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미리 요약해보기
나는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을 죽이기도 또 살리기도 하는지 안다. 그러나 내가 그와 동시에 깨달은 것은 인생의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나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더이상 말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까지 인간이 성숙을 이루게 되면 남는 것은 그 인간이 걸어온 궤적이다. 이렇게 표현해도된다면, 실은 정말 그 궤적뿐이 남는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체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인가? 어떤 모양인가? 어떤 흔적이 남았는가? 어느 곳에 어느 방향에 속해 어떤 일을 하며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가. ‘행동’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만큼 더 깊고 긴, 시간을 먹고 산 궤적.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해져버리는 것이다.
최근엔 서점 매대에 올려진 싸구려 자서전들을 보았다. 자신의 중요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이 세상에서 한껏 그 존재감을 드러내보려는 시도 혹은 정치적인 위세를 향한 분투. 나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라는 소리없는 외침. 그 인간들을 둘러싼 무수한 의혹과 공방, 어떠한 것들의 쟁탈전들, 옹호자들과 그런 옹호자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비난. 그런 인간들이 아직 영글지못한, 그래서 아직도 찬반논란이 분분한 자신의 삶을 재료로 부끄럽지도 않게 섣불리 책을 쓴다. 무엇을 남기기 위함인가. 또는 책이라는 형태로 무엇을 변호해보려는 시도일까. 책이라는 것을 그저 하나의 매개체로 치부해버리기엔 이미 책에 너무 큰 애정을 품어버린 내가 보기엔 이런 현상은, 책에 삶을 담는 게 아니라 마치 숨겨진 불순한 의도를 위한 하나의 도구나 무기로 책을 사용하는 이런 현상은, 직면하기 거북스런 현실이다. 그들이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책은 사실 무섭도록 강한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몇 세대를 걸쳐 전달해버릴 능력이 있는 병기다. 그리고 그렇게 전달해놓은 잡다한 것들을 시간이 재판해내고 진짜를 가려낸다. 어떤 의도나 그 의도의 성공 혹은 실패가 남는게 아니라 그저 ‘삶’이 덩그러니 남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시간 앞에 인간은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다.
같은 날 내가 만난 다른 종류의 삶도 있었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은 한 영화 속에서 모델이 된 실화 속 인물이었는데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였다. 그녀는 뛰어난 재주와 스스로의 노동으로 번 돈을 고아와 미망인에게 평생 나누고 살았다. 이 몇문장. 그것이 그녀가 몇세기 전 남긴 짧은 몇십년의 삶. 그 궤적의 전부다. 더 변호할 것도, 더 보탤 것도 없는 몇마디가 정말 전부다.
We are all same in the end.
이 잔인한 명제를 다시한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진다. 끝에 가면 결국 우리가 가진 크고 작은 다름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버린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든가, 대단한 권력을 쥐었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거나, 뛰어난 용모나 재주를 가졌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거나, 많은 사람에게 박수를 받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했거나, 꿈을 이뤘거나 혹은 그러지 못했거나. 결국 끝에 가면 하등의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흙인형의 싸움일 뿐이다. 잔인하지만 내가 알아버린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살았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다, 하는 것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전혀 중요하지 못한 것들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그 사람이 산 삶의 궤적 그 뿐이다. 작가가 되겠다고 하지만 고작 1-2년 냉정없는 열정만으로 업에 뛰어든 이들이 남기는 궤적은 작가의 궤적은 아니다. 하루키도 말했었다. 이 싸움은 장기전이라고. 예수를 사랑했다고 하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은, 그 편에 속해 그 쪽으로 걷지 않은 사람은 결국은 예수를 사랑했다고 할 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신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다름, 크고 작은 불평등과 크고 작은 불행과 어려움 시련 이런 것들이 존재하도록 두시고 허용하시는 가장 큰 이유도 그런 것들이 종국에 가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예수를 진짜로 사랑했던 한 신부는 자신의 삶을 아프리카 수단에 바쳤다. 그분이 남긴 궤적이라곤 내게 그 한문장이 전부다. 그분이 젊었을 때, 힘들게 의대공부까지 하고는 신부를 하겠다는 아들을 반대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을 흘리며 그랬다고 한다. 자꾸만 하느님에게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고. 이토록 처참한 광기와 광폭의 시대에 이런 동화같은 이야기가 실존한다는게 어떤 면에서는 놀라움을 넘어서 기가찰 지경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것 하나를 붙들고 뚜벅뚜벅 걸은 삶이다. 자신의 삶이나 사사로운 욕망은 던져버린 냉정. 그리고 진짜 중요한 삶에 자신을 던져버린 열정. 나는 그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곤한다. 물론 그런 종류의 삶이 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분은 인간의 어떤 종류의 증명을 필요로하시지도 않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인간이 감히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같은 포지션으로 부르지 않으셨다는 그분의 섭리도. 그러나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나만이 찾아야하는 질문이 주는 무게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어진다. 잘못된 인생은 끝에 가서 결코 되돌려 다시 살 수 없기에. 그 질문의 무게는 거의 내 인생의 무게와도 같은 무게다. 턱하고 숨이 막히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진짜의 무게.
대체 나는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보일 것인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거야.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거야. 열정어린 젊은 날의 호기심과 말들은 영원을 보장해주진 못한다. 신호탄이 되어줄 말과 열정도 있어야하겠지만, 말보다 길고 더 깊고 느리지만 끊이지 않는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순간적으로 찰나에 완성되어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 씨앗이 심기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땅에서 기적처럼 새 싹이 돋고, 더 거짓말처럼 꽃이 피고 거기서 열매가 맺히듯이. 시간이 흐르고 궤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걸어갈 방향, 내가 그려갈 궤적들. 내 심장 저 아래 어딘가 제멋대로 뭉쳐있을 냉정과 열정, 그 사이 균형을 맞추려는 아득한 심정을 품고 나는 매일 기도한다. 일단 당장은 배워서 남주자는 생각만 하기로 한다. 일단 당장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더 많으니까 열심히 배우자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