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공존이 어려운 이유.
그는 도망쳤고, 나는 멈춰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시간만이 우리 사이에 쌓여갔다.
그가 어떤 선택이나 책임을 결정하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 시간들이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
하루 내 내린 결론은 또 하루가 지나 흔들렸다.
그가 첫남자였고 누군가와 헤어짐을 경험해 본 일이 내겐 없었다.
그것이 쉬웠다면 그와 결혼을 선택조차 하지 않았겠지.
이별이 어려워 평생 그것을 접어 두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혼이었다.
그가 너무 괴로웠지만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은 마치 내게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에서야 알게됐지만 그것은 트라우마본드라고 했다.
상처에 얽혀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이 죽음처럼 느껴지는 증상.
그가 내게 처음 주었던 달콤함을 잊지 못해 다시 오지 못할 그 달콤함을 기다리며
나는 희망고문에 젖어있었다.
그저 이별을 뒤로 미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참고 맞추면 이별은 오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가 결혼을 통해 책임감을 갖고 변화되리라 믿었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적어도 무책임하게 살지 않을거라 믿었다.
나의 예상과는 너무도 다르게 흘렀지만..
그는 반대로 내가 결혼을 하면 그에게 순종적인 아내가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역시도 예상과 다르게 독립투사같은 나의 모습이 그를 질리게 할 줄 몰랐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공부하던 중 티비에 나오는 한 부부를 보았다.
남편은 나르시시스트임에 분명했다.
생존자(나르시시스트의 희생자를 생존자라 지칭하고 싶다.) 인 그의 아내는
이미 지쳐 모든것을 순응하는 상태였다.
감정을 잃은 채..
나 역시 자기중심적인 딸아이와 남편 사이에 지쳐
점점 감정을 잃은 사람 처럼 지낼 때가 있었다.
차라리 감정을 느끼지 않는 쪽이 편했다.
모든게 지쳐있었기에..
그렇지만 그가 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때면 전투력을 살아났다.
지독하게도 그를 바꾸겠다고 혹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물고 뜯었으니 그도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티비속의 저 아내처럼 모든 걸 순응하고 포기하길 원했을텐데..
문득 내가 왜 저 아내처럼 지쳐 모든 걸 순응하지 않았는지
내게 어디서 그런 전투력이 생겼는지 궁금하더라..
나르시시스트 생존자인 엄마는 아빠에게 대부분 순응하였지만 고분고분히 지지는 않았다.
한번이라도 꼭 대꾸하고 열번을 참아도 한번은 폭발을 하던지 하는 식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엄마를 닮아서
나는 나르시시스트 아빠 밑에서 자라며 전투력을 키우며 단련했다.
나르시시스트 아빠 밑에 자라 쓸데 없는 인내심을 키우며
내가 맞춰야 사랑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 없는 단련을 통해
나르시시스트 남편에게 대항하고 마침내 각성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들과 매일 피흘리며 살아남은 엄마는
지금은 무감각한 사람처럼 욕망도 기쁨도 슬픔도 크지 않은 사람이 되버렸다.
나 역시 그에게 미친듯이 대항했지만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들에는
항상 무릎을 꿇고 나의 자존심들을 다 꺾어버렸다.
나르시시스트와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전쟁으로 긴장속에 살며 방어체계를 갖춰 살아야하는것,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의 감정을 죽이고 무뎌지는 것,
기억을 지워가며 혹은 왜곡해 받아들이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는 일,
그 속에서 매일 나를 소모하며 나를 태워 결국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결정을 내렸지만 그와 분리되지 않고 지내는 매일이 흔들렸다.
도대체 그가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불안감과 불편함, 고통이 내게도 느껴졌다.
내 고통 만큼 그의 고통도 작진 않을 것이다.
고통의 종류가 달라서 그렇겠지만...
그와 내가 하나의 가정안에서 서로 노력해 좋은 부모와 부부가 되는 것,
단지 나는 그것을 바랬는데 그에게 그것이 정말 어려운 일인가보다..
고통속에서 그가 그를 버리는 것이 우리를 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나는 그가, 그는 내가, 서로 죽을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사랑하니 헤어져야한다는 드라마 내용처럼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미련이 모두 정리되지 않았지만
-물론 그가 또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으면
이내 그 맘은 증오로 바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보다 생존이 먼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