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 수가 없다>(2025)
내 모가지가 날아가지 않으려면 남의 모가지를 쳐야만 하는 잔인한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은 처음에 영화 제목을 정할 때 '어쩔 수가 없다'라는 게 너무 임팩트가 없고 모호하며 궁금하지가 않다는 지적을 받아서 다른 제목으로 바꿀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때 최종까지 후보에 있었던 게 '가을에 할 일'이었다고. 가을에 채용이 시작되니, 그때까지 해야 할, 끝마쳐야만 할 일이 있다는 의미로.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처음에 생각했던 '어쩔 수가 없다'를 제목으로 확정했다고 한다. 문장 자체는 특별하거나 강렬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게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던 걸까. 불가피, 불가항성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어떤 명분이 필요했던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극단적 결심에는 여전히 명분이 부족하고 명분은 둘째 치고 감정과 갈등이 촘촘하거나 섬세하지 못해 그 극단성은 충분히 납득되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나고 만다. 박찬욱이 한국 영화계에서 손꼽히는 거장이다 보니 그가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작품에 대한 기대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속절없이 흘러가는 러닝 타임과 영화가 끝났을 때의 허무, 기대에 대한 배반도 어쩔 수가 없다.
영화가 끝나자 산발적으로 기억나는 영화 속 몇몇 장면과 상징들이 있었다. 다음은 분절된 기억에 의존한 것이므로 대사 같은 게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의도치 않게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기억나는 대로 가볍게 끄적여 보겠다.
"you got the axe"와 "너 모가지야"
둘 다 "너 잘렸다"는 표현이다. 'axe'는 영어로 도끼를 뜻하는데 직역하면 도끼에 찍혔다는 의미다. 우리는 관용적으로 해고당했다는 표현을 쓸 때 '모가지가 날아가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도끼에 찍히든 모가지가 날아가든 다 죽은 목숨이라는 얘기다. 해고를 당한다는 것은 밥줄이 끊기는 것을 의미하고, 생계가 어려워지고 극단적으로는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는 걸 의미한다. 해고는 통보와 동시에 도끼에 잘리고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과 맞먹는 선명한 충격과 공포, 날 선 통각을 선사하기 마련이니까.
일자리에 절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을 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고 '생물학적 생존'을 유지하게 하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 존엄과 실존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의식적 생존' 모두에 관여한다. 생물학적인 생존만을 하는 사람에게 밥만 축낸다는 의미에서 '식충이' 등의 별명이 생기듯, '생산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사회로부터 유용한 구성원이라고 받아들여질 때, 자아효능감이 발현되고 비로소 의식적 생존이 가능해진다.
해고를 당하면 벌어놓은 돈으로 어찌저찌 생물학적인 생존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혹은 아르바이트 같은 단기 근로로 밥은 먹고 살더라도 '의식적인 생존'에 대한 부분이 충족되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다. 그러면서 온전한 의미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상황은 없다.
실직이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
술에 절어있는 남편 범모(이성민)를 향해 아라(엄혜란)는 소리친다.
"실직 그 자체가 문제 게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인 거야"
극 중 그녀는 배우다. 매번 오디션에서 물을 먹고 오는. 배우라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오디션에서 낙방할 때마다 매 순간 짧고 가벼운 해고를 통보받는 셈이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다음 오디션을 보러 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남편 잃고 질질 짜는 역할 하기에는 너무 탱탱한 거지."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온 날에도 그녀는 낙방 이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내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장점으로 인해 그 역할에 상황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자기변명적 자기 위로. 하지만, 이러한 마음가짐이 수많은 낙방 속에서도 다음 오디션에 도전할 용기를 내는 데 기여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그녀였기에 '실직'이라는 내가 손 쓸 수 없는 불가항적 상황이 아니라, '실직에 대한 대처'라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강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실직했다고 술에 절어서 과거만을 회상하는 남편 범모가 더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해고당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실직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재취업에 성공할 것이다, 내 새 출발을 가족들은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와 같은 말을 실직자 아저씨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신체 부위를 톡톡 두드리면서 소리 내 외치는 장면은 너무 잔인하고도 슬펐다. 피부는 일종의 감각기억을 동반하기 때문에 신체를 가볍게 두드리는 행위를 통해 내가 뱉는 말을 피부 깊이 새겨 넣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일부러 감독은 그 장면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조금은 코믹하고 가볍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니까. 그래서인지 그 장면에서 웃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는데 나는 전혀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너무 절박해 보였기 때문에, 절박한 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외치는 모습은 절규였기 때문에, 절규의 장면에서 웃는 건 적어도 나는 하지 못했다.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주인공의 일터인 제지공장에 붙어있는 표어다. 만수는 항상 손바닥에 빨간 매직으로 해야 할 말의 키워드를 적어 중얼중얼 외우면서 다닌다. 계획적인 발화를 실행하는 만수. 그게 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좌절될 때가 많다. 상대방은 그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줄 만큼 한가하거나 인내심이 뛰어나지 못하다. 그래도 항상 만수는 매직으로 손바닥에 할 말을 쓰고, 말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보며 스스로 해야 할 말의 방향을 잡는다. 생각하고 말(행동)하는 그.
