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권태 즐거움과 쓸쓸함 그 사이 어딘가
강렬한 감정이 반복적으로 시드는 것을 경험한 후 이 과정에 회의를 느껴 가슴 뛰는 게 멈춘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질문을 읽게 된 그무렵 나도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열심히 진자운동을 하며 냉기와 열기에 번갈아 데이며 커가는 중이었다. 냉정만으로도, 열정만으로도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7월초, 충동적으로 블루, 로소 두편을 모두 사놓고도 하필이면 블루편을 먼저 집어들었었다. 남자입장에서 서술되는 조금은 딱딱하면서도 무언가가 격렬히 배어있는 한 이야기의 흐름에 그 시절 나는 흡입력있게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읽다 덮고, 또 읽다 덮으며 이제 8월이 끝나갈 무렵까지 중반에도 채 도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불현듯 나의 일상과 소설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결합했다. 특별히 갑자기 너무 복잡해진 내 일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잠깐 비껴나서 남의 인생이나 속편하게 들여다보고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 핑계를 삼아 대신 울고 대신 웃고 싶었다. 영화를 볼까 생각도 했지만 영화보단 더 참여적이고 진득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손으로 한장한장 넘기며, 그들이 멈출 때 같이 멈추고, 그들이 울때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마치 책을 산 날부터 그날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결국 그날 밤 사이에 남은 블루편을 다 읽고, 다음날 밤엔 또 새벽녁까지 로소편을 읽어치웠다. 블루편에서 서서히 시작한 울림은 로소편을 읽을때까지 점차 더 크게 울렁거렸다. 소설 속 삶들을 음악삼아 그동안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두 사람이 만나 처음으로 뜨겁게 사랑을 한다. 둘 사이에는 아기가 생겼다가 죽었고 둘은 헤어진다. 그러다 10년동안 서로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재회한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인생이 그렇듯이 인물들의 삶과 감정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갑다가도 뜨거워지고 그러다가도 다시 얼어붙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둘의 사랑은 어느 면에서 아오이의 표현대로 ‘야만적’이었다. 자신의 전 존재로 서로에게 부딪치는, 과거도 미래도 미련 없이 내던지는 야만적인 무차별적인 사랑. 냉정의 상징적인 성격을 지닌 아오이가 준세이와 나눈 사랑을 표현하는 표현들은 모두 다 뜨겁다. 야만과 광폭. 그 둘은 무모하도록, 광폭할 정도로 어울리고 4년을 사랑했다. 사랑을 잃고 살아가던 어느날, 아오이는 보석상점의 동료가 제안한 보석 디자인 공부를 거절하며 말한다.
“보석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만지고 싶을 뿐, 그런 정도로만 관계하고 싶어요.”
“잘 모르겠네요. 만드는 것은 만지는 것이 아닌가요? 관계하는 게 아닌가요?”
“만들다 보면 지나치게 되잖아요. 너무 만지고 너무 관계하고.”
아오이는 참으로 냉정적인 여인으로 줄곧 묘사된다. 아이를 잃은 엄마, 기쁨을 잃은, 사랑을 잃은 여인. 그로인해 끝없는 용서가 계속해서 부어져도 목이 마른 여인. 아오이는 책과 목욕을 좋아하고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단 우울해한다. 마빈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눈은 올곧게 진실을 보는 투철한 눈이다. 결코 열정에 속지 않는 사람. 그녀의 미국인 새연인 마빈과의 삶은 조용하고 부족함없이 충족되어있었다. 어떤 갈등도 어떤 큰소리도 없는 심플한 생활이다. 어떤 것도 아우성쳐대며 뜨겁게 그녀를 뒤흔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파란색 물감같은 여자 아오이는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어떤 뜨거운 공포를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 마빈에게 그녀는 보기좋은 인형과도 같다. 그녀는 절대 다가가지 않는다. 관계하지 않는다. 연인과 사귀고, 그와 동거도 하지만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지만 결코 실제로 관계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빈 앞에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해도 울지 않고, 마빈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을 해도 만지지 않는다. 마빈은 먼발치서라도 오래도록 그녀를 기다려주고 변함없는 사랑을 주지만, 그녀는 사랑을 받는 법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마빈과 헤어지기까지 준세이만은 올곧게 그리워한다. 참으로 기묘한 열정으로. 만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면서도. 결국 30살 생일이 되던 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그 둘은 재회한다. 아오이는 다시 준세이를 향해 달려가는 그 길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무언가를 다시 느낀다. 내 안의 무언가, 터무니없이 강하고 천방지축인 무언가가 나를 휘젓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그 이후 4일간의 뜨거운 재회 후 그 둘은 자연스럽게 이별을 한다. 서로를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지는 예전같은 열기는 없다. 기차역에서 그들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헤어진다. 그런데 그 냉정안에는 사실 예전에는 없던 열정이 있다. 준세이는 아오이를 다시 붙잡기 위해 달려가 급행열차 티켓을 끊는다. 예전같은 순도 백프로 열정은 아니지만, 자신의 평생은 그녀 아니고서는 안된다는 차갑고 확실한 냉정을 품은 열정으로. 무엇보다 더욱 영원히 지속될 뜨거움으로.
