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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의 또 다른 얼굴

호남 복음의 뿌리를 찾아서

by 이순열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아래를 바라보니, 한옥의 지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문득 몇 해 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 도시 전체를 감싸던 주황빛 지붕들이 석양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던 그 장면은 정말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그 순간, 전주 한옥의 지붕 풍경 또한 피렌체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처럼 거대한 규모로 위압감을 주지도 않고, 일본처럼 엄격한 격식에 갇혀 있지도 않은,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진 우리의 지붕들은 고즈넉하면서도 따뜻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만약 개발 논리에 밀려 이곳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면, 이 소중한 풍경은 아마 교과서 속 사진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드문드문 보이는 한옥들과 전통공예 전시관 외에는 마땅한 볼거리가 없었지만, 이제는 복원된 한옥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태조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 전동성당, 풍남문 같은 명소 외에도 골목골목에서 만나는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 담벼락 아래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 걸을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고, 예전에 베네치아 수로길과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거닐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가끔 보이는 일제 강점기의 적산가옥 조차 이채롭고, 마을의 역사와 풍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느껴졌다. 물론 한옥마을의 매력은 건축물에만 있지는 않다.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 감성적인 한옥카페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시장기가 느껴지면 호떡이나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공예 전시관을 둘러보거나 부채, 빗, 한지를 만드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한옥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구성진 창 소리 공연을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전주에 올 때마다 비빔밥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전국 어디서나 있는 흔한 메뉴지만, 전주에서 맛보는 비빔밥은 품격과 깊이가 다르다. 달궈진 놋그릇에 담긴 밥 위에 고명이 화려하게 얹히고, 그 맛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조화롭다.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전주의 손맛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위해 ‘전주 기독교 근대역사기념관’을 찾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처음 알게 된 곳인데, 1890년대 미국 선교사 7인의 호남지역의 선교를 조명하는 공간이다.



지방도시에 예상보다 크고 번듯한 기독교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전시된 복음의 기록과 사진, 한글 성경 번역본을 보며 선교사들의 헌신과 믿음이 깊이 전해져왔다.



기념관 끝자락에 전시된 7인의 선발대 사진 명패에 영어 이름과 한글 이름이 함께 각인 된것을 보는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외모는 미국인 이지만 선교를 위해 뼈속 까지 조선인이 되고자 하였던 그들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자 선교사 세분의 이름은 최부인, 전부인, 이부인 이었다. 이름이 배우자를 의미하는 부인으로, 성만 다르고 모두 같은것이 흥미로왔다.



28세의 청년 테이트, 한국명 최의덕.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했다. 파송을 앞두고 그가 느꼈을 두려움,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그들은 복음 선교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까지 포함한 ‘삼각선교’로 호남 토착민에게 다가섰다. 파란눈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방인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토착민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면서 경계심을 풀게 한 뒤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의 헌신으로 6년여 만에 호남에 60여 개 교회가 세워졌고, 500명이 넘는 교인을 가진 큰 교회도 생겼다니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 역사하심의 증거다.


기념관 근처에 위치한 예수대학, 예수병원, 신흥학교도 그때 태동되어 지역사회에 복음 전파의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30년 전 그들의 헌신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오늘날 해외 오지에서 그 열매의 씨앗을 다시 뿌리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과 겹쳐지며 마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호남 땅에서, 전주가 신앙과 문화, 역사와 아름다움을 품은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감사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수도권에서 고속철도로 두 시간 거리에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음 또한 참으로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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