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에서 발견하는 인류가 잃어버린 그것
Midwives and winding sheets
know birthing is hard
and dying is mean
and living is a trial in between.
Why do we journey, muttering
like rumors among the stars?
Is a dimension lost?
Is it love?
산파와 수의는 안다.
태어남은 힘들고
죽음은 비천하며
삶은 그 중간의 시련임을.
우린 왜 여행하는가
별들 사이의 소문처럼 중얼거리며.
하나의 차원을 잃어버렸나?
그것은 사랑인가?
읽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히던 시가 있다. 숨이 턱 하고 막히고 나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뭔가를 압축하고 농축해서 진짜만 꾹꾹 눌러담은 듯 했다. 시를 처음 본 그 무렵 나는 삶과 죽음 그 어딘가 어떤 궤도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고민들 사이를 방랑하고 있었다. 마야 엔젤루란 사람은 그런 인간의 공황과 혼란에 대한 아주 타당한 의문을 제시한다. 상실된 차원과 상실된 사랑에 대한 의문이다. 그리고 그 상실된 것의 실체를 나는 헤일메리 호에서 만나게 된다.
책 속 어느 날, 과학자들은 조만간 지구가 망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한 우주선이 발사된다. 헤일메리 호에서 인류의 운명을 떠안게 된 건 한 평범한 과학선생님이었다. 그러나 편도행 지구 구원 열차에 탑승하겠다는 건 그 스스로의 주체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지구를 구하기엔 너무 평범했다.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죽음에 공포를 느끼고 외로움에 겁을 먹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지구구하기 임무를 억지로 부여받은 우주선 한복판에서, 남자는 불현듯 깨어난다. 기억을 모두 잃은 그는 인류가 오래 앓아왔던 실존의 문제부터 마주해야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의 문제는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름부터 국적, 직업까지 본질의 본질부터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그의 동료들은 이미 비행선 안에서 모두 죽었다. 그들 셋은 같은 임무를 공유하는 ‘한 패’라 표현됐었다. 이쯤되니 이 거대한 지구 구하기 이야기가 그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이라는 같은 배에 탄 우리들. 돌아보면 한 패였던 이들은 어느새 이미 떠나가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남자는 감정에 휩싸일 여유도 없다. 끔찍하지만 동료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외로운 인간에게, 그런 외로운 삶에 찾아온 것이 외계인 에리디언 로키였다.
가끔 우리는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말로도, 어떤 감정으로도 내가 느끼는 정확한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깊은 고독이다. 로키와 그레이스 역시 그 문제를 맞닥뜨린다. 어떤 장비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고 서로에게 닿고 싶어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 로키가 사용한 건 작은 원통이었다. 뜨겁고 암모니아 냄새가 풍기는 작은 원통. 그것은 너무 오랜 시간 혼자였던 두 종족을 서로 이어주는 바통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둘은 다른 생김새, 다른 시간, 다른 단위, 다른 온도와 기후. 그리고 다른 피와 다른 근육, 다른 식단을 마주한다. 로키는 인간의 몸이 거의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레이스는 에리디언족이 음식을 받아들이는 그곳으로 배설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면을 모르는 이에게 수면을 설명해야 했고 색깔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색깔을 설명해야 했다. 두 생명체의 접촉에는 많은 마찰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겪을만한 가치가 있는 마찰이었다. 그 둘은 모든 과정을 함께 통과해낸다. 오랜 노력 끝에 서로의 언어체계를 이해하고 마침내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서로의 잠을 지켜보고, 서로가 처한 문제상황을 이해하고, 고통에 공감한다. 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서로의 깊은 고독까지 공유한다. 그들은 진정한 ‘한 패’였다.
결국 일련의 스토리 끝에 그레이스는 지구를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된다. 내가 죽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완전히 다른 종을 살려내겠다는 그 주체적인 결정은 이타성의 도착지점을 보여준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기까지 이타적인 인간의 한 결정을 통해 다른 종까지 살아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타성이 다시 그레이스를 살려냈다.
그레이스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평범하게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과학을 사랑했고, 자신과 아이들이 사는 지구와 지구 공동체를 사랑했다. 그런 평범한 사랑, 평범해도 충분한 사랑이었기에 어떤 강압으로 이루어진 상황 속에서도 그는 결국 길을 찾아낸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일지 몰라도 결말이 참 내 마음에 들었다.
저 멀리 우주선 밖에 있는 외계인 같은 속내를 가진 가족과 이웃을 만나려면 ‘나’라는 작은 우주선 밖을 나가야 한다. 그들과 진짜 접촉하기 위해서는 공허한 암흑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주 속 비행선같은 내 작은 육신은 아무 쓸모없이 우주 한복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러나 우주선 밖을 한 발짝만 나가보면 거기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죽음과도 같은 고독을 이겨낼 가능성. 어쩌면 인류를 구할 수도 있는, 다른 종까지 살려내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 나는 그 주제를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이라 읽었다. 물론 사랑을 쓸데없이 절대화하는 사랑만능주의는 딱 질색이다.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말하는 것도 사실은 어려워야 맞다. 사랑으로 대변되는 자기 희생 본능은 종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주기에 오히려 이기적인 길일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사랑이 뭐든 간에 우리가 뭘 좀 잃어버린 건 사실이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그런 것들을 다 통칭해서 대충 사랑이라 부르는게 아닐지. 지금은 그런식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과학자 페르미는 이런 종류의 상상력을 비웃었었다. 외계인이고 나발이고 지성이 있는 모든 것은 자멸할 뿐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별 볼 일 없는 한국인 대학생으로서 내가 그에게 들이밀 수 있는 것은 나의 믿음 하나다. 지성체는 자멸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한.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내는 한. 찰스 부코스키가 말한 것처럼 서로를 뜯어먹고 이용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진짜 깊고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한.
우린 서로에게 외계인과도 같다. 어느 별에서 왔는지 서로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가늠하지조차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도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원통같은 게 필요하다. 서로가 어떤 온도와 어떤 기체 속에서 살아가는지 아주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서로에게 닿기 원하는 마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처음에는 그 마찰이 너무 뜨거워서 손을 데일지도, 혹은 너무 차가워서 동상에 걸릴지도 모른다. 서로 완전히 다른 언어, 다른 진법, 다른 중력과 다른 파장대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잠깐의 대화에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수십 개의 새로운 단어를 언어 사전에 추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온갖 다름에서 오는 역겨움을 우리는 서로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열기와 냉기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도킹하는 짧은 마찰의 순간만 지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가까워져 있을지 모른다. 서로의 고독을 마침내 공유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고독을 보게 된다면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 사랑이라면 결국 우린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게 될 것이다. 서로의 차원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게 될 것이다.
책얘기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생각이 중요하다는데 나는 내이야기쓰기가 너무 어렵다. 할 수만 있다면 내얘기말고 책얘기만 하고싶다. 이런식으로 첨언만 하는게 내 한계인가 글쓰기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