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쓸모도 능력도 자격도 없는 나를 부르시는 목소리
마태복음에는 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등장한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일꾼을 구하러 나간다. 이상한 점은 그가 몇번이고 인력시장에 다시 가서 일꾼을 더 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꾼이 이미 충분해도 몇시간마다 꾸준히 나가 그 작업을 반복한다. 인력시장에서 불러주는 사람없이 허망히 떠돌고 있는 영혼들을 자기의 밭으로 기꺼이 초대한다. 그 사람의 이상함은 새벽에서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계속된다. 그의 대사는 “내가 인심써서 너네 고용하는 거니까 두배로 열심히 일해”가 아니다. 마치 그저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그들을 계속해서 초대한다. 심지어는 해가 저물어 하루의 노동이 다 끝나갈 무렵에도, 아직도 어떤 노동도 부여받지 못한채 떠도는 이들을 굳이굳이 자기 밭에 들여보낸다. 참으로 이상하고 이상한 경영철학이다.
“너는 해가 다 질때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니”
“나같은 사람 써주는 사람도 없어요. 아무도 거들떠도 안봐요. 제 인생 하루 벌어 하루 살고 기댈곳없이 혼자 악전고투하는 희망없는 인생이에요”
그분은 내 비참한 인생에게 말씀하신다.
얘야, 너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자
마음을 열고 너도 이제 내 초대에 응해야지
네 값은 내가 상당히 줄테니 걱정하지말고 들어가렴
그분의 이상함이 절정에 달한 것은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는 때이다. 그분은 한시간 일한 이에게든 하루종일 일한 이에게든 모두 똑같은 삯을 나누어준다. 그분은 모두에게 똑같이 생명의 값을 지불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값은 쪼갤 수 없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둘 중 하나다. 생명을 반만 구할 수는 없다.
율법주의 사고의 대사는 이렇다. “한만큼 주세요. 내가 더 많이 일했잖아요” 이런 율법주의는 공로주의, 보상심리로 연결된다.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 왜 나의 수고를 폄하하느냐’하는 구원의 감격따윈 없는 아담의 후손다운 발언이다. 그들의 교만스러운 의아함은 램브란트의 그림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주인이 놀고있던 나를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초라히 일없이 놀고 서있었을 운명일 뿐이다. 나역시 값없는 은혜를 누리고 하루종일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던 것이다. 은혜는 덕행쌓기 콘테스트따위에서 이겨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받을 자격도 누릴 자격도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먼저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죄를 짊어지셨기에 내가 해질무렵 포도원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떡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그런 완전하고도 이상한 사랑을 이 세상에선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우기는 중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렇게도 쓸데없이 혈기를 부리고 고집을 부리는 내가 좀 언짢으실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나도 나를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내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분의 손길이 어느순간 내 마음의 장벽을 헐고 오직 그분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왕이 되고 힘과 유일한 기쁨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