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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Aug 13. 2021

좋은 사람에 대한 환상

자기 인생에 대한 오너십을 회복하기

막 스무살을 지날 무렵, 나는 고딩시절 존경했던 스타강사 밑에서 영광스럽게도 조교일을 할 기회를 얻었었다. 1년이나 꽤 충성스럽게, 또 동료들과도 재밌게 일을 하다가 2년째가 되던 첫 근무날, 강사의 꽤나 충격적인 언행으로 그 일을 관두고 나는 참 많이 고민했었다.


내가 지금 도망을 치는 것은 아닌가?
이 사람을 피해 또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는 어디로 피하게 될 것인가?
내가 너무 약하고 비겁하게 구는 걸까?


그때 쯔음에 김윤아의 길을 들으며 버스정류장에서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 어딘가 강하면서도 음울한 보컬과 가사가 내 가슴을 울렸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그 일을 반추해보면 나는 나의 결정을 후회하기는 커녕 참 힘있는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 후에 새로 하게된 일들 중에 물론 좋고 행복한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훨씬 더 어른다운 어른, 상사다운 상사를 만날 기회를 내게 준 셈이 되어 몇년째 그런 역할모델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으며 함께 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결정은 내가 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나싶다. 나는 인내라는 좋은 덕목 뒤에 숨어 이 짧은 인생에 무슨 쓸데없는 맷집을 기르려했었던 것일까. 진짜로 비겁한 것은 나를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게 놓아두고 트라우마나 고통에 무뎌지게 만들어 맞는 역할, 피해자 역할을 평생 나에게 스스로 짐지우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직무유기이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카페 정식근무 첫날이었다. 사실 그때 나는 일을 구하고 있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카페의 사장님과는 작년부터 일이 성사가 되려다 말고 되려다 마는게 반복이 되어왔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되려다 말까 하는 답답함도 있었고 그 사장님이 나름 괜찮은,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었다. 그러다 마침 또 방학중에 다시 연락이 닿아서 일을 해줄수 있겠냐고 그쪽에서 먼저 물었다. 나는 힘들게 스케쥴도 서로 맞았는데 절실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한번 바쁘게 살아보자!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었다. 며칠 일을 배우고 드디어 그날 오전, 혼자 카페를 열고 오전 내내 바쁘게 일을 한 날이었다. 일도 친절히 알려주고 꽤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장은 그날 의외의 면모를 보였다. 첫날 묵묵히 일하는 알바생에게 밥은 어떻게 했니, 첫날인데 힘들지는 않니, 인사치레 하나 건네는 법 없이 그저 내가 돈 주니까 너 혼자서 일 알아서 다하고 근무하는게 당연해-하는 태도였다. 자기음료까지 손님처럼 부탁하는 건 기본이고 알바생 근무시간동안 놀리지않고 뭐 하나라도 더 시키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자기 가게에 찾아온 손님한테도 쓸데없이 혈기를 부리고 결국 싸우면서 상황을 끝내는 장면을 봤을땐 나름 경영학도인 내가 보기엔 주인장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일을 배울 때부터 살짝 갸우뚱한 순간들이 여러번 왔었지만 사람을 너무 속단하기 싫어서 보류해오던게 점차 확신에 차기 시작했다.


알바생에게 일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장이 좋은 사장은 아니다. 좋은 사장은 자기 가게에 대한 오너십이 있는 사장이다. ‘내 가게’에 와서 일해주는 사람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  그런데 이토록 오너십이 없다고 느낀 사장은 정말 처음이었다. 물론 이상한 쪽의 오너십은 있었다. 내 가게의 이득만을 향한 오너십. 정작 중요한 ‘사람’은 무시하고 온통 재고얘기, 손님얘기, 주문얘기, 일을 어떻게 하면 더 빨리하는지 얘기. 그런 얘기들은 참으로 친절하게 반복해서 잘 가르쳐주었기에 내가 좋은 사람이라 쉽게 착각한 것이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중요한 걸 모를까? 이렇게 자기보다 한참어린 나도 아는데. 사업을 경영하면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걸 모르는 사람은 사장자리에 있기엔 자격미달이다. 아침부터 내리 6시간 일한 사람한테, 자기가 고용했다는 사람한테 밥은 어떻게 했니, 그 말한마디 뭐 어려운 일이라고 못할까. 참 사소한 한마디인데 없으니까 이상하게 정이 뚝 떨어졌다. 그동안 스무살 초반의 어린 알바생들을 고용하면서 늘 그렇게도 무디게 살아온 것 같았다.


그전부터 은은하게 느껴오던 갑의 향기가 터져버린 건 그 첫날 근무가 끝나고였다. 인사를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서둘러 가게를 이미 나선 내 뒤에다 던지듯이 뒤늦게 나온 사장의 수고했어-한 마디에 내가 뒤돌아서 아무 답이나 인사도 안하고 갔다는 골자로 퇴근한 나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한참을 훈육을 하는 것이었다. 유명한 대사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까지 빼먹지 않고 등장해서 대미를 장식했다. 예의와 사회생활, 참 허울좋은 말들이 휴대폰 너머 훈계하는 사장님의 입에서 나왔지만 나는,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가면쓰고 인사하고 화답하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경할 수 없는 사람에게 듣는 훈계는 수치 그 자체였다. 그런 사람이 내 위에서 어떤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내 귀에 어떤 발언을 해댈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게 너무 끔찍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해주는 사람에게 1원의 고마움도 없는 사람이, 그만큼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사장대접은 받겠다고 구는 꼴이 우스웠지만 나는 에너지를 낭비할 맘도 없어서 그저 죄송하다고 했다. 돈이 궁했던 것도 아니고 일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힘들기만 한데, 매일 봐야하는 사장도 이모양. 여기서 나가는 것이야말로 지능순일 것이다. 나에겐 한시도 더 이 종살이를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바보에겐 바보같이 맞춰주는 게 답이기에 나는 대충 둘러대고 그만뒀다. 그 사람은 이젠 나와 아무런 상관없고 더이상 볼일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사람의 이상한 권위의식을 향한 모든 분투가 한순간에 모두 의미없어진 셈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영원히 왜 그렇게 자기가 알바공고를 자주 올리고 사람을 다시 뽑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동안 아무리 동기들이 자기들이 당한 ‘갑질’에 대해 열변을 토할때에도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런것이 갑질이구나. 어른같지 않은 어른이 어른대접을 요구하는 것. 내가 그동안 참 행복하게 살아오고도 모르고 있었었나 보다.   




