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게임의 본질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메일이 와있었다. UCLA에 붙었단다. 기쁨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두렵다. 또 얼마나 맨땅에 피나도록 헤딩하고 깨져야할 것인가. 또 얼마나 내가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고군분투를 해야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안할 수 없는 내가 나를 볼때면 아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심란해진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모르고 저기 머나먼 터키땅을 가기위해 비행기에 오르던 중학생은 이제 없다. 이제 나는 칠흑같은 외로움에 겁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 이루어져도 이런 반응인데, 나라는 사람은 솔직히 꿈을 꿀 자격도 없다. 에휴.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분주해진 나는 또 쓸데없이 출국할때 엄마아빠한테 드릴 편지를 미리 쓰기 시작한다. 성인이 된지는 몇년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키워주셔서, 기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저는 엄마아빠가 주신 것들, 주시지 못한 것들을 모두 안고 좀 더 큰 세계에 다녀오겠습니다 더 웃고 울고 행복하고 아파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되어보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했던 말과 행동들도 다 용서해주세요 그러셔야 돼요 이제 한국에도 없으니까 쓸데없이 저 미워하지 마시고 가끔 그리워해주세요 (아빠는 언젠가 이 글을 볼 것 같지만..)
이런 멋들어진 편지를 쓰면서도 사실은 맘은 아이처럼 울고싶다. 아 이별이 왜 이렇게 빨리 온 것인가. 내가 공부하고 싶어서 선택한거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예수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졌던것처럼 나도 그렇게 굴고 싶다. 산 밑으로는 내려가고 싶지가 않다. 앞으로 내게 닥칠 풍파와 비교하면 한없이 안온하기만한 부모의 품에 영영토록 머무르고 싶다.
삶은 고난이라고 치자.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던 피터슨이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그걸 그냥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면 된다. 그게 효과가 진짜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직접 해보는 것만이 답이란다. 누가 나에게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니까 내 아이디어가 실효성이 있는지 없는지 발견해내는 것은 내 운명이고 내 일이라는 거다.
의지와 결정의 본질은 그것이 ‘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결정은 ‘자발적’인 것이다. 세상에 깔린 수많은 종류의 포장도로를 따라 무의식적으로 걸으면서 ‘난 이 길을 걷기로 결정했어’ 혹은 ‘이 길을 내가 선택했어’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자신이 걷는 포장도로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자발적인 결정이라고 속일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극복하지 않을 이유들이 이 세상엔 이미 너무 많이 있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돌아가버린 사람들도 있다. 즉 삶을 살아보고자하는 결정은 (그렇지 않을 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한) 엄청난 나의 의지와 나만의 근거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에 ‘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고 의지하겠다고 하는 것 역시 어떠한 종류의 나의 ‘결정’이 필요하다. 이 점을 아주 최근에야 다시 깨달았다. 인간의 헛된 공로의식과 자기 의, 자기 열심에 대한 비판을 귀에 피가나도록 들어서 나의 의가 아닌 그분을 주인으로 붙잡는 또다른 열심에 대한 중요성은 놓쳐왔던 것이다. 결정이라는 건 여러모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삶은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시작되어버린 게임과도 같다. 그가 표현하기를 언제든 수틀리면 이 관계를 떠날거야-하는 마음은 한번도 결혼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결혼의 규칙은 그 관계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당연히 인간만사의 예외를 포용하지 못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에만 해당한다). 어찌되었든 인생도 그와 같다. 언제든지 힘들면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맘을 품는 한 나는 아직도 진정 살고 있는게 아니다. 올인할게 아니면 아예 게임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그런 게임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나는 이미 삶에 나의 모든 것을 베팅한 상태이다.
