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존재론

- 잘 먹고, 잘 노는 '건강한 자립형 백수' -

by 어찌




Q.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ㅁ 학생 (초/중/고)
ㅁ 대학생, 대학원생
ㅁ 취업 준비생
ㅁ 재직자
ㅁ 자영업자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개인정보 폼(form)을 작성하던 중이었다. 마우스로 대충 동의, 동의를 클릭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당당하게 퇴사한 지 24일 차. 퇴사 초년생에게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질문의 ‘직업’이라는 단어가 지워지고,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응답지를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갔다.



ㅁ 학생이라기엔 대학교를 졸업한 지 7여 년이 지났다. 와, 정말 시간 빠르구나. 패스.

ㅁ 취업 준비생. 취업을 하겠다는 (불미스러운) 생각을 떠올릴 마음조차 없다. 패스.

ㅁ 재직자. 세상 사람들 저 퇴사했답니다. 모두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패스.

ㅁ 자영업자. 음, 패스.


소속에서 벗어나겠다고 뛰쳐나온 사람에게 소속을 물어보는 건 본질적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뭐랄까, 마치 “더는 나무를 베지 않을 거야. 바다에 가서 배를 탈 거라고!”라며 연못에 도끼를 힘껏 던져 ‘버린’ 나무꾼 앞에 산신령이 펑- 하고 나타나 “이 금도끼가 네 도끼냐. 아니면 이 은도끼가 네 도끼냐”라고 묻는 격이다.

(전직) 나무꾼은 정말로 필요 없기에 "모두 제 도끼가 아닙니다. 저는 더 이상 도끼가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그러나 산신령은 나무꾼이 욕심이 없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한다. “정말 정직한 녀석이로구나. 상으로 이 도끼를 모두 가져가라.” 그는 온갖 재질의 도끼를 나무꾼에게 준다. 나무꾼은 수십 년 간 나무를 베다 불어 터진 손으로 도끼를 받는다. 그의 손에는 금빛과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도끼가 주어진다. 산신령이 준 신물이기에 장에 되팔 수도 없다. 도끼의 무게를 견디느라 매일 산을 오르내려 닳아진 무릎 연골이 욱신거린다. 그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린다.


“아니 전 더 이상 나무꾼이 아니란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옛날이야기의 각색 버전을 떠올리다가 결말은 “아니 전 취준생이 아니란 말입니다.”로 마무리 지었다.

응답 필수 문항이기에 취준생 칸에 체크는 했지만, '직장'을 기준으로 '취준생-재직자-퇴직자'로 나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슨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기원전/기원후'로 나누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글쎄.


‘프리랜서’라는 정체성을 떠올리기도 했으나, 지금 돈을 벌고 있지도 않고, 딱히 생산적인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프리랜서가 되겠다는 꿈은 어쩐지 거창해 보였고, 또 어딘가 내가 원하는 지향점에서 어긋난 느낌이었다. 그게 아니야.

취업할 생각이 없으니 취준생도 아니며, '비경제활동인구'에 소속되느냐 하면, 얼마 전 이삼일 간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퇴사하면서 취준생이나 프리랜서를 꿈꾸지 않았다. 맞다. 나는 아주 순수한 바람으로 백수가 되고 싶었다.



백수! 핸드폰으로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백수]

‘백수건달’의 줄임말인 백수는 ‘무직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백수는 원래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을 의미했으나 현재는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한다.



백수건달이라는 표현에 웃고 말았다. 단어에서부터 느껴지는 묘한 하찮음이 마음에 들었다. 한량스러운 귀찮음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난봉꾼 짓을 할 것 같은 부지런함이 섞인 듯한 단어라니.



'무직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표현은 마음에 안 들지만, (왜 또 '직장'이 기준이란 말인가) 내가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은 아니지만, (내가 건달이었다면 여기저기서 맞고 다니며 건달의 위상을 한껏 낮춰줬을 터이다.) 회사에서 모은 돈도 있지만, ('한 푼'도 없진 않으니 있는 셈 치자.) '취준생'이나 '프리랜서'보다야 훨씬 와닿았다.

단어가 주는 건성스러움이 꼭 애매모호한 내 바람을 ‘대충 그렇다 치자.’라고 대변해 주는 듯했다.




대충 그렇다 치자,라고 생각하고 나니 꼭 사전적 의미의 백수가 될 필요도 없겠다 싶어졌다. 그저 정체성을 표현할 내 마음에 드는 단어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말이다.


빈둥거리며 놀고먹는다는 말도 얼마나 멋진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백수라면 놀고먹는 것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 ‘빈둥’거리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 자고 싶을 때 낮잠을 자고, 평일 낮에도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며 '놀고', 건강한 제철 과일과 야채를 잘 챙겨 '먹는' 시간을 살고 싶다. 그리고 건강하게 빈둥거리기 위해 필요한 때에는 원하는 만큼 경제적 활동도 퐁당퐁당 하면서.



삼끼 사전에 ‘백수’를 재정의 하기로 마음먹었다.




[백수]

스스로를 책임지는, 충분히 빈둥거리며 놀고, 여유롭게 먹는 '건강한 자립형 주체'




2023년, 제대로 백수가 되어보자고 다짐한다.

나 스스로 직위의 창조자가 되어 '백수'라는 직위를 하사한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설문지 폼의 제출 버튼을 클릭했다.



백수라는 직위가 생겼으니 명함을 만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