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루증을 앓던 여인 이야기
나에게 수치심은 내가 너무 앞섰다는 느낌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느끼는게 상대방과 맞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 나의 말이나 행동, 또는 어떠함에 상대방이 부담을 느꼈다(라는 내 생각)에서 오는 감정이다. 상대방은 그게 아닌데..나 혼자 저만치 앞서나가버렸다. 그러한 상대방과 내 마음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거절감이다.
그럴때면, 마치 나의 성적이 오르든 내리든 아무 관심없는 선생님 앞에 가서 ‘선생님 저 이번에 정말 열심히 할게요’를 진심을 다해 외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마냥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교사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결혼까지 생각한 연인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걸 알게되면 오는 감정이 이런 종류일까. 마음을 열어보이는 것은 이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짓밟을 수도 있는 여지를 주는 꽤 위험한 행동이다.
그런 상황은 ‘나’의 잘못된 자기중요성과 자아도취가 원인이 돼 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만약 부모가 아이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연장자가 손아랫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연출될 때에는 그 원인이 좀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 크게 보았을 때는 이런 관계는 강자와 약자, 아쉬울 것 없는 사람과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의 구조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발되는 수치와 부끄러움은 약자에게 원인이 있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그는 아마 상황적으로 강자에 위치한 상대방에게 그저 자신의 마음을 먼저 꺼내 보이거나 아주 약간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는 강자에게 귀인해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상황적 약자가 느끼는 이런 수치는 종종 강자의 정당히 져야할 책임의 회피, 혹은 직무유기에서 비롯되기에. 즉 본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혹은 주어야 마땅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열지 못하게 하는 본인 삶에의 도취 혹은 상대방에 대한 쉬운 멸시와 판단, 혹은 이미 과도한 피로에서 오는 책임회피나 직무유기가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상대의 중요성은 짓밟거나 최소한 티가 나지 않게 무시하는 것. 자신의 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은근한 거절로 수치를 주는 것. 그것은 강자라는 그의 상황적 우위(마음을 열어보인 누군가의 마음을 그대로 짓밟을 수 있는 위치)를 고려해보면 일종의 폭력이다.
아직은 사회에서 별볼일 없는, 아직은 어느 분야에서나 윗사람이 더 많은 20대 청년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이런 종류의 상황을 꽤 많이 겪었다. 처음엔 그 당황스러움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혹시 내가 너무 아이처럼 군 것일까? 이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나를 학대하며 아 역시 사회는 혹독한 곳이야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꽤 여러번 아직 학교라 불리는 대학교 안 교수 제자 관계에서도 이런 상황을 겪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진심을 보이거나 마음을 털어놓거나 조금 더 수업에 열심을 다하는 경우가 전부였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나를 판단하고 나의 마음이나 열심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무시했다. 니가 그러든지 말든지 나랑은 상관이 없어. 하는 무언의 태도였다. 그런 일을 몇 번 거치며 드디어 자학을 멈추고 진정 이런 상황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물을 수 있었다. 이토록 제자의 요구, 발언, 감정에 불감증인 교수가 학교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 각자의 직업에 대한 이해, 성품 등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학생으로서, 그냥 사람으로서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종류의 소통을 꿈꾼 나로서는 상처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럴때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조금 고통받다가 다음번에는 나대지 말아야지,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절대 내 마음을 밟아버릴 여지를 주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고 말았다.
성경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 병이 나은 한 여인이 나온다. 그녀는 12여년동안 스스로 온갖 치료방법을 찾아왔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선지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그 자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수많은 인파속에서 그 선지자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는 그 즉시 병이 나은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나의 상상은 이렇다. 그녀가 옷자락에 손을 댄 그 순간, 자신의 병도 치유받지 못하고 외려 부정한 몸으로 남의 옷을 손을 댄 여자에게 역정을 내는 선지자를 마주하는 상상. 그녀는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될지 모른다. 내가 너무 나섰다, 그 사람에겐 그게 중요한게 아닌데…하는 거절감.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병은 완전히 나았고 선지자는 굳이굳이 그 여자를 색출해내 평안히 가라고, 건강하라고 12년동안 이미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왔을 한 여자에게 눈물날정도로 따뜻한 위로와 기원을 전한다.
그 선지자는 이 땅의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부분을 짓밟거나 자신의 중요성을 대신 강매하지 않는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이들에게 진리를 강요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때에 대신 죽어주기에 이른다. 신학에서는 그 선지자의 인류를 향한 마음을 ‘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한다고 한다.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다 못해 나의 애간장이 끊어지고 창자가 파열되는 아픔을 느끼는 것. 강도맞은 자에게 유일한 선한 사마리아인인 그는 진정으로 인간의 말과 요구에 경청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을 가진 미문 앞에 앉아 너무 역설적이게도 평생을 구걸하며 살아온 장애인에게 그러하였고, 외아들을 잃은 어미에게 그러하였다. 그들의 형용할 수 없는 삶이라는 고통이 그 선지자의 마음에도 똑같은 깊이와 강도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가 결국 인류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구원을 완성했을 것이다. 굳이 이 땅에 내려와 모범을 보인 이가 있다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위로가 된다. 그런 선의 이데아가 진정으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신적인 존재라야 할 수 있는 응답을 사람에게 갈구하고 있진 않았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이것 역시 필요이상의 자학이 되면 안되겠지만 어느정도 일리있는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까. 누구도 인간은 줄 수 없는 위로나 반응은 꿈꾸지도 바라지도 않고 최대한 숨죽이고 내 맘을 꽁꽁 숨기고 사는게 정답일까. 너무 많은 노력도, 너무 많은 생각도 하기 싫다. 그것들은 죄다 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자라,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의 나이나 지위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을 다하기로 스스로 약속하는 것 뿐이다. 아직까지도 돌이켜볼 때마다 생생히 아픈 이 상처를 기억하는 것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언젠가 언니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너의 가장 귀한 진주를 남에게 주지말라고. 나의 어떤 하소연에도 이렇다할 맞장구도 쳐주지 않던 언니가 불현듯 던지듯 꺼낸 그 한마디가 그 이후로도 내 인생을 오랫동안 지탱해주고 있다. 마음을 열어보이는 일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찌를 여지를 주는 위험한 일이 맞다. 내 진주를 짓밟고 더럽혀버릴 여지를 주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허락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내 주위에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상황적 약자들, 내가 어떤 도움이든 줄 수 있는 이들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머지않아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상처들도 그들과의 상호작용, 그들과의 시간과 그들과의 대화로 인해 치유될 것이다. 아직은 진주밖에 가진 것 없는 어린애처럼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지만 내가 좀 더 크면, 어쩌면 진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진정한 나의 가치를 알고 어떤 외적인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끼지 않고 진짜 자유롭게 사는 인간이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