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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an 13. 2024

아무말도




하고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나는 따뜻한 차를 끓였다.

유리 머그잔에 차를 넣고 따뜻한 물을 부으면

향긋한 차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몇 분 정도 충분히 차를 우려낸 후

마침내 한 모금 마시면,

그 온기가 몸에 퍼지는 속도에 맞춰 스르륵

하고 싶은 말도 삼켜졌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차를 우려내고 차를 마시고

그 시간만큼 하고 싶은 말도

시간과 함께 진득하게 우려내고

차와 함께 꿀꺽 삼켜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너에겐

아무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어쩌다 실수로 말을 꺼냈다 해도

그냥 거기서 멈추고 끝맺지 않는 편이 낫다.


공허하게 흩어지게 두는 편이

훨씬 낫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다.

언제부턴가 그게 옳다고 믿게 됐다.

적어도 너한테 만큼은.



지금 계절이 겨울인 것에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겨울공기와 따뜻한 차는 너무도 잘 어울려서

겨울은 말을 삼키기 참 좋은 계절이 아닐 수 없다.



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서

말을 삼키고

또 삼키고

점점 더 많은 말을 삼키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딱히 삼킬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하고싶던 많고 많은 이야기도

다 증발해버렸다.

찻잔에 남은 아련한 차 향처럼

어렴풋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이럴 때 나는 제법 상쾌하다.

익숙하지 않은 어떤 것이 불편하다

어느새 그 상태에 적응되고

마침내 그것이 그렇지 않았을 때 보다

더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음을 새삼 실감할 때


그럴 때 나는 내 자신이

대견하고 안쓰럽고 자랑스럽고 애처롭다.


그때의 기분이란

슬프고도 뿌듯하고 찝찝하면서 상쾌하달까.






나는 너에게 할 말이 없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다,

더 이상은.





따뜻한 물을 끓여

차를 한 잔 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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