이렇게 신중한 그인데, 어떻게 그렇게 장엄하고도 무시무시한 결심을 아내 미리의 한 마디, "저 사람 길 가다가 벼락같은 거 안 맞나?" 그 대사 한 마디에 덜컥 해버리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경쟁 속에 움트는 잔인한 폭력과 무자비성
한 개인의 도덕적 타락은 어디까지가 '어쩔 수가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 물론 영화니까 현실성 없는 얘기를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야만 '영화'가 되는 거겠지만 감독이 감을 많이 잃은 것 같은 느낌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정말 취업과 가장이라는 무게와 모가지가 날아가는 현실에 대한 깊은 탐구가 있었을까 싶은, 겉핥기식 감정과 '패션 실업' 증후군이 난무해 큰 울림이 없었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이로써 연민의 감정을 느낄 때 비로소 잔인함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해방될 수 있다. 내 상황과 비슷하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지, 같은 생각이 들면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타자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그때 무자비하게 폭력을 자행할 동력을 상실하고 비로소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극 중 만수는 자신과 유사한 타인에 대한 공감성을 철저히 거세당한 채 오로지 경쟁과 생존의 문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감각만을 곤두 세운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이 잔인하다기보다는 미개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좀 더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
범모는 실직 후 술에 의존하며 의식적 생존을 포기한 나날들을 보낸다. 술에 절어 인사불성인 상태로 구인광고를 확인한 범모는 각성하고 소주병을 몽땅 꺼내 싱크대 개수대에 쏟아 버린다. 새 출발, 새 도전을 할 결심을 하고 180도 변하는 모습이다.
만수가 선출(박희순)이 건네는 폭탄주를 받아 들고 마실 때는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하며 직접적으로 영화 제목을 반복해서 읊는다. 술만 마시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개가 되는 탓에 몇 년 동안 술을 끊었던 만수가 선출이 주는 폭탄주를 꿀떡꿀떡 마시는 장면. 거기서부터 강하게 각성하고 대담해지는 만수.
계속되는 치통과 앓는 이
만수는 영화 전반에 걸쳐 어금니로 인해 치통을 앓는다. 시큰한 치통은 시도 때도 없이 턱 주위를 얼얼하게 만든다.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신경을 건드는 탓에 어쩔 수 없이 턱을 문지르며 아파할 수밖에 없는 통증처럼 만수는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마다 치통을 감각한다.
그러다 선출이 주는 양주를 병나발로 불고 극도로 흥분해 앓던 이를 뽑는 순간, 그는 몇 년 만에 스위치가 켜진 고물 기계처럼 격렬히 가동한다. 물론, 오작동.
불손한 사과나무
만수는 정원에 땅을 파고 시조를 처리한 후 사과나무를 심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틴 루터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음습하고 불손한 기운으로 가득 찬 거름은 결국 '자양분'이 되지 못한다. 그 속에서 생명력이 움틀 리 만무하다.
일이 다 마무리가 되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내놓은 집을 다시 찾고 처가에 보냈던 강아지들을 다시 데려 온 만수. 강아지들은 사과나무 주변을 맴돌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그 주변에서 같이 서성이는 딸을 보고 불안해진 만수는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오라고 부른다. 아빠를 향해 달려오면서 딸은 말한다. "나무에 벌레 꼬여, 다 죽었어."
