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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Sep 28. 2021

영화 [머니볼]

인생을 즐기라는 말: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살아라

사는게 재미없고 버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영화를 한 편 봤다. 이럴 땐 내 인생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는게 나만의 방법이다. 빌리라는 이 주인공은 영화 내내 아주 진지하다. 그에게 야구는 인생의 전부다. 하버드 전액장학금을 포기하고 프로야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게 야구는 인생을 건 게임이었다. 그러나 한번도 빌리는 그 게임에서 보란듯이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오히려, 늘 패배자였고 그는 패배의 아픔에 도무지 적응해내지 못하는 쪽이었다.


그는 가난한 구단의 단장이다. 선수들을 스카웃하고 교체해 팀을 꾸리는 일을 한다. 별볼일없는 구단을 일으키고자 했지만 스타구단에 맞서 유명하고 능력있는 선수들을 데려오기에는 벅찼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피터라는 인물을 만난다.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꽤나 통찰력있는 선수분석가였다. 곧 팀이 된 둘은 사상최초 ‘숫자로 야구하기’에 도전한다. 유명한 선수부터 유명하지 않은 선수까지, 그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선수부터 저평가되어왔던 선수까지. 각 선수마다 수치화한 출루율을 가지고 팀의 목표 숫자에 맞도록 선수단을 꾸리는 것이었다. 어떤 사생활이 있는지, 다친 적이 있었는지조차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건 출루율이라는 숫자였다.



당연히 새로운 도전에는 격렬한 반대와 저항이 따른다. 모든 이들이 미쳤다 얘기하고, 억지로 짜깁기한듯한 팀의 플레이는 계속 실패하고, 심지어 감독조차 빌리를 더이상 신뢰하지 못한다.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아빠의 직업을 걱정하기에 이른다. 계속되는 실패와 빌리의 퇴출을 목전에 두고 빌리는 다시한번 팀을 개편한다.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숫자는 정확하지만 선수들의 근본적인 태도까지 담고있진 못했다. 야구에 대한 일말의 진지함도 없이 연이은 참패에도 대기실에서 노래를 틀고 몸을 내두르는 백치같은 선수는 무참히 퇴출시키고, 감독이 자기 말대로 선수를 세울 수 밖에 없게끔 다시 선수단을 구성한다. 마지막 기회였다. 피터는 빌리의 성급함과 단호함에 오히려 걱정한다. 당신 그러다 영원히 짤릴 수도 있어요. 그 때 빌리는 말한다. 어쩔 수 없다고. 대학보내야 할 딸을 둔 실직자 아빠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I think the question we should be asking is, do you believe in this thing or not.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거센 반대를 무릅쓰는 도전가스타일은 못되어서 오롯이 일방통행인 빌리에게 쉽게 공감하진 않았다. 저 사람은 정말 뭘 믿고 저러는걸까. 혹시나 그의 기발한 방식이 통하기 시작한다면 재미없어질 것 같았지만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너무 실패만 하니까 언제쯤 방법이 먹힐까 기다리게 되었다. 새로운 방식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수진을 개편하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다. 숫자로도 야구를 할 수 있겠지만, 숫자로’만’ 야구를 할 수는 없다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한 빌리는 선수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화하고, 동기를 준다. 실제로 후반부로 갈수록 빌리의 팀은 많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중요한 것은 더이상 경기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루저라는 역할

빌리는 원래 선수들의 장거리훈련에도 결코 따라가지 않는 단장이었다. 선수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생기면 팀에서 내보내야할 때 힘들다는 변명같은 말을 남겼었다. 뿐만아니라 팀의 실전경기를 직접  관람하지조차 않는다. 경기가 시작되면 그는 경기장에서 모습을 감춘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팀은 승리도 하고, 더 큰 경기에도 출전하게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역할안에 빠져있었다. 멋진 단장이지만 야구에서 이미 한번 크게 실패한 루저라는 역할. 승리를 쫓고 패배를 두려워해야하는 역할. 그는 하버드까지 포기하고 프로야구의 길을 걸었지만 성공한 선수가 되진 못했다. 그때부터 씌여진 실패자라는 그림자는 빌리의 삶을 무겁게 덮고 있었다. 그는 팀의 승리를 너무나 원하고 실패는 너무나 싫어했지만, 그래서 야구에 대한 로망을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진정 야구 그 속에 들어가진 못했다. 야구안에, 어쩌면 삶안에, 완전히 들어가 그것을 즐기지는 못했다.


인생을 즐겨라

어린시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인생을 즐겨라, 즐기는 자를 이길 자가 없다, 이런 종류의 즐김을 강요하는 천하태평한 말들이었다. 삶은 고군분투해야 겨우겨우 사는 것 아닌가? 그럼 고통을 즐기란 뜻일까? 참 싫고 이상한 말이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그런데 1년 2년이 지나고 인생의 몇몇 큰 굴레들을 통과해나오고(가장 컸던 건 입시지옥), 인생과 자아에 대해서 좀 덜 진지해지는 법을 배워갈수록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게임 안에 최선의 선택지같은 것이었다.