작년에 같이 공부했던 과외학생이 떠올랐다. 공부에 참 흥미가 없어보이는 그러면서도 말은 잘 듣는 학생이었다. 아이의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나랑 하는 공부는 잘되는 듯 동시에 진전이 없는 듯 보였다. 공부는 장기적인건데 단기간에 열매를 바라는 건 냉철하게 봤을때 힘든 일이었다. 이럴때 인내심있는 부모는 정말 많지 않다. 점점 수능이 다가오고 부모의 간절함만 커지는 맥락에서 어느날 그 부모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번 선생님의 모든 걸 걸고 수업을 해주셔라-대충 이런 문자였다. ‘모든 걸 걸어서’라는 표현때문에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쓸데없이 ‘걸다’의 어원까지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대체 무엇으로도 인간이 인간에게 감히 보상하지 못할 모든 걸 걸으라는 부탁은..지금 생각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문제의 본질이 내게 있는 게 아닌데 나의 모든 것을 건다고 해서 무엇이 크게 달라진다는 말인가. 아무튼 그러다가 여러가지 일+그 일에 대한 부담감도 한몫해서 결국 휴학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과외를 계속해가며 나를 소진했었다. 나를 갈아넣으며 스케쥴을 소화하는동안 그 아이는 중간에 모의고사 1등급까지 맞더니 공부의 맛(?)을 봤는지 많이 달라져가는게 보였다. 한 아이가 성취감을 맛보도록 돕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참 경이로운 일이라지만 그 ‘일’ 자체가 너무너무 힘들었고 그 고통이 아주 커져서 아예 인생의 막을 이만 내려도 좋겠다고 느낄 때까지 치솟았다. 그런건 그 어떤 성취감이나 돈 따위로 보상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다시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은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그 어원에는 대충 이런 뜻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히는..)
1. 있는 마력을 다 내어서 조금도 쉴 새 없이 긴장해서 일에 전념하다.
2. 살아가거나 목숨을 잇기 위해 어떤 것에 의지하거나 매달리다.
그런데 진짜 모든 걸 걸어야되는, 아니 이미 내 모든 것이 걸려버린 게 있었다니. 그리고 그게 내 인생이라니. 약간은 절망스러운 심정이다. 괴물을 피하고 피해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다시 그 괴물을 만난 셈이다. 이제는 숨이 막혀도 억지로라도 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이제 나도 물러설 곳이 없다. 일을 하나 관두듯이 인생을 관둘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건 어려도 안다. 인생은 나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게임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그 외국인 교수의 말처럼 이미 태어나버린김에, 이왕 시작한김에, 죽기전까지 차라리 멋진 게임을 하는게 모로보나 더 낫다.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그냥 gg하고 끝내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선택지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내 안에 있는 빛나는 가능성, 어쩌면 나라는 인생안에서 모든 장애물들을 넘고 때로는 끌어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주인공처럼 살 수 있을 가능성을 앉아서 쓸데없이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쓸데없는 걸 이렇게 표현한다. 거대한 성전을 물어뜯으려는 작은 흰개미. 말 앞에 수레를 두는 것. 어차피 살아야 하는건데, 어차피 시작되어버렸는데, 그런 태도는 다 정말 쓸데없다는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여러 이유들이 있을 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온전히 내가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삶은 의미를 찾아 헤메이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책임지는 그 과정에는 굳이 누군가 와서 당신은 왜 사냐고, 삶의 의미가 무어냐고 묻는 것이 되게 바보같은 질문이 된다. 눈 앞에 삶의 의미가 웃고, 뛰어다니고 있기에. (일단 나는 아이를 키우는 나날중에도 가끔 우울해하고 의미를 찾아 헤매는 양처럼 가끔 울지도 모를 그 양육자의 삶을 생각해보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예시다. 이것도 뭐 일단 내가 살아보지 않았으니 타인의 말일 뿐이지만 새겨둘만한 가치는 있다. 이쯤되니 어바웃 타임 메리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So it begins..
Lots and losts of types of days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구름 폭풍부터 햇볕과 눈발까지..많은 종류의 나날들이 있을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나는 아직도 가끔 나를 어쩌지 못해 미칠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일단 인정하고 내 삶에 타석에 서는 수밖에 없다. 일단 그러자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 사람말대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줄지 혹은 그러지 못할진 아직 모르겠다. 의미는 내가 나름대로 만들어가는 것일뿐더러 사람의 말은 진리가 아니기에. 그저 나는 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릴 뿐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말 뒤에 수레를 두고 유유히 거대한 성전 안으로 들어가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