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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Aug 26. 2021

책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어쩌면 그저 샌드위치 하나가 필요할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내가 만난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의 이름은 가이다. 그는 게임 속 배경캐릭터(npc)이다. 배경 캐릭터는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아무 중요성도 없는 말 그래도 ‘배경’에서 의미없이 뛰노는 엑스트라 인생이다. 주인공의 초기설정이 이렇다면 상업영화 스토리는 당연히 안봐도 뻔하다. 이 남자가 가진 배경캐릭터로서의 울분과 좌절감을 통쾌하게 분출하고 누군가에게 복수한다. 실제로도 그게 스토리의 전부였다. 용감한 탱커와 딜러가 서로 싸우고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처음에 그는 그저 평범한 은행직원이었다. 중요한 싸움씬에서 하릴없이 항복해 위협받고 퇴장하는 게 매일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 어느 지점에 다다르고,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그는 변한다. 배경캐릭터 주제에 너는 나대면 안된다, 알고리즘 주제에 자성을 가져서도 안되고 당연히 사랑도 안된다-는 게임 밖의 인간들의 공격에도 가이는 열심히 반격을 가하고 통념을 깨뜨린다. 그는 최초의 스스로 성장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레벨없을 했고,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내 생각이지만 상업영화는 이렇게 약간은 비겁하다. 사실 인생에서 회심의 일격, 멋들어진 반격따윈 그다지 많지 않다. 그저 일상의 반복이고 때로는 삶에 일방적으로 얻어터져야만 할 때도 많은데. 그런데 이쪽 사람들은 늘 이렇게 볼거리를 만들고 그 볼거리는 사람들의 억눌려있는 욕구를 해소해주기에 잘 팔린다.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굳이 악평해야할 이유도 없었다. 마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캐릭터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준다는 교훈면에서도 나쁠건 없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통쾌한 한방 이런 것들을 충족시켜주었다는 면도 그게 굳이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영화가 내 시간을 죽이는 동안 어떤 면에서의 ‘진실’에 대해서는 하나도 말해주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한명의 이름은 헨리 치나스키이다. 그의 인생은 밑바닥 of 밑바닥이다. 그러나 작가가 다행히 유년시절부터 썼기 때문에 그가 왜 그런 개차반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이유가 어느정도 독자에게 설명이 된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폭력적이고 무지한 아버지, 애정만 있고 자식을 보호할 힘과 지혜가 없는 어머니 밑에서 불운한 유년을 보냈다.


권위있는 훈육 VS 권위적인 훈육


작년에 배운 가족관계 수업에서 권위있는 훈육은 무엇인가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있다. 권위있는 훈육은 권위적인 훈육과 다르다. 그것은 아이의 잘못에 대해 훈육하고, 아이가 그것을 잘 고치는지, 옳은 방향으로 틀어서 잘 걸어가는지 지켜봐준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 행위를 보상하고 칭찬함으로써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랑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권위적인 훈육은 그런 것 따위없다. 그저 아이를 제멋대로 훈육하고 말 뿐이다.


아이가 행동을 잘 고쳤는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지켜봐주지 않을 훈육은 폭력이다. 더 어리고 연약한 이 앞에서 강자의 우월을 분출하는 쇼일 뿐이다. 이런 양육자는 실제로 아이가 그 훈육을 이해하고 행위를 고쳤는지 아닌지는 별 관심이 없기에 아이는 자신의 행위에 정확히 어떤 점이 잘못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고쳤어야하는지 모른다. 모를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그것에 점점 관심이 없게 된다. 이건 정확히 헨리의 이야기다. 헨리의 아버지는 헨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잘못된 훈육을 했다. 권위적인 훈육. 그는 잘못에 대해 비이성적이고 과도한 폭력으로 대응하며 자신의 권위를 아주 작은 아이에게 배설했다. 왜 아이가 잘못된 행위를 했는지 묻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장면도 그의 평소 문체답게 간결하고 거침없이 표현하고 말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읽을 때 헨리의 걷잡을 수 없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을 느꼈다. 실제로 헨리는 삼라만상 어떤 것에도 그다지 흥미나 경이가 없는 무감각한 소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첫인상


세상은 좋은 곳이야, 태어난 건 좋은 일이야, 살아있다는 건 좋은거야. 이런 생에의 가장 근본적 긍정과 신뢰, 기쁨은 아주 어린시절 caregiver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버린다. 헨리는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분노하고 있었다. 세상은 구역질 나는 곳이야.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건 우울하고 좋지 않은 일이야.



