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와 사랑하기
엊그제 새벽이었다. 나는 자려고 누우면 가끔 마치 죽음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주로 정말 정말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 그런다. 좋은 감정이 막 그렇게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는다. 대개는 먼지처럼 홀연히 없어져버리고 싶다는 감정이다. 그날도 정말 기억도 나질 않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올라왔다.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좁은 박스안에 갇힌 것처럼 갑자기 숨이 턱하고 차올라서 막혔다. 내 나이, 학교, 알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 신체, 가족, 집…이런 것에 갇힌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 삶안에, 지구안에, 우주안에, 차원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정말 어디로든 도망칠 방법도 숨통을 틀 방법도 없는 엄청난 질식이었다. 물론 몇초의 순간이었지만 잊지못할 충격이었다.
이건 또 무슨 종류의 공황일까? 세상의 모든 소음과 조명이 꺼지고 주인공의 진짜 속마음이라도 들은걸까? 그 후 며칠째 잔잔한 우울이 이어지는 중이다. 삶이 항상 기뻐 미치겠는 날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먼 어린애인가보다.
데미안에 대해 글을 쓰고 고치다가 영 글이 안써졌다. 안써지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글이 꼴보기가 싫었다. 쓰다만 글을 먹다만 빵처럼 남겨두고 한숨만 쉬다가 우연히 옛날 시트콤 하나를 다시보게 됐다. 지긋지긋하고 자신을 억누르는 일상을 떠나 휴양지로 이민을 가는 여자. 그 여자가 손에 쥔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너무 익숙한 표지였다. 그 책을 준 남자는 떠나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걸까.
대부분의 사람은 알에서 새로 태어나고 싶어할 줄만 알지 그전에 한 세계가 산산히 부서지는 처절한 죽음과 종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산다. 싱클레어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한쪽에는 부모의 보살핌과 ‘아름답고 선한’ 신앙의 가르침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보호해 줄 자가 아무도 없는 황야와 어둠의 세계, 욕설과 거짓말, 탐욕과 협박의 세계가 있었다. 소년 싱클레어는 이 두 세계 속에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배우며 완전한 안전과 선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된다.
이분법으로 대유되는 사회의 모든 억압은 인간을 길들인다. ‘선’이라 불리는 행동은 스스로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고 ‘악’이라 불릴 수 있는 행동이나 삶은 스스로에게 죄책과 자책을 부여한다. 그런 이에게 자유는 사치다. 마치 기계가 작동하듯 그저 주어지는 의식과 감정을 복사할 뿐이다. 이러한 억압에 따라 사는 삶은 사실 사회에는 크게 실이 될 것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에는 득이다.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개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인생 끝에는 무엇이 남게 될지 알 수 없다.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이었던 미적지근한 궤적만이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이 대사를 이해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이해하고 나니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선이든 악이든 우리가 아는 것밖엔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낼 수가 없다. 엘리아데도 말했었다. 성과 속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선과 악이 있다고. 그러니 내 안에 든 무언가로 자극을 받았을 때마다 자동인형처럼 외부에 반응해서는 안된다. 내 안으로 시선을 돌려 내 안의 무엇이 나를 자극하는가, 무엇이 내 안에 들어앉아있는가 생각해야한다. 내 안에서 어떤 것을 선 또는 악으로 규정하는 그 사고의 근원에 의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데미안이 제시했던 가인과 강도에 대한 새로운 시선, 성서의 재해석 역시 그동안 개인이 신적으로 추앙했던 모든 것의 근간을 흔드는 작업이다.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모든 억압과 비본질을 떼어내면 남는 나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끈질기게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은 우리에게 큰 에너지와 시간을 요한다. 대체로 많은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의 많은 부분에 이미 지쳐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꺼린다. 이분법을 따르는 것 역시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로 살아있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생기와 생명력은 사회나 타자가 딱지붙인 금기에 의문을 던지는 힘에서 드러난다.
세계에다 그 무엇을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한 세계를 깨고 나온 아브락사스는 거짓 자유가 아니다. 그저 ‘성취’, ‘성공‘ 혹은 ’한 방‘이라 불릴만한 것을 위한 치열한 노력, 자기개발, 자아개선이 아니다. 이 한 세상, 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어떤 위세를 펼치느냐가 아니다.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물음과 대답이다. 나는 진정 왜 존재하는가? 그런 칼날같은 질문들에 자신의 거짓 자아, 아무 의식도 없이 쉽게 살고자 하며, 사회의 멸시나 비판을 피해 부모의 품에 안온히 머물고자 하는 자아가 죽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관찰해본 바로는 그런 죽음은 대게 이런 과정을 거쳐야한다. 사람들(가족포함)의 비난과 눈초리, 소문, 손가락질과 혀차는 소리, 배척과 고립.
