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

더이상 다른 과거를 바라지 않을때

by 에밀리

그런 영화가 있다. 뇌리에 박히는 장면 하나 때문에 대체 저런 장면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영화. 그런 영화는 바쁜 일상 속 시간을 쪼개 결국엔 찾아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어떤 노래가 너무 충격적일 정도로 좋아서 그 사람의 모든 노래를 다 찾아보게 될 때처럼. 어떤 책이 너무 감명 깊어서 그 사람이 쓴 책을 다 찾아보게 될 때처럼. 어떤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그 사람이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밤새 궁금하게 될 때처럼 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Sound of Metal) <아래부터는 스포주의>



자유로운 드러머의 삶

루벤은 메탈 밴드 드러머다. 올리비아와 전재산인 캠핑카를 타고 바람처럼 살아간다. 둘은 서로의 생존의 동아줄처럼 서로만을 붙잡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벤의 귀가 안들리기 시작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와중에도 주위 현실은 기어코 점차 변해간다. 올리비아는 떠나고 밴드 공연도 더이상 할 수가 없다. 그러던 중 교외의 한 청각장애인 공동체를 찾게 된다.


I can't hear you.
I'm fucking deaf. I'm fucking deaf. No fucking hearing.
What I need is a fucking gun in my mouth


Desperate man

처음 이 영화를 알게된 건 sns에 떠돌아다니던 영화 속 한조각의 장면 때문이었다. 루벤이 처음 청각을 잃고 여자친구와 대화를 하던 장면이었다. f-word를 남발하며 루벤이 외치던 건 내가 지금 원하는건 죽음뿐이라는 말이었다. 눈에는 절망과 혼란이 가득한 채 흥분한 상태로 내뱉어진 대사는 완전히 다른 뜻을 암시했다. 그가 얼마나 생을 갈망하는지. 완전히 가득찬 생을 얼마나 빼앗기고 싶지 않았는지.


청각장애인 공동체 속 루벤


공동체에서 배운 침묵의 힘

청각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간 루벤은 점차 생활에 익숙해져간다. 아이들과 함께 수화를 배우고, 또 아이들에게 드럼을 가르쳐준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공간에서 먹고, 자고, 시간을 보내며 루벤의 삶은 청각없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간다. 공동체의 설립자 조는 루벤을 불러 하나의 임무를 제시한다. 매일 아침 윗방에 홀로 올라가 책상에 고요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 루벤은 하루하루 임무를 수행한다. 어떤 날은 고요히 자기를 들여다보다 화가 치밀어올라 책상을 내리치고, 소리치고, 욕하고, 빵조각을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수고, 자조하고. 어떤 날은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않고 종이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끊임없이 써내려 나간다. 견딜 수 없어지면 쓰고 또 쓰고, 멈추지 않고 써서 다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쓴다.


루벤은 책상에 앉아 무엇을 느꼈을까

그러던 어느날 루벤은 공동체를 떠나 수술을 받는 선택을 한다. 다시 무언가를 듣기 위해 머리에 장치를 심는 수술이다. 수술비를 대느라 전재산인 캠핑카를 처분한 루벤은 얼마후 다시 공동체에 돌아와 잠시 머무를 수 있는지 묻는다. 루벤은 자신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비극도, 머리가 아플정도로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 수술을 받고 돌아온 루벤의 눈은 청각을 잃었던 직후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절박하고 다급한 눈이다. 그런 벤에게 조는 묻는다. 매일 아침 홀로 앉아 무엇을 느꼈느냐고.



I wonder,
all these mornings you've been sitting in my study, sitting,
have you had any moments of stillness?
Because you're right, Ruben.
The world does keep moving, and it can be a damn cruel place.
But for me, those moments of stillness,
that place, that's the kingdom of God.


Serenity is no longer wishing you had a different past

삶이란게 원래 그렇다는 걸 저 깊은 심연으로 납득해버린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삶이 내게 레몬조차도 아닌 온통 떫고 쓴 먹을수조차 없는 맛을 주는 것 같은 날에는 늘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망연히 시간을 지나보냈다. 고요함의 순간이, 그런 고요한 시간과 공간이 내가 누리는 천국이라는 조의 대사앞에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의미없는 축배와 성대하고 우렁찬 무언가를 바라고 기다리기에 앞서 나는 한번이라도 고요한 침묵속에서 깊은 만족을 누렸던 적이 있는가. 그 조용하고 외로운 공간에서 생각은 심연으로 내려가고 모든 감정은 앙금처럼 가라앉아 맑은 의식 속에서 내가 가진 것들에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감사해본 적은 있었던가.




담담한 이별

문학작품의 묘미는 인물들이 내리는 선택과 결단의 힘에서 온다고 했던가. 무엇보다도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형편없는 수술을 받고 반쯤 소음일 뿐인 소리를 다시 듣게 된 루벤은 올리비아를 다시 만나러 가지만 부유한 아버지의 품 속으로 들어간 올리비아는 이제 예전의 여자친구가 아니다. 메탈음악이 아닌 클래식을 꾀꼬리처럼 노래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루벤은 그제서야 예전같지 않은 현실을 직시한다.


다음날 루벤은 조용히 올리비아를 떠나 길을 나선다. 주인공이 머리에 단 청각 보조장치를 떼고 다시 고요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평안은 더이상 당신에게 다른 과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불안에 떠는 우리의 마음엔 수십가지 변수가 뒤엉켜 다른 과거와 다른 미래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그럴수록 잃는 것은 현재의 감사와 기쁨이다. 당연하지 않게 주어진 것들은 그렇게 또다시 의미없이 우리 손을 떠나고 결국에 생의 끝에 남는 건 후회와 아쉬움 뿐인 것이다.




단 하루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얘기가 오갔다. 이게 중요해.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이거야. 수많은 가치들이 서로 서로를 가르지르며 생의 한복판에 너저분하게 늘어져 놓인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에 가야 내가 찾고 있는게 있을 것인지. 아니, 내가 찾고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조차 어느새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어느새 하루의 가치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나는 패배한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몸을 누인다.


작년 겨울, 그렇게 처음으로 공황이 나를 덮쳤다. 그 이후 좋은 날, 나쁜 날, 더 나쁜날, 특별히 더 나쁜 날도 있었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고 계절들도 바뀌었다. 숨이 조금씩 쉬어지고 주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지금에서야 나는 나의 잃어버린 리듬을 깨닫는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게 아닌데...이제서야 잃어버린 내 것들을 되찾고 싶어진다.


잃어버린 리듬, 잃어버린 미소를 찾기 위해 나는 다시 살 것이다. 이번에는 행복해 미치겠는 웃음이 아니어도 괜찮아. 터져나오는 기쁨을 참지못해 깔깔깔 웃음이 나 주변사람까지 웃게하는 그런 게 아니어도 괜찮아. 그저 내가 내 리듬을 살 때 나오는 잔잔하고 안전한 느낌이면 충분하다. 내 손에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동과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에 안심이 되어 그만 피식,하고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정도여도 충분하다. 그래서 또다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나를 덮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 먼지더미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하는 믿음에서 우러난 힘으로 주어진 생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정도로도 정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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