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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14. 2023

엉터리 통화요약




어디야?

-집.

만나자.

-싫어.

싫어?

-응.

왜?

-그냥. 혼자 쉬고 싶으니까.

그래, 그럼.



나는 쉽게 포기하는 네가 좋다. 내가 싫다고 하면 보채거나 두번 세번 조르지 않고 단박에 그래, 하고 포기해버리는 너의 그런 태도를 좋아한다. 나한테도 언제든 싫다고 해도 돼. 우리 서로 편하게 말하자, 뭐든. 나는 그게 좋아.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없는 법, 갖고자 하면 멀어지는 법.


네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못 들은 척, 뭐라고? 했더니 아니야~ 하는 너의 심드렁함을 뒤로 한 채 전화를 끊는다. AI는 우리 통화를 멋대로 요약한다. 엉터리 요약을 너에게 보여줬더니 "훈훈한 대화같네"라고 한다. 하나도 안 훈훈하고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는데 말야, 라고 덧붙이길래 나는 스리슬쩍 미안해져 말을 돌려 버린다.






나 겨울 옷 사려고 하는데 같이 쇼핑가자.

-싫어.

또 싫어?

-응.

왜.

-쇼핑 힘들어...

와, 많이 변했네. 그래, 그럼.


너는 또 살짝 실망하는가 싶더니 금방 포기한다. 그리곤 혼자 열심히, 신나게(?) 쇼핑한 결과물을 내게 보여준다. 인증한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 혼자서도 잘만 하면서. 나는 뭐든 혼자 잘 해내는 그런 네 모습을 좋아한다. 같이 해도 즐겁지만 혼자서도 즐거운 너의 모습을. 아쉬움이 티나지 않는 그런 너의 모습을.


'쇼핑제안과 거절'

AI는 우리 통화를 귀엽게도 요약해놨다. 1초만에 휘리릭.







나 어제 을지로 갔는데 서울에서 진짜 손에 꼽히는 맛집 찾았다?

-오, 어딘데?

다음에 같이 가자. 지이이인짜 맛있어 거기.

-뭐 파는 곳인데?

고깃집이야.

-고기?

응.

-흠.

왜, 싫어?

-흐음.



AI는 '서울 맛집 추천과 추운날씨와 건강에 대한 대화'라고 요약했다.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아우 추워" 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고 상대가 "감기 조심해"라는 말이라도 하면, AI는 곧바로 '추운날씨와 건강에 대한 대화'라고 요약해버린다. 그래서 요즘 하는 통화의 거의 모든 요약에 '추운날씨와 건강'이 들어간다. AI는 정말 못말린다.






우리 통화 내역을 확인하다 대부분의 요약이 '~제안과 거절'로 요약된 걸 발견하고 실소가 터졌다. 대부분 네가 제안을 하고 내가 싫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리라. AI 대신 나는 '너의 빠른 포기와 나의 흡족한 마음'이라는 나만의 요약을 만들어 어느 한구석에 저장해둔다. AI는 절대 알 수 없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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