막이 오르고 인물이 등장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무대 위다. 대사를 잠깐 까먹었거나 의상에 실수가 있다고 해서 돌연 퇴장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웃거나 울거나,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대사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 말이나 하거나, 맘껏 어색해하거나 자연스러운 척 능청을 떨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하거나 아무튼 무대위에서 한 극을 끝내는 것이다. 어차피 원래 극이 무엇이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도 모른다. 일단 막이 오르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지는 것이다.

 



빌리 어린시절의 그늘이 영화에 더 자주 장면마다 겹쳐지기 시작하며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주인공이 해결해야하는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늘 그렇듯 마지막에 남는 문제는 내적인 문제다.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내 속 안의 문제. 빌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 제의를 받게 된다. 그가 대단한 승리를 결국 쟁취해낸 것은 아니지만, 그의 투지와 혜안을 지켜보고 야구계에 새로운 방식이 필요함에 공감한 것이다. 사상최대의 거액 단장직 제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작은 야구단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런 선택을 내리며, 그런 삶을 살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아빠의 뒷모습을 향해 옥구슬 같은 딸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며 막이 내린다.



You’re such a loser, dad

Just enjoy the show



중학교때 읽었던 어떤 소설책안에, 10년이 다 되도록 잊히지 않는 표현이 있었다. 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링 위의 피흘리는 복서라는 표현이었다. 승자든 패자든 일단 모두 두들겨 맞는다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 표현의 깊이를 체감하고 있다. 아빠의 삶을 걱정하던 딸은 그렇게 아빠가 안심을 시켰지만 진실을 알고있던 모양이다. 자신의 노랫소리로 아빠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빌리가 평생을 두려워하던 그것. 그러나 한번 직면해버리고나면 별것도 아닌 그것.


You’re such a loser.

내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그래 너 루저야. 루저맞아. 이제 그만 인정하고 그냥 살어. 그래도 돼. 야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인생에서 잊지못할 실패도 있었고 또 잊지못할 성공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나 역시 내가 루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어린시절, 너는 특별하단다-이런 책을 읽고 정말 내가 내 주위로 태양이라도 도는 것처럼 알고 살아왔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이 세상은 얼마나 나에게 반복해서 가르쳐주었는가. 너 따위 인생 별 볼일없어, 특별하지 않아.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런 마음이 생겼다. 혹시나 내가 루저라 해도, 앞으로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해도 뭐 어떤가. 그게 뭐 대순가. 문제였던 것들이 문제가 아니게 되는, 마치 한단계 레벨업을 해서 이전 장애물은 거뜬히 뛰어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영화의 감성이 좋았다. 너무 열광적이거나 극적인 반전이 나오거나 어딴 미덕을 추켜세우거나 하지않았다. 어떤 주제나 생각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여러모로 담담한 영화였다. 루저라는 의식에 대한 영화의 언어도 꽤나 차분했다. ‘내가 알고보니 루저?!’, 혹은 ‘루저라는 생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어!’ 등의 방식으로 울부짖거나, 사회를 탓하거나, 스스로를 불쌍히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그저 어떤 바꿀 수 없는 사실 하나를 담담히 관찰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성장하는 것이다. lenka의 the show라는 노래는 빅뱅의 루저나 아니면 자우림 노래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동화같이 밝고 경쾌했다. 진실에 대해 노래하는 참 산뜻한 방식이다.

 

즐겨라, 그냥 살아라

노래의 가사처럼, 정말 가끔은 인생은 미로같다. 온갖 변수와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혼돈 속에 있어야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어떤 대단하고 특별한 걸 쫓아 헤메기도 하지만 모두들 그저 같은 하늘 아래 공짜입장권 같은 걸 하나 받아 한 세대를 살다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또다시 나를 다독인다. 너무 깊게는 생각하지 말자. 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내가 다 알도록 되어있지도 않고 다 이해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가진 것 하나없이 스타구단과 맞서는 것처럼 부조리하고, 영화같은 노력을 해도 아무 결실없는 무딘 세상. 가끔은 재미도 감동도 없어서 꾸역꾸역 영화관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것처럼 살고있다해도, 내 극이 다 망해버린 것만 같아도, 한번쯤은 그냥 웃어보여야지. 함부로 퇴장해버리진 않아야지. 기다리다보면 이 티켓을 시한폭탄이 아니라 선물처럼 여길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너무 긴장한다면, 너무 걱정한다면 쇼를 즐기진 못할거다. 그러니 나는 이제 걱정을 떨쳐버리고, 그냥 살아야겠다. 기쁘게, 슬프게, 재미있게, 또 재미없게 그냥 살아야지.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티켓을 들고 쇼를 즐기는 것이다.

“그냥살어”. 즐기라는 말은 대충 이 네 글자 언저리에 있는 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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