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 취재를 빙자한 쇼핑기 + 쇼핑 팁
지하철이 동묘앞역에 다가서며 속도를 늦추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문 앞에 모입니다. 반면 젊은이는 처음 가는 동묘도 아닌데, 여전히 동묘앞역에 6호선이 멈춰서면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젊은이가 껴도 될 자리인지 괜스레 위축됩니다.
용기를 내서 동묘역을 나오니 반가운 또래 어른들이 어르신들 사이에서 군데군데 보입니다. 빽빽하게 몰려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인 중장년층은 '요즘 젊은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란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어르신들은 <나 혼자 산다>에 정려원 씨가 동묘 쇼핑을 하는 모습이 나와서 그렇다며 결론짓습니다. 새치머리가 뿌옇게 검은 머리 사이로 비치는 어르신들 입에서 <나 혼자 산다>란 단어를 동묘를 걸으며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젖살이 어슴프레 남은 젊은 어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 중얼거리며 야생미 넘치는 장터 동묘 앞에서 당황합니다. 젊은 어른들은 간판도 없고, 옷걸이에 걸린 옷과 가격표가 드문 동묘에서 발을 동동 굴립니다. 젊은 어른들 사이에서 '정려원', '지드래곤'이란 단어가 종종 들립니다. 어르신들 말씀처럼 <나 혼자 산다>를 보고, 또는 <무한도전>을 떠올리며 호기심에 동묘를 찾은 젊은 어른들이 많아 보입니다.
조명 환하고, 서비스 교육받은 직원들이 대기하는 오프라인 쇼핑몰과 안락한 침대에서 찾는 인터넷 쇼핑몰에 익숙한 젊은 어른들에게 첫 동묘 쇼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을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겠고, 어느 정도 가격대가 적합한지도 모를 텝니다. 부르는 게 값인 동묘에서 정가제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깎아주세요.'란 말이 처음 배우는 외국어보다 어렵습니다. 중국 여행에서는 그렇게 쉽게 ' 便宜点吧(피앤이 디앤 바; 깎아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한국에서 가격 흥정을 하려니 쭈뼛거려집니다. 사람 겪을 대로 겪어 손님맞이 능숙한 상인 앞에선 어깨가 자꾸 움츠러듭니다.
그래서 동묘가 낯선 젊은 어른들을 위해 동묘 쇼핑 경험담과 팁을 몇 자 적으려 합니다. 동묘 쇼핑을 자주 하진 않았지만, 적은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들을 적습니다. 야생 쇼핑몰, 동묘에서 첫 쇼핑을 시도하는 젊은 어른들에게 도움되었으면 합니다.
- 편한 옷 : <무한도전>에서 정형돈 씨가 '너무 비싼 옷을 차려입으면 안 된다'라고 동묘 새내기 지드래곤에게 한 조언은 웃기려는 소리가 아니라 지당한 말씀입니다. 너무 차려 입고 가지 말되, 편안한 옷을 추천합니다.
- 현금 : 동묘는 광택 나는 블랙 카드보다 지폐 속 퇴계 이황 선생님의 모나리자 미소가 더 대접받는 곳입니다. 지갑 두둑이 천 원, 오천 원짜리 지폐를 준비해주세요.
동묘 거리엔 옷을 시멘트 도로 위에 쌓아놓고 파는 곳이 많습니다. 동묘를 관찰하니 처음 동묘를 접하는 젊은 어른들은 쭈뼛되며 쌓여있는 옷들을 대충 뒤적이다가 옷을 슬며시 건집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두더지처럼 온 몸으로 옷을 파고들어도 괜찮아요! 좀 더 적극적을 탐색해야 합니다!
삼각근을 벌크업하겠다는 각오로 옷을 삽질하듯 헤쳐 보세요. 비록 쇼핑 매장처럼 가지런히 걸려있지도 않고, 구깃구깃한 옷들이 허름하게 쓰러져 있듯 보여도, 그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금 캐는 광부처럼, 보물 찾는 해적처럼 조금 거칠고, 적극적으로 옷들을 뒤적여야 합니다. 단, 다른 사람들과 상인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뒤척인 옷들은 다시 제자리로 모아 옷 동산으로 만들어 놓아 주세요.
+ 동묘 쇼핑은 '체험 삶의 현장'입니다. 옷을 찾는 광부의 마음으로 노동에 적합한 옷을 입고 가길 추천합니다.
