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는 “‘동화적 상상력’이 현실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유효한 창(窓)의 하나”라고 하였다.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행위란 무엇일까. 동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멧돼지들은 “골짜기 너머”에 있는 고구마밭을 파헤쳐 놓는다. 골짜기 너머는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밭 옆에 상주하지 않는 이상, 멧돼지가 밭을 파헤치는 모습을 직접 보기 힘들다. 그러니 “멧돼지들이 다 파헤쳐 놓”은 밭을 보고 멧돼지의 모습을 상상할 뿐이다.
골짜기 이쪽에 있는 우리는 멧돼지가 활동하는 “골짜기 너머”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존재함을 알지만, 갈 수 없는 세계이다. 정지용의 “별똥 떨어진 곳” 이문구의 “산 너머 저쪽”과 같은, 경험적으로 닿을 수 없는 시공간이다. 또한, 안도현의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처럼 가까이 있지만 알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각(知覺)할 수 없으므로, 오로지 상상만으로 감각되는 곳이다.
그러니 메밀을 심으면 “지들도 어쩌지 못할 거다”라는 엄마의 생각도 추측일 뿐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고구마밭을 메밀밭으로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일까. 농사를 지어본 적 없지만, 씨만 뿌리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메밀을 심어야겠다”고 하는 것은 동물과 공존을 위한 양보와 타협이 아닐까.
멧돼지가 먹지 못하는 메밀을 심는 것은 멧돼지를 추방하는 행위일 뿐, 양보의 태도가 아니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멧돼지 퇴치를 위해 총 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엄마”는멧돼지와 인간의 공존을 위한 타협의 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시는 어떤 아이의 목소리이다. 시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아이의 목소리가 꼭 나의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멧돼지들이/ 메밀꽃을 좋아하면 어떡하지?”는 아이의 상상이지만 동시에 독자의 상상이 될 수 있다.
“하얗게 된/ 메밀밭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뒹구는” 세상을 마주한 독자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와 자잘한 웃음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웃음은 어떤 힘이 있을까. 때로는 사소한 웃음이 세상을 변화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멧돼지가 사진도 찍고 신나게 뒹구는 모습을 경험해본 사람이 어찌 그들에게 총을 겨눌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 들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 상상의 경험이 현실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 그것이 ‘동화적 상상력’의 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