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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an 31. 2024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새하얀 수건을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적는다.

미용실 같은 곳에선 짙은 회색이나 갈색 수건을 주로 사용하지만, 집에서만큼은 하얀 수건을 쓰는 마음으로.

미용실은 파마도 하고 염색도 하고 그 과정에서 얼룩이 많이 묻다 보니 진한 색의 수건을 쓰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호텔처럼 새하얀 수건을 쓰고 싶어.

얼룩이 묻으면 바로 티가 나서 알아차릴 수 있는, 모를 수가 없는 흰 수건 말야.

얼룩이 묻어 지워지지 않으면 걸레로 쓰지 뭐.

걸레로 쓰기에도 너무 더러우면 그냥 버려 버리지 뭐.

그래도 하얀 수건을 쓸거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새하얀 수건에 얼굴을 닦고

샤워 후에 새하얀 수건에 몸을 닦고

욕실에 걸려 있는 새하얀 수건을 보는 일

더러워지면 정성스레 빨아 다시 하얗게 만드는 일


그렇게 하얀 수건을 쓰는 마음으로 일기를 쓰면서 내 마음을 살핀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맞춘 몇 천원짜리 싸구려 우정반지를 영원히 간직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보관한다.

싸구려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치 않은,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한

잊고 있다가도 서랍을 열면 그대로 있는

그 시절의 잔해이자 내 역사의 일부인

아니 역사 그 자체인 우정반지를 영원히 간직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서랍 한 켠에 고이 모셔둔다.



우산을 말리는 마음으로 일기를 읽는다.

젖은 우산을 한동안 펼쳐놓고 정성스럽게 말리는 일,

잘 말려서 돌돌 말아 똑딱이를 채우고

우산커버에도 잘 넣어두는 일,

어차피 또 젖을 거지만

언제든 비가 오면 들고 나갈 수 있게 신발장 한 켠에 넣어두는 일

그런 마음으로 지난 일기를 뒤적여 이따금 읽어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고

나는 얼떨결에 네 이름을 발음하고 만다.

자음과 모음을 휘리릭 발음한 탓에

입 안에 이름을 조금 머금고 있었다.

정성스레 발음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낯설고, 낯설다.


이젠 영영 부를 일이 없을 이름.






모시모시, 이마 도꼬? (여보세요, 지금 어디?)

-카페, 아나타와? (카페, 너는?)

와타시모 (나도)

-소꼬데 나니시떼루? (거기서 뭐하고 있어?)

타다..코히 논데루 (그냥..커피 마시고 있어)

-데모 나니데 니홍고데하나스 (근데 왜 일본어로 말해)

오모시로이쟈나이 (재밌잖아)

-젠젠 (전혀)



가끔 다른 나라 언어로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일본어 학원을 다녀야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원어로 읽으면 얼마나 상쾌할까 - 그런 생각을 했다.







"나 네가 나랑 있다가 급하게 가야된다고 하면 실망한 거 들킬까봐 표정연습 비슷한 거 했었는데"

-표정연습?

"음, 아쉬운 티 안나는 태연한 표정. 넌 바쁘니까 지금 가는 게 당연해, 이런 표정."

그러고 보니 너는 그런 표정이었던 것 같다. 눈썹을 착하게 살짝 내리고 옅은 미소를 띈 채로, 안녕 - 하고 말하는. 택시를 타고 휘리릭 사라졌을 수많은 날의 나와, 니가 숱하게 봤을 내 뒷모습. 그리고 내 뒤에서 지었을 너의 표정을 생각하니 나는 너무 미안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슬퍼졌다. 그래서 그 표정연습 나부랭이에 대해서, 내 뒤에서 지었을 너의 표정에 대해서는 영영 모르기로 했다.






내 취미 중 하나는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이다.

최근에 다시 본 영화 몇 편과 아주 간략한 감상평 몇 자.



[패터슨, 2017]

패터슨의 시는 기억나지 않는데, 침대를 위에서 내려다 본 매일의 첫 장면이 숨막힐 정도로 평온해서 자꾸 그 잔상이 남는다. 패터슨의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들, 그 장면들만 모아서 보고싶을 정도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비 온 다음 날 촉촉하게 젖은 동네를 산책하는듯한 잔잔하고 사랑스러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는데 "Suddenly I See~" 하는 OST가 나오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갑자기 깨달았다는 노래 가사처럼 나는 뭘 느꼈길래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이렇게 슬픈 영화였나. 예전엔 잘 몰랐는데, 메릴 스트립이 너무 우아해서 짜증날(?) 지경이다. 앤 해서웨이보다 더 눈길이 간다.



[버닝, 2018]

버닝은 극 중 '종수'를 "종수씨"라고 부를 때 교포 특유의 발음으로 '존숫시'라고 하는 스티븐연이 참 매력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상하게도 하품하는 스티븐 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음 소희, 2023]

배두나는 표정이 없는데 그 무표정 속에 많은 것이 녹아있다. 미세한 주름 하나도 그냥 페이는 법이 없다.



[월플라워, 2013]

엠마왓슨이 마지막에 드라이브 하면서 꺄우! 하고 소리지르는 장면을 몇번이나 돌려봤다. 저렇게 소리 질러본 게 언제였던가… 까마득하다. "사람은 본인이 인정한 가치만큼 대접받는다"는 대사는 어떨 땐 위로로, 어떨 땐 질책으로 다가온다. 아날로그식 타자기를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트 클럽, 1999]

아주 오랜만에 다시 봤다. 조금 유치하고 과해서 창피하달까 오글거린달까, 그런 장면도 있었는데 그건 그것대로 적나라하고 순수해서 좋았다. 1999년 영화인데 지금 봐도 너무 세련된 연출도 있고 한편으론 촌스러운 정서도 있다. 근데 그게 그 자체로 좋았다. 결국 감정을 자극하는 건 날 것의, 원초적인 것들인 것 같다.



[타짜, 2006]

오랜만에 타짜를 다시 봤다. 특유의 분위기와 수많은 명대사로 각종 패러디와 밈을 낳은 최동훈의 타짜. 정마담, 아귀, 짝귀, 평경장, 호구, 광렬, 고니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주옥같은 캐릭터들. 타짜는 드라마티컬한 음악이 없는데도 상당히 리드미컬하다. 아무리 봐도 안 질린다. 도둑들, 전우치, 암살 등 최동훈의 많은 작품이 있지만, 나는 타짜를 제일 좋아해서 넋놓고 봤다. 근데 뜬금없는 대사가 날아와 머릿속에 확 꽂혀버렸다. 아귀의 대사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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