동묘에는 오래되고 낡은 옷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래되고 낡아도 구제 멋을 내는 소재들이 있습니다. 낡은 매력을 풍기는 소재는 대표적으로 양모, 가죽, 데님입니다. 가죽 라이더 재킷, 모직 재킷이나 코트, 데님 재킷이나 청바지, 청치마를 원한다면, 그리고 원하는 옷이 낡아도 여념 없다면 동묘에서 구매하는 것을 권합니다. 대대손손 입어야겠다는 각오로 침을 수 백번 삼켜서 살 것만 같은 몇 백만 원짜리 '베르사체' 양가죽 라이더 재킷도, 10년 세월을 견딘 듯한 상태로 사면 오만 원이니 말입니다.
일반 면, 폴리 소재로 만든 옷을 찾는다면 당연히 낡은 티가 덜 나는 옷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셔츠나 티셔츠, 맨투맨은 물이 덜 빠져서 색이 선명한 것을 추천합니다. 남성 셔츠는 심지의 빳빳함이 남아 있는 것, 티셔츠나 맨투맨은 손목이나 목둘레 (시보리)가 덜 늘어난 옷이 좋습니다.
싼 건 싼 값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동묘에선 전혀 소용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찾는 동묘입니다. 물론 동묘에서 완벽한 상태의 옷을 구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오랫동안 우공이 감탄할 인내심과 지구력, 노련함으로 오래 옷을 탐색한 결실입니다. 동묘에서 파는 옷은 단추가 없거나, 지퍼가 안 열리거나, 오염물이 묻어있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불량품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동묘 거리에 쌓여있는 옷들은 카카오톡 이모티콘 가격과 맞먹으니까 수선비용까지 고려한다 해도 새 옷을 사는 것보다 저렴합니다. 그러니 여기선 복구 가능성을 따져서 구매를 고려합시다.
▶ 지워질 얼룩인가요? : 동묘에서 쇼핑하다 옆에서 옷을 뒤척이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물으셨습니다.
"이거 지워질까?"
갑작스러운 낯선 사람의 질문에 당황하며 아주머니가 들어올리신 옷을 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핑크색 셔츠 소매에 검게 묻은 얼룩을 보여 주셨습니다.
"음... 빨아도 어려울 것 같아요."
아주머니는 미련 없이 핑크색 옷을 뒤엉킨 옷들 사이로 던지시고, 새 옷을 찾아 옷더미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렇게 옷 얼룩은 빨아도 사라질지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오래된 얼룩은 대체로 잘 안 지워집니다. 떡볶이나 자장면이 튄 옷을 식당 화장실에서 울먹이며 빨아봤다면 알 것입니다. 얼룩은 늦게 지울수록 세탁이 어렵습니다. 얼룩의 이치를 알기에 오래된 얼룩이 지워질 거라는 큰 희망을 찾진 않습니다.
▶ 그렇다면 얼룩이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나요? :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도 옷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든다면? 얼룩이 다른 사람은 모를 것 같은데. 나만 신경 쓰이고, 나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크기도 작은 얼룩인지 고민해봅시다.
▶ 바느질은 가능한 상태인가요? : 튿어진 바느질은 다시 기우면 됩니다. 그런데 바느질이 가능하려면 시접분이 필요합니다. 입고 있는 옷 안쪽 바느질 선을 따라 있는 1cm 너비의 옷감 여분을 시접이라 보면 되는데. 시접분이 해져서 사라지면 바느질을 할 수 없습니다. 시접분이 바느질하기 충분한지 확인합시다.
▶ 감당할 만한 지퍼 상태인가요? : 주머니 지퍼가 고장 나서 주머니를 열 수 없거나 닫을 수 없다면, 주머니를 포기하고도 옷을 살지에 결정해야합니다. 아차! 바지 지퍼가 잠기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옷은 꼭 포기해야겠죠? 꼭 지퍼를 여닫아 봅시다.
▶ 단추만 다시 달면 괜찮을까요? : 단추를 꼭 모두 잠가 봅시다. 단추 구멍이 없거나 단추와 구멍이 짝이 맞지 않는 등 '세상에 이런 옷이'란 tv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지는 옷들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단추가 대칭이 안 맞으면 단추를 다시 달면 됩니다. 그런데 단추 구멍 간격이 너무 넓으면 아무리 단추를 달아도 단추 사이가 벌어져 옷 사이로 몸이 노출될 우려가 있습니다.
또한 단추 디자인이 특이한데 단추가 하나 덜 달린 옷이라면? 아쉽더라도 손에 든 옷을 내려놓으세요. 작고 특이하며 예쁜 그 단추를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거리에 쌓아놓은 옷은 상인의 허락을 받고 입어야 합니다. 피팅을 허락하지 않는 상인도 더러 있습니다. 다행히 옷걸이에 구제 옷을 걸어놓고 파는 상가 점포에서는 길거리보다 자유롭게 피팅을 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보다 점포에서는 상품 분실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점포에선 자유롭게 옷을 입고 벗어서 거울을 볼 수 있는 대신 에티켓이 필요합니다. 옷을 입은 후 직접 단추 잠가 제자리 걸어놓아야 합니다. 동묘에는 백화점처럼 옷을 정리해 걸어주는 점원이 부족하니 말이죠.
