 마침내 ‘안이’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습관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나를 만들며 살아간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을 때, 인간은 조금의 수치심을 동반한 무기력과 함께 죽고 싶어진다. 화자 역시 그런 안이한 순간들에 끔찍이도 죽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자기 연민에 그치거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해 풀썩 주저앉는 대신 “죽고 싶었던 순간들만 모아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시’라는 말이다. 그 순간들만 모아 ‘다시’ 살고 싶다는 것은 단순히 후회로 점철된 지난날을 어찌 해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라 가장 편안했기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의 순간을 다시 치열하게 살아내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타성적 자아’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일종의 선언인 것이다.


   지극히도 관성적인 아침을 단순히 조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시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바꿔보려고 하는 것, 타성적 자아를 직시하고 이에 허망함을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성적인 속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한다는 것, 이를 통해 자아 확장을 꾀함과 동시에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 이 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가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시인이 힘을 주어 “죽고 싶었던 순간들만 모아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하자 묘하게도 희망과 의지가 샘솟고 이 한 문장에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시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왠지 내일은 너무도 쉽게 안이한 아침으로부터 탈피해 내가 선택한 낯선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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