쿨하게 일을 그만두고도 사실은 오랫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잘한 결정일까? 저런 사람은 사회에 쎄고 쎘는데 그냥 좀 더 버텨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너무 나쁘게 과민반응해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나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정확히 2년 전의 그날, 조교일을 그만두던 날과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한 일이다. 참 잘한 일이다.


물론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삶과 사정, 사연, 정당화가 있을 것이다. 나름 챙긴다고 아랫사람을 챙겼는데 내가 오해한 걸수도 있고, 사실은 그런 모든 과정을 자기도 그렇게밖에 못 배워서, 못 경험해봐서 그런 걸수도 있다. 내 생각이나 판단이 다 맞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입장이 아닌 그 사람 입장에 서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이기에 내 입장에 서서 내 인생의 오너십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있게 굴고, 사회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정작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내게 좋은 사람이란 자기 인생에 오너십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 인생에 오너십을 가져야 진짜 예의, 진짜 사회생활도 시작된다. 오너십 없이 타인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결국 언젠간 들통날 가면에 지나지 않기에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다지 좋을 것이 없다. 그저 인사를 해야하기에, 예의를 차려야하기에 차리는 예의는 진짜 예의도 진짜 사회생활도 아니다. 그건 그저 내 생활을 좀먹는 곰팡이같은 것이고 나를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리고 이상한 남눈치를 보게 만든다. 그러나 오너십을 가지게 되면 진짜 예의가 시작된다. 그것은 단지 상사나 타인에게 입속의 혀처럼 구는 피상적인 예의가 아니다. 오너십을 가지면 오히려 그런 내 인생에 그닥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에게 시간낭비, 에너지낭비를 하지않게 되고 때로는 그들을 단호히 내 인생바깥으로 치워버릴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서도 진짜 내게 필요하고 중요한 타인들의 존재를 겸허히 인정하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예의이고 진정한 사회생활일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누가 더 ‘상식적’인지, 누가 더 옳은지 가려내고자, 나를 정당화하고자 부던히 쓸데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내가 느낀 감정들이 진짜다. 그건 누구에게 어떤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다. 보통은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공적인 맥락에서 드러낼 때면 너는 애가 왜 그렇게 감성적이니, 감정적이니 객관적으로 바라보렴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의 맥락에서 중요한건 내 감정이다. 감정,기분을 다 속이고 올지도 안올지도 모를 미래를 위하는 체, 이성적인 체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중심은 나지 타인이 아니다. 내 삶에서 내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를 위하거나 보호하지 않고 어떤 이상한 도달할 수 없는 ‘객관’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가식이고 기만이다. 내가 아니면 아닌거다. 물론 기분이 태도가 되어선 안되겠지만 내 순간의 감정들을 무시하고는 결코 내가 살고자 하는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없다. 내가 어떤 걸 보았고, 내가 어떤 걸 느꼈는지,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온전히 집중해줄 수 있을 때 나는 삶을 살고있는 것이다.




결국 좋은 사람에 대한 환상을 품다가 상처받는 쪽은 나이다. 그러나 환상은 깨져야 맞다. 환상이 아닌 현실에 살아야한다. 그래야  역시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좋은 사람   있기에. 나는 내게 아직도 있을 여러 환상을 깨고 나와   있는 만큼 많이 자유하고 싶다. 같이 있기 싫은 사람들을  주위에서 치우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 같이 있고 싶은 일들로  곁을 채우는 것은  책임이다. 누구도  인생을 대신 살아줄  없고  인생의 문제들의 답을 교과서처럼 제시해줄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삶은 내게 피해자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할은 내가 만들어나갈 일이다. 내가 살고싶은 삶은 대체 언제 내게 올까 기다리고만 있는다면 죽을때까지 내가 살고싶은 삶을 살 수 없다. 아직도 무언가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인생의 오너십을 되찾아야만 한다. 수많은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이 자신에게 싸울  있는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만한 때이다. 믿음을 달라하는 사람에겐 믿음을 발휘할만한 순간을 주신다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나는 이제 오너십을 발휘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피하지 않고자한다.  


존경했던 스승을 더이상 존경할 수 없게 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이토록 무감하고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때면, 그래서 이렇게 아프게 환상이 또 깨질때면 그 깨진 파편에 가슴이라고 후벼파지는 듯 아프기도 하다. 그렇지만 마땅히 감내할만한 가치가 있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후에 진짜를 가려내게 해줄 고통이다. 그렇기에 이젠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주인 자리를 넘겨주지 않고 그 삶의 잔인하고 적나라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게 조금은 힘겹더라도, 또 상황을 온몸으로 마주하는게 두렵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에 오너십을 가진 그런 ‘좋은’ 사람으로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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