전국단위로 모집해 기숙사생활을 시키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별별 인간군상을 다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인간들 중에 분명 아오이같은 동기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애들은 보통 어떤 것에도 10대의 전형적인 열광이 없고 책 읽는 것이 취미이며, 조용하고 주로 악기 하나를 잘 다룬다. 사실 나 역시 막 시끄럽게 이곳저곳에 등장을 하거나 몸을 내두르며 댄스동아리에 가입하는 그런 부류는 전혀 아니였지만 나는 나름 가슴에 어떤 열정이 항상 있었다. 물론 그것들 중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에 가까운 열정들이 많았지만 나름 10대의 전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취미들도 가지고 있었다.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들었고 특히 스트레스 받을 때는 시끄러운 음악을 최대치로 키우고 들었다. 그리고 내 곁에 아오이같은 여자애들을 보며 그 의중을 알수없음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너무 이른 ‘어른같음’에 대한 약간의 공포, 그리고 이질감같은 것들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것들이 다 나름의 특질이고 성질이고 타고난 성격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내가 아오이같은 여자를 단박에 100%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준세이를 다시 만나러 두오모로 달려가는 장면에는 그녀에게 말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었던 것도 같다. 이제야 드디어 사람같아,하면서.
사실 냉정하게 아오이 그녀의 일상을 보면 그녀의 가슴앓이가 뜬금없는 청승으로 읽히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일도 있고, 크게 부족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그녀 곁에는 그런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연인도 새로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지나간 사랑을 잊지못하고 자신의 연인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한 걸까? 이럴 때면 정말 아직 내가 너무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 거라고, 젊음이라는 변명 뒤에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왜 이렇게 인간의 삶은 복잡할까? 지나가면 잊히고, 잊히면 새로 시작하는 것. 그 뿐이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상처는 가슴에 박혀 죽을때까지 빠지지 않고, 어떤 추억은 인생에 뿌리박혀 죽을때까지 잊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야 만다는, 그 무엇도 다 과거가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사실 앞에 나는 개미마냥 아주 작은 인간실존으로 멍하니 서있게 되곤한다.
사강의 소설이 그랬듯이 이 소설은 사람의 감정을 파고드는 소설이다. 나에겐 일본소설이 참 재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나 기사단장 죽이기,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그리고 냉정과 열정 사이까지. 일본 작가들은 마치 (이런 표현은 참 피하고 싶지만 다른 표현이 생각이 안난다)그 나라 특유의 정서가 있는듯하다. 아니면 번역체에 특유의 정서가 있는 걸수도 있겠다. 이야기들이 마치 사람의 뜨거운 감정에 찬 물감을 한번 휙 끼얹어 전개되는 느낌이다. 뜨겁지만 뭔가 차갑다. 그래서 더 매력있다. 이 책은 이미 영화화도 되었지만 영화는 흔히 그렇듯 소설에 대한 내 원초적인 감상을 깨뜨릴 것 같아 나중으로 미뤘다. 그런데 아쉬워서 감상평들을 살펴보니 현재 옆에 있는 연인에게 잘하라는 영화평도 보였다. 그렇게보면 마빈과 매미가 불쌍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마빈과 매미, 두 사람은 울며겨자먹기로 자기들의 연인을 사랑해’주’고 곁에 있어’준’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뜨겁게, 또 차갑게, 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내가 꼭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영혼으로 느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사랑했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랑을 아오이와 준세이보다 더욱 동경한다.
지난학기 심리학 수업에서 배운 것은 상상과 경험은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계획과 경험. 그 둘을 담당하는 몸의 영역이 다르고 상태가 다르다고 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할때, 보통 우리는 ‘Hot’의 상태에 있다. 뜨겁고 기대에 차있다. 그 안에 온전히 들어가 있고 가담해있다. 손에는 땀이 나고 긴장되고 또 불안정하다. 그러나 그것을 진짜 경험한 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일종의 ‘Cold’상태에 있게 된다. 이미 일어나버린, 지나가버린 것을 차갑고 이성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예로 배웠던 것이 갬블링이나 과식 또는 과소비이다. 너무 예뻐서 흥분된 상태로 산 옷들을 집에 돌아와서는 차가운 후회로 바라봤던 적이 몇번이었는가. 또 지적인 흥분으로 가득찬 상태로 읽었던 책을 차갑게 비평하게 된 순간은 또 몇번이었는가. 그러니 상상이나 계획만으로 아주 좋을거야 또는 아주 나쁠거야라는 과도한 예측은 우리 몸에 해로운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면 어느쪽으로든 완전히 다른 인종의 세계가 펼쳐질테니 말이다.
지나친 열의나 이상은 일의 질을 떨어뜨린다
열정과 권태 그것이 반복되면 성숙이라고 누군가 얘기했었다. 우리 삶에는 냉정과 열정, 열정과 권태 그 두 개의 가슴이 동시에 필요하다. 냉정만으로도 안되고, 열정만으로도 안된다. 그게 무엇이든, 삶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관계든… 열정을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계획과 생각이 필요하고, 내 곁의 사람들과 내 꿈을 시들어 죽게 하지 않으려면 지치지 않는 따뜻함도 필요한 것이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분노, 놀람 이런 것들이 삶의 한복판에서 나를 뒤흔들어댈 때마다 도망가버리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냉기와 무딤도 필요하다. 어떤 쓸데없는 이상이나 환상화없이 온몸으로 삶을 직면하는 용기는 어느면에서는 뜨겁지만 동시에 차가워야하는 것이다.
이가 시릴 정도로 달기만한 사랑으로 함부로 영원을 꿈꾸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인생의 씁쓸함과 달콤함, 냉정과 열정 사이의 균형을 잃으면 안된다. 섣불리 무언가를 단정했다가는 인생은 언제나 반대로 뒷통수를 치기 마련이니까. 사실은 인생이 일부러 우리를 골탕먹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생이 다양한 면을 가진 것 그뿐이다. 가끔 그 점 때문에 인간의 삶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펼쳐칠 아오이와 준세이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조차 함부로 끝을 점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일 것이다. 이젠 침착함과 확신을 품고도 더욱 뜨겁게 사랑해나갈 그들의 모습을 그저 기도해볼 따름이다.
(다음 책으로는 마빈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ham on rye를 읽어볼 예정이다. 마빈은 어떤 열정을 품은 사람이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