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 중간이야기가 필요해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 사이의, 사용라이프

by 어찌


대기업은 소유하라고 '가져라!'라고 외친다.

한편에서는 삶의 주체가 되라고 '비우라!'라고 외친다.

이상하다. 왜 어디에서도 정작 '사용하라!'는 말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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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문득, 세상에 이토록 수많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게 새삼 놀라운 순간이 있다. 그 각각의 개인에게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것에 경외심과 약간의 징그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과도함에서 오는 압도감이랄까, 거부감이랄까.

쭈글한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정은 이야기가 되어 각종 SNS를 타고 더없이 빠르게 휘몰아쳐서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는다. 사진과 동영상과 음성을 타고 전해지는 감동과 분노의 이야기들. 사랑과 혐오, 질투와 안쓰러움, 좌절과 성공과 충만하며 공허한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일까. 대부분 이야기에는 중간 내용이 삭제되거나 요약된 채 시작과 결말만 남은 채다. 특히 빛나고 자극적인 성공담일수록 더욱 시작(동기)과 결말만 강조되어 퍼진다.


뭐랄까, 마치 로맨스 영화에서 사랑의 서사가 전혀 쌓이지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기분이랄까. 어두운 침실에서 (갑자기)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격렬한 키스를 하며 화면이 어두워지고, (갑자기) 짠, 아침이 된 - 장면을 어리둥절한 채 보며 나는 황망하여 중얼거린다. "이거 지금 나만 이해 안 돼?"

열렬한 키스로 시작한 이야기의 '기'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아침을 맞이한 '결'이 있으니, 그 과정의 뜨거운 '승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까. 세상 사람들의 멋지고 행복한 승전보를 전해 들으며 나는 자주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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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맥시멀라이프', '미니멀라이프', '제로웨이스트'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나는 마찬가지였다. 물건의 들임(in)과 비움(out)이라는 시작과 결말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인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건과 밀접한 삶을 살아가기에, 그것들은 완벽히 생활밀착형의 이야기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며 쏟아졌다. 당장에라도 따라 하 이 사람처럼 반짝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양감마저 일어났다.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둔 직후, 가득 찬 물건이 징그럽고 진절머리가 나서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비워내고 싶었다. 마침 알고리즘은 나를 미니멀라이프와 제로웨이스트의 이야기로 이끌었다. 버리고, 비우고, 최소한으로 사는 삶. 그래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은 이거야! 나는 당장 커다란 봉투를 준비하고 버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미니멀라이프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자리 잡은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나는 중간 이야기가 없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 많은 인간이라는 걸.


- 이건 아직 충분히 쓸 수 있는데?

- 플라스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사버린 쓸만한 물건을 버리고, 친환경 제품을 새로 사는 게 진짜 친환경이로 제로웨이스트가 맞나?


도저히 쓸 수 없는 물건만 일부 쓰레기봉투에 담았을 뿐인데도 이미 풀(full)웨이스트였다. 여기서 쓸만한 물건까지 버리는 건 제로는커녕 오버(over)웨이스트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고 이제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물건으로 내 시간과 공간을 꽉 채운 채로는 안돼.

맥시멀리스트의 삶은 숨 막히고, 미니멀리스트가 되자니 머뭇거렸다. 나는 이도 저도 결단 내지 못하는 어중간한 인간이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생각의 추를 왔다 갔다 반복하다, 문득, 중간 지점에서 질문이 떠올랐다.

- 근데 나, 물건을 끝까지 다 써 보기는 했나?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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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은 소유만으로 행복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처럼 '가져라!'라고 외친다. 역동적이게, 한번 사는 인생 다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다른 한쪽에서는 물건에 얽매이지 말고 '비우라!'라고 외친다. 버리고 비워서 삶의 주인이 되라고.

이상하다. 왜 어디에서도 정작 '사용하라!'는 말은 없을까.

그래서 산 물건은 어떻게 써야 행복한데요? 왜 멋대로 들였다가 제대로 쓰지도 않고 비우는데요? 분명 시작은 사용하기 위해 구매했을 테고, 끝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걸 버리는 걸 텐데. 물건의 들임과 비움이란 그런 게 맞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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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중간한 인간이 어중간한 생활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나는 맥시멀라이프도 미니멀라이프도 못 사는 인간이니, 물건의 들임과 비움 중간의 '사용'라이프를 살아보자고.


사용라이프가 이 자체로 결말이 될지, 성공할지 좌절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집에 쌓인 물건은 너무 많고, 나는 워낙 애매하고 어중간하다. 그래도 하다 보면 뜨겁지는 않아도 적당히 미적지근한, 정신없던 '기'와 '결' 사이에서 느리고 노곤한 '승전'의 서사 정도는 쌓아갈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생각의 추는 맥시멀과 미니멀 사이를 왔다 갔다 거리다가 어중간한 지점에서 진동했다.

어, 중간에도 공간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