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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Oct 24. 2021

책 [원테이블 식당]

사랑은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가끔 진리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홀로 잘 해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양육자에게 말한다. “엄마, 제가 혼자 얼마나 잘 하는지 봐주세요!” 즉 아이의 완전한 자유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양육자, 양육자의 지켜봄이 필요한 순간인 것이다.


Cosmos vs Chaos

일찍이 칸트는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우는 이유를, 자궁이라는 한계 덕에 그 안에서 누리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자유의 아주 중요한 속성이다. 우리는 우주 속에 아무 끈 없이 유랑하는 것을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고 공포일 뿐이다. 우주 속에서는 우주선에 단단히 매인 끈이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 우주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 역시 나의 반경과 행동을 규정지어줄 한계가 필요하다. 그 한계를 끌어안을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두 소녀가 성장해나가는 원 테이블 식당에는 ‘그 날’ 이후 마법에 걸려버린 한 소녀와 그 소녀의 친구가 함께 앉아있다. 희수는 한날 한시에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어 종이 인형같이 늘 잠을 잔다. 모든 것이 뒤바뀌어버린 ‘그 날’ 이후 희수를 처음 본 세영의 감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나는 이 집 안을 누르고 있는 슬픔의 무게에 눌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세영에게는 두려움이 몰려왔고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들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희수를 부탁한 희수아줌마가 있었다. 국화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은 희수아줌마의 품은 너무 넉넉해서, 엄마의 자리가 고픈 세영이까지 넉넉히 품어줄 수 있었었다. 그런 희수아줌마의 부탁은 세영에게 거절할 수 없는 종류였다.       


참사와도 같은 어떤 슬픔의 그 날이 한 인간을 덮치고 나면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문득 두려울 때가 있다. 조금있으면 그 슬픔의 그늘에 나의 삶도 잠식당할 것만 같은 아득한 두려움에 당장이라도 그 사람 곁을 떠나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든다. 슬픔에 젖어버린 집안에 들어오는 일은 내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동생의 우울로 회색빛깔로 칠해진 집안을 들어오는 것은 갈수록 커지는 고통이었다. 나의 좋은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동생은 어느 순간부터 삶을 힘들어했다. 처음엔 그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 뭐든 주고 싶었다. 사랑이든 희망이든 기회이든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내게 소중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랑은 고갈되어갔다. 쩍쩍 말라비틀어진 내 가슴으로 밤낮이 바뀐 동생이 아침나절까지 잠에 든 것을 보며 외출을 해야 할 때, 그리고 동생의 책상에 올려진 우울한 책들을 볼 때마다 괴로워 미칠 것도 같았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내 곁에 그 아이의 삶을 두는 것이, 그 아이 곁에 비좁은 내 삶을 두는 것이 가끔은 너무 숨이 막혔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어쩌면 그 아이보다 더 깊은 우울이 내 안을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느 순간 어떤 작은 나사 하나가 풀리면 홱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이를 악물고 견뎌가며 훌쩍 도망쳐버리고픈 우울과 슬픔 곁에서 나는 하루하루 아르바이트와 학업으로 대신 도피했었다.


궤도이탈의 아픔

세영이 역시 오랫동안 희수의 곁을 지킨다. 희수의 잠을 깨우고, 희수에게 밥을 먹인다. 그리고 희수아줌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음식들을 복원하기 위해 레시피 노트를 같이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수의 시간은 그로부터도 아주 오랫동안 멈춰있을 뿐이었다. 세영의 키는 계속 자라고 세영의 궤도는 계속해서 새로 그려져 나가려 했지만 희수는 여전히 블랙홀 속이었다. 그리고 점점 세영은 무력해져가야했다. 희수를 살게하기 위해 같이 만들기 시작한 레시피노트는 점점 세영의 삶을 옥죄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허공에 답없는 질문만 던질 뿐이었다.


“아줌마, 제가 뭘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러던 와중에 세영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과목을 공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늘 죄책감이 세영의 가슴에 요동쳤다. 희수는 저만치 뒤에 남겨두고 나 혼자 즐거워도 되는 걸까? 동생은 삶을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나 혼자 이만치 앞서나가도 되는 걸까?      