초라하고 나약한 자아를 화려한 장식들로 아무리 꾸며봐도 변하는 건 하나도 없다. 밤이 오고 또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다 그 모습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중에 삶에 던지는 근원적 성찰은 본질로 되돌아갈 최초의 계기를 제공한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삶에 달라붙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을 하나둘씩 떼어낸다. 내가 그동안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들, 그저 당연히 받아들였던 것들, 덮어놓고 진리로 추앙했던 것들에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할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거야.
그들은 한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거야.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은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그곳은,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와 같이 걷기에는 매우 좁은 길이다. 그 깊은 성찰은 홀로 가야하는 길이다. 그 좁은 길에는 자신의 의식 가장 본질까지 끈질기게 추적해 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모든 비본질을 떼어내고 가장 근원의 본질을, 얼마나 초라하고 비열한 모습일지라도 꼭 한번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찰의 맛은 싱클레어가 말처럼 떫고 가혹하다. 절대적인 고독. 질식해버릴 것같은 외로움. 그것이 책임의 맛이다.
그러한 고독만이 역설적이게도 타자와의 진정한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타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언제든지 끊어져도 아무 결실없는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무르익은 관계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관계는 본질 대 본질로 서로가 만나야만 가능하다. 알 안에 갇힌 채 서로 사랑할 수는 없다. 싱클레어는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운명앞에 공동체 모임에 속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치열한 고민으로 자신만의 본질을 탐구하는 한편, 사회와 시대의 운명을 공동체와 고뇌하는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온전히 성숙해가는 것이다. 도피의 일환이 아닌 온전한 자기자신들끼리의 만남이 그제서야 이루어진다.
내 귀가 막혀있을 때는 누구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때는 마음을 열고 ‘나‘ 밖으로의 여정을 감행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깊은 본질로 타인을 만날 것, 내 귀에 들리는 것만 듣는 게 아니라 진정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것, 그리고 사랑할 것. 그러한 것들로 이루어진 성장만이 결국 그 끝이 처참한 전장의 죽음일지라도 시대와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게 했다.
한 세계가 산산히 부서지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진 듯한 그 때, 진짜 사는 삶이 다시 시작된다. 진정으로 죽고 다시 태어난 아브라삭스는 또다시 죽는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한 태어남 그 후에 오는 죽음은 더이상 이전 의미의 죽음이 아니다. 진정으로 한번은 살아봤기에, 후회없는 죽음이고 진짜 살아본 삶이 되기에 그것은 죽음이 아닌 완결과 완성이자 마지막 휴양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완성은 스스로부터 우러난 진정한 사유만이 가능하게 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누군가는 이미 이미 있으니까.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파티쉐가 되거나 연기자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나 역시 그런 허울좋은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미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을 걸친 임무라는 것을 알겠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같은 그런 운명이 아닌 단 하나의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 나는 그게 그토록 무겁고 무서워 이리저리 도망을 다닌 것이었다.
자기자신이 되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생각했었다. 자기자신을 소비의 종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이런 시대에 끊임없이 자기자신이 되라는 말은 일종의 폭력이다. 어떻게 되라는 말인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진부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진부하기에 거기에 진실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부하다고 치부해 놓친 것들이 내겐 너무 많았을지도 모른다.
헤세도, 그 시트콤의 감독도, 알마저 깨뜨려내는 개인의 힘, 자각의 중요성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극으로 묘사된 것처럼 많은 부분 그 개인의 자각이란 것은 ‘사랑’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남에게서 발견한 악을 자기에게서도 발견하고 깊은 고독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결국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일생에 한번쯤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 자기를 사랑하든 남을 사랑하든 결국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주 작은 소리일지라도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 시류에 발맞춰 사는 것보다 낫다.
밖에서 가해지는 힘은 알에게 죽음을 뜻하지만, 안에서 가하는 힘은 알에게 탄생을 뜻한다는 말처럼 나는 내 삶의 모든 비본질이 가하는 힘을 깨닫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고자 한다. 진부해 보여도 다시 그렇게 살아볼것이다. 언젠가 나의 안에서 가하는 이 작은 성찰의 힘이 모여 알의 껍질이 깨지고, 나의 작은 세계가 깨지고, 이제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은 때에,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끝이 무엇일지는 나조차 모르겠다. 시인이든 광인이든 화가든 예언자든 접시닦이든..마지막 휴양지에 가기전까진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바라볼 뿐이다.
읽을땐 어렵다는 생각에 읽다 멈추다를 반복했는데..이렇게 쓰고보니 꿈보다 해몽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종잡을 수 없던 생각들을 정리한 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