영양실조 인생


글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성적이고 폭력적인 표현들로 가득했다. 빈곤, 폭력, 자살, 어둠의 거리, 판자촌, 부랑아, 부스럼…읽기로 한번 마음먹었으니 매일 밤 자기전에 조금씩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자면 꼭 악몽을 꿨다. 그래도 무섭진 않았다. 다만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싶었다. 이 남자의 끝은 어디일지 궁금했다. 헨리의 불우한 유년시절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 상황과 세계대전과 맞물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의 전면전 앞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헨리에게 친구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무리와 어울리지 못했다. 늘 금기를 넘나들었고, 많은 장면이 이유없이 폭력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에게 인간모두는 아마 자기 아버지가 속한 종족에 대한 비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폭력을 저질렀고 몇몇은 심각한 수준까지 이른다. 어느 영양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그는 평생을 배를 주리며 이곳저곳을 떠돈다. 소설이 끝나갈수록 그가 다른 남자들에게 거는 의미없는 그  싸움들은 마치 헨리가 살기 위해, 정신적인 영양실조를 숨기고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발악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가 처음 또래아이들과 함께 성에 눈 떴을 때에는 읽기 거북스런 표현들도 많이 나왔다. 아니 이런 글을 굳이 종이와 잉크를 낭비해가며 출판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치기와 호기심에 젖은 싸구려 표현과 대화도 참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엔 헨리를 구성하는 삶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헨리는, 아니 작가는 그런 인간이었다. 세상 어떤 것에도 쓸데없이 뒤로 숨거나 더 좋은 고상한 언어로 바꿔가며 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그게 자신이 걸어온 삶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그게 독자라 할지라도) 잘보일 욕심도 걱정도 없이 삶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인간. 거칠 것도 없고, 글이라는 자기성찰에 있어 결코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그런 무섭도록 솔직한 인간. 물론 그런 밑바닥까지 굳이 숨기지 않는 그의 투지가 대단한거지 그의 폭력과 광기가 대단한 것이라 추켜올리고 싶진 않다.


아름다움을 알지만, 그것을 위해 살지 못하는 남자


헨리 그는 아주 죽어버린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또래 친구들이 거미가 파리를 잡아먹을 장면을, 불독이 고양이를 물어뜯을 장면을 보고 있을 때 혼자 견디지 못해한다. 나약한 것이 어떤 절대폭력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멀뚱히 관람해낼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면에서는 그는 또래와 달리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약한 것들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약하고, 자기 혼자 어쩌지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것들.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처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낼만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고 꼭 필요한 일을 해낼 용기가 없다는 점 때문에 헨리는 평생을 괴로워했다.



아버지는 나를 그 부자 고등학교에 보내면서, 내가 그 아이들이 크림색 쿠페를 타고 질주하면서 환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을 꼬시는 모습을 보며 지배자의 태도에 물들기를 바랐다. 대신에 나는 가난뱅이는 보통 계속 가난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저 젊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의 냄새를 맡으면서 무척 흥미로워한다는 것도 깨우쳤다.



어쩌면 그냥 ‘나’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


헨리는 이쁨받고 주류사회에 속하려고 아양떠는 인물이 아니다. 학교나 군대, 무리가 옳다고 추켜세우는 미덕과 가치에 노예처럼 자성없이 수긍하고 복종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덮어놓고 돈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히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누군가나 세상이 딱지붙인 것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는 사람. 다른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분명한 사람이었지만 남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늘 스스로 배척당하는 쪽을 택했다. 학교에서 친구가 <우정>의 가치에 대해 글을 쓰고 칭찬을 받자, 그는 <우정없음>의 가치에 대해 글을 쓴다. 가끔씩 글에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문장도 많았다. 이 사람의 맥락없는 솔직함이 나는 꼴보기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미래에 대비하려고 빈민가까지 가보는 연습을 했다” 뜬금없이 챕터의 시작부터 이런 문장이 있을 땐 진짜 웃겼다.)