그런 세영에게 시현이 다가온다. 물리 문제를 간단히 알려주듯 그는 세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이 다 같이 돌고 있는 궤도에서 나만 떨어져간 느낌때문에 그도 오랫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잠시 세상의 궤도에서 이탈해있는 그 시간을 통해 아주 느리지만 자신을 찾고, 자신의 궤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시현과 세영은 같이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김시현이 앞서갈 때도 있고 내가 앞서갈 때도 있었다. 가까운 곳으로만 돈 적도 있고 제법 먼 곳까지 돌아온 적도 있었다…마치 궤도를 그리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멀리 혹은 가깝게. 크게 혹은 작게. 나는 그 아련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질서있는 사랑

결국 두 소녀는 서로의 궤도를 지키기 위해 잠시 멀어지기로 한다. 그리고 희수는 세영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세영아, 내가 충분히 아파할 수 있도록 기다려줘서 고마워. 넌 나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어. 하지만 이모 말이 맞아. 넌 우리 엄마가 아니잖아? 넌 고작 열여덟살 소녀일 뿐이야. 난 엄마가 없는 열여덟살 소녀고. 우린 그렇게 살아가야 해. 우리 자리에서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도 각자만의 궤도가 있다. 그리고 이 우주 속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궤도를 바꾸어 내 궤도에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궤도와 질서, 그 사람의 리듬과 계절을 기다리고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의 궤도를 돌며 앞서기도, 뒷서기도, 조금 더 멀어지기도, 조금 더 가까워지기도 하면서도 묵묵히 곁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고독과 슬픔에 불현듯 멀리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람 옆자리라는 나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곁을 지키는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도우려는 사랑과 선한 마음이 대단해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 결과도 회복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같이 느껴지고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우리 모두는 마치 인생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 고작 열여덟살 소녀와도 같다. 우린 그저 각자의 삶을 사는, 살아야만하는 인간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을 구원해내고도 남을 신이 아니기에 각자의 인생과 궤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과 같이, 인생에 한계를 긋는 일도 나쁘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때로는 좋은 일이다. 남을 돕는 일에도 한계를 그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한계를 긋는 일은 대단해보이지 않는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무언가를 포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세계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질 여유를 허락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다.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할 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한 인생을 살며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도, 나의 물리적인 육신을 벗어나 하늘을 날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도 없다는 진실, 나에겐 그저 하나의 인생, 한 개의 선물이 주어졌을 뿐이라는 진실을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인간일 뿐이고, 나에게도 지켜내야 할, 살아내야 할 나만의 궤도가 있는 것이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의 궤도를 이탈하면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의 반쪽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너무 뜨거운 사랑에 못이겨 상대방에게 내 손에 들고 있는 단 하나의 열매를 줘버리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상대방이 있기 전에 ‘나’가 있다. 나 자신에게도 시간을 주어야 한다. 내가 큰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열매를 따주고도 나에게 많은 열매가 남아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 않는 자유를 되찾아가고 싶다. 내 궤도를 이탈해 함부로 동생의 궤도에 가려고 하거나, 동생의 궤도를 일그러뜨려 내 궤도로 옮겨놓으려는 일은 이제 정말 그만 하고 싶다. 내 궤도안에서 꿋꿋하게 도망가버리지않고 동생의 궤도를 지켜봐주고 싶다.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더 오랜시간동안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곁에서 필요하다면 가끔 그 아이의 잠을 깨우고 또 밥을 먹이고 싶다. 나의 방식이 아닌 그 애만의 방식으로, 온전히 삶을 사랑하기를 온힘을 다해 빌어주고 싶다.


나는 내 우주선에 달린 끈을 붙잡고 이 여행을 즐기고 싶다. 나의 한계를 끌어안아 자유가 더 깊어지고 싶다. 그러고도 더 넓어진 궤도로 동생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궤도 이탈의 아픔, 그리고 시대의 아픔까지 끌어안고도 넉넉한 품이 되어보고 싶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딱지에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하고 좋은 소설이었다. 장르를 뛰어넘는 경험은 앞으로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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