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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13. 2024

소통의 단서를 포착하는 눈이 ‘있다’

진은영, 「있다」 단평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건증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진은영, 「있다」

    

각각의 연에서 시를 관통하는 ‘빛’의 이미지들이 서로 조우한다.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너’는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지며, ‘달빛’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빨간 손전등 두 개의 빛’이 회청색 하늘을 가른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환한 방은 책의 몇 줄이 환해지는 경험과 조우한다. 각각의 연에 있는 빛의 이미지들은 ‘빛’이라는 공통적인 속성을 갖지만 서로 조금은 다른 색채를 지니는 듯하다. 


첫 번째 연에서의 빛은 차가운 흰색 빛이라면, 2연에서의 빛은 빨간 빛이다. 그것도 회청색 하늘을 가위처럼 자르는 빨간 빛. 3연에서의 빛은 따뜻하고 노오란 느낌의 빛이다. 4연에서는 ‘네가 있다’고 하며 소환된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은은한 빛의 이미지를 동반해 온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실은 없는, 이제는 없는 밤새 우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는 것은 그것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울음이 아닌 까닭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해 말한다. 그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그래서 부정 당해왔던 것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마지막 연에 가서야 비로소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과, 창밖을 지나는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와, 밤새 우는 것들과, 확인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너’와 결코 다른 존재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원을 그리며 퍼져가는 깨진 나팔의 비명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과, 투신한 여자 얼굴 위의 치마처럼 집 둘레에 있는 ‘노래’ 한 가운데, 그 구심점에 그 모든 존재를 부정당한 ‘존재’들과 ‘너’가 '있다’. 


진은영은 강요하지 않고 ‘네’가 결국 그들임을, 소외되고 부정당하는 존재들임을 넌지시 짚어주면서도 왠지 따뜻하게 위로하는 느낌이다. ‘있다’라고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는 법이다. 이 때문에 비록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에도, 확인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있다’고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독자는 어쭙잖은 위로를 얻고 그 감정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소통’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떠올리게 된다. 시 전반에 걸쳐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꿰어놓은 ‘소통’의 단서들과 이를 뒤에서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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