-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구멍이 없는지 확인하세요!
- 지퍼는 잠그고, 단추는 꼭 여며봅시다.
- 가능하다면 옷을 입어서 사이즈, 품질을 확인해봅시다.
- 코트, 치마, 파카, 가방 안감 바느질이 터진 곳이 없는지 확인합시다.
- 점퍼는 깃털이 빠지는 곳이 없는지 살핍시다.
- 모피같이 털이 있는 옷은 털날림이 심하지 않은지, 털 빠짐은 없는지 확인해주세요.
- 가죽처럼 보이는 폴리 소재를 레자라고 합니다. 레자로 된 옷은 손으로 만져 보세요. 레자가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진 않았는지, 갈라지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 살짝 휘어봅니다.
- 바느질 부위는 터진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핍시다.
- 그 외에 필자가 만나보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옷들이 있을 수 있으니 꼼꼼히 옷을 살펴주세요.
5-6시, 황혼이 내리고 피부가 노랗게 익는 시간대, 동묘 길거리 상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모두 천 원! 천 원!"
해 질 녘, 모든 옷이 천 원이 되는 마법의 시간입니다. 건물에 위치한 점포는 해 질 녘이면 문을 닫고, 길거리 장터는 11시가 다가오는 마트처럼 떨이를 떨이로 판매합니다. 더 저렴하게 구제 옷을 사고 싶다면 동묘 장터가 마감되는 시간을 이용하세요.
+싸다고 '옳다구나, 좋다구나'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동묘는 보물 찾기처럼 좋은 옷 찾는 일이 수고스러운 곳인데, 이른 시간에 좋은 옷을 발굴해 간 능력자 덕분에 늦은 시간 대에는 좋은 옷이 더 희소해집니다.
동묘에서 파는 옷은 오래된 옷 냄새가 납니다. 옷장에 오래 보관된 옷에서 풍기는 나프탈렌 향이 아닙니다. 찌든 내, 또는 흙냄새, 또는 먼지 냄새, 또는 알 수 없는 냄새가 은은히 풍깁니다. 이런 옷들은 당연히 세탁한 후 착용해야 합니다. 그저 옷 냄새만 풍기는 옷도 취급 과정에서 바닥에 자주 쓸리기에 세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모직이나 가죽처럼 까탈스럽게 세탁소 행차가 필요한 소재들은 세탁비까지 고려해주세요.
수선이 필요한 옷들 역시 전문 수선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동묘에서 구매하는 옷 가격은 '구매가 + (세탁비 + 수선비)'가 됩니다.
무작정 '깎아 달라' 부탁하지니 괜스레 죄송스러워집니다. 장사꾼 에누리에 속지 말라지만, 성격에 따라 가격 흥정은 쉽지 않습니다. 다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란 생각이 진해지면 입이 잘 안 떨어집니다. 그래서 나름 납득 가능한 가격 흥정 규칙을 만들고 익숙해지려 합니다.
- 카드 리더기가 보이면 '현금 할인' 가능성을 묻습니다.
- 한 곳에서 세, 네 개를 구매하면서 '다량으로 사는데 할인은 없는지' 여쭙니다.
- 사람이 적을 때 할인 여부를 여쭤야 사장님이 곤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궁상맞은 이야기를 브런치에 적어서인지 글스러워 보입니다. 투박하고 불편한 구석이 많지만 옛 감성 있고, 보물 찾는 맛 쏠쏠한 동묘 이야기를 썼습니다. 거친 야생의 거리를 갔다 혼돈을 겪을 신생 동묘 탐험가에게 이 글이 유용한 지도였으면 합니다.
동묘 길거리가 그래도 두렵고, 낯선 분들께 경험상 괜찮았던 점포 두 군데를 소개합니다. 첫 동묘 쇼핑을 하는 분들께는 괜찮은 옷을 찾기 쉽고, 거울도 있는 곳입니다. 아쉽게도 간판이 없어서 위치를 알 정도의 정보를 대신해서 올립니다.
1. 소재가 좋은 여성 코트, 재킷, 아우터가 모인 점포.
*지드래곤이 <무한도전>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유명한 동묘 돌담 골목길 입구.
코트와 자켓은 모두 만원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2. 20-30대 취향 옷들이 많은 상점.
*<길성 피혁>이라는 가죽 취급점 아래에 위치.
동묘 옷들 중엔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예쁜 옷도 많고, 젊은 어른들이 많이 보이는 곳입니다.
(광고 X, 촬영 허락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