나는 식사를 할 때 맛있는 음식으로 적당히 배부른 걸 좋아한다. 맛없는 음식을 양만 많이 먹어 배가 더부룩한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맛없는 걸 많이 먹어 헛배가 부른, 그래서 속이 더부룩하고 찝찝한 기분을 씻을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의 그 허무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뭐야, 이렇게 끝이야? 진짜 끝이네, 뭐야. 이런 술렁임이 관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베니스영화제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의 작품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1시간 10분 정도면 될 것 같은 영화를 2시간 30분 동안 주욱 늘려 뜨려 놓은 느낌이었다. 중간에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많은 부분을 덜어낸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생략된 장면과 뭔가를 덜어낸 것 같은, 그러지 않았다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몇몇 있었고 그렇게 덜어냈는 데도 왜 이리 길게 늘어지는 건지, 왜 이리 긴박함이 떨어지고 지루하게 만든 건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장면은 덜어 내고 쓸데없는 장면만 길게 들어찬 느낌이랄까.
박찬욱은 인물의 대사에서 '이거'와 '요거' 둘 중 뭘 쓸지를 가지고도 한참을 고민할 만큼 말맛이나 뉘앙스를 섬세하게 따지는 감독인데, 정말 이번엔 왜 그랬을까. 애초에 박찬욱이 이 영화의 원작 소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액스(The Ax)』에 흥미를 가진 것부터 조금 의문이긴 하다. 이 소설은 1997년에 출간 됐는데, 그걸 28년 후에 영화로 만들 거면 그에 따른 현실 반영이라든지 현시대와 조응하는 섬세한 통찰이 깃들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부족했다. 이게 뭔지 싶은. AI의 등장으로 인간이 소외된다는 현시대에 대한 통찰을 마지막에 급하게 버무린 것 같은데, 쓸데없는 장면에서는 진득하게 시간을 썼는데 정작 그 부분에서는 뭐가 그리 급했던지.
개인적으로 가장 보기가 힘들었던 장면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노래가 깔리면서 엄혜란과 이병헌, 이성민이 셋이서 뒹구는 장면이다. 뭘 의도한 지는 알겠는데 너무 길었고, 작위적이었고, 웃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임팩트 있고 쓸모 있지도 않았다. 이 장면에서 우세요!!! 이 장면에서 웃으세요!!!라고 강요하면 아무도 울고 웃을 수 없듯 과도한 설정은 관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블랙 코미디입니다, 블랙!!!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코.미.디.라고요!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참 좋았는데, 그와 별개로 그 장면 자체가 좀 거북했다. 배우들이 무슨 죄랴, 감독이 요구한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일 텐데.
지금까지의 영화와 비교하면 박찬욱 영화가 주는 특유의 세련된 느낌과 강렬한 메시지, 몰입과 집중을 높이는 긴장의 연출, 날카롭고 섭세한 미장센 등이 보이지 않았고 그 점이 너무 아쉬웠다. 아주 나쁘지는 않았지만, 감독 이름을 가린 채 블라인드로 상영을 했더라면 박찬욱 영화라고 눈치챌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그만큼 그의 개성과 특색이 묻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박찬욱의 직전 영화인 헤어질 결심에서는 수많은 명대사 중에서도 이상하게 "선배 그 여자한테 왜 초밥 사줬어요?"라는 대사가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는 "너 모가지야" 라는 표현. '모가지'라는 잔상이 오래 남았다. 모가지를 사수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게 영화의 메시지라 그런가. 그리고 이상하게 "본 것 같은 거야, 본 거야?"라는 미리의 대사도 잔상이 오래 남았다. 아들은 정말 제대로 못 본 걸까. 분명 봤는데. 제대로 봤어도 그저 본 것 같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겠지.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그 직후의 반응이 떠올랐다. 지금과 상황이 유사한 것 같다. 사람들은 일본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기대했고,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나올 때 욕을 하며 나왔다. 노망 난 것 같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자기 꿈을 만화로 그려 주욱 보여준 것 같다, 당시 온갖 비판이 난무했다.
박찬욱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과 기대, 그가 쌓아온 신뢰 같은 게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개봉 당일에 영화관으로 달려온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다 그런 것이 있었다. 달뜬 기대에 부푼 마음 따위가. 아직도 올드보이 때의 선명한 충격이 가시지 않는데. 그런 박찬욱인데.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다 올라갈 때까지도 사람들은 그 기대가 다소 배반당했다는 씁쓸한 충격을 안고 영화관을 떠나야 했다. 나도 그랬다. 박찬욱 영화가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작품이었을까, 라고 냉철하게 질문한다면 결코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제아무리 박찬욱이라도, 이 작품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