을 처음 배우고, 잔인한 인생에서 안주할 곳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그 뒤로는 처음 마음에 드는 을 만났을 때 그렇게 생각한다. 헨리는 평생 모든 인간들에게 제대로 된 인간대접 한번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어느 면에서는 낭만을 아는 사람이었다. 헨리는 내가 보기에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가 아무리 성에 대해 싸구려 표현들을 썼어도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성을 실제로 저급하게 취급하진 않는다. 아버지가 억지로 집어넣은 귀족무리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을땐, 그는 귀족 동창들의 이유없는 행운, 상처없는 몸, 고생없는 청춘, 패배를 다루는 법을 모르는 인생을 싫어한다.


그들은 물렁했고, 한 번도 진짜 불길에 맞선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쓰레기였다…

매끈하고 흠집없는 신체와 정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뭔가가 빠져있었다. 그들은 아직 근본적으로 시험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헨리의 미학관은 나의 미학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모의고사를 무척 빨리 풀고 엎드려 자는 유학파 친구들. 그것은 내 노력, 나를 포함한 모든 국내파들의 노력에 침을 뱉는 행위였다. 그 애들의 엎드린 조용한 등. 달콤한 잠에 빠진 등은 나에게 우리에게 말했다

“네까짓건 나한테 안돼. 만에 하나 네가 좋은 점수를 얻는다고 해도 그건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멋지고 눈부신 스피드를 네 따위가 따라올리 없어”


나는 분초를 다투며 시험지를 넘기는 와중에 그들은 OMR마킹까지 마치고 스르르 아름답게 책상으로 쓰러진다. 왜 굳이 그런 애들은 자리도 꼭 앞자리었던지. 그 애들의 엎드린 등이 나는 참 얄미웠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것도 참 순수한 일이다. 그때보다 더 많은 걸 알고 경험한 지금, 인생은 끝에 가봐야 안다는 걸 깨달은 지금, 나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헨리는 순수한 사람이었고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다.




프리가이를 보고 온 날 밤에는 이 남자의 거침없는 반격도 내심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사소한 것 하나쯤은. 일상적인 것 하나쯤은. 그러나 작가는 그런 내 쓸데없는 생각에 대꾸도 안한다. 그저 날 것 그대로의 삶, 대부분의 경우 두들겨맞고 무너지고 피가나고 아문 상처가 또 곪아 터지는 그런 삶을 묵묵히 보여줄 뿐이다. 그러고도 그는 온갖 패배와 추악함, 비도덕을 뚫고, ‘주님이 버리셨다’고 칭해지는 이런 인생일지라도 뚜벅뚜벅 인생을 걸어나간다. 나는 이 사람의 글 속에서 아무 영향력도 없는 완전한 배경캐릭터일 뿐이었다. 그는 소설속에서 몇번이고 자살을 생각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진 않는다. 생의 전면전에 홀로 부딪힌 흔적들, 온전히 자신의 것인 자신의 생과 그 생생한 흉터들에 이상한 애착을 느낀다. 매년 하나씩 나오는 그런 뻔한 상업영화만큼 재밌고 통쾌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은 내게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점은 재미와 통쾌, 내 일상의 욕구가 허위로 충족되는 것 그 이상으로 중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이용당해 진을 빨리는 그런 유의 사랑은 아니다.



찰스 부코스키


결국 글을 다 읽자 이 남자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이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면 이유없이 잘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헨리의 뒤에 숨어 그 스스로 겪었던 감정을 담담히 적어내려갔을 찰스 부코스키의 인생에 연민과 동정심이 들었다. 인생에서 그 누구에게도 단한번의 연민이나 동정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 그가 헨리였기 때문이다. 그에겐 누구보다 사랑이 필요했는데 왜 그는 단한번도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았을까. 이런 류의 인간을 만나면 꼭 한번은 쓸데없는 가정법을 던지게 된다. 만약 딱 한번만이라도, 그가 제대로된 어른, 그에게 영양가득한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먼저 건네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찾아보니 이런 작품도 있다ㅋㅋㅋ정말 찰스 부코스키다운 제목이라 놀랍다. 일단 바로는 못 읽을 것 같다..이 사람 책은 좀 휴식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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