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해금강 가는 길 2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처럼, 거제를 여러 번 찾으면서도 해금강과 외도는 늘 발길에서 비껴 있었다. 굳이 가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앞섰고, 이번 여행에서도 배 타기를 주저하는 아내와 함께라 그저 남해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하지만 거제에 사는 후배가 권한 일정 속에 해금강과 외도가 있었다. 한여름 땡볕에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코스라 하여 따라나섰을 뿐인데, 그 길 위에서 나는 뜻밖의 감동과 마주하게 되었다.
해금강은 바다의 품 안에서 천 년, 아니 수백만 년의 시간을 견뎌온 신비였다. 파도와 바람이 새긴 기암괴석은 자연이 얼마나 오랜 세월 묵묵히 조각해 왔는지를 보여주었다. 바다 위에서 마주한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신의 작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완벽한 예술이었다.
일백 미터 이상 높이의 신이 빚은 조각상을 카메라 앵글 안에 넣어 사진으로 그 디테일과 장엄한 모습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해금강 십여분 거리의 외도에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푸른 남해를 배경으로 펼쳐진 정원은 계절의 꽃과 나무로 가득했고, 지중해풍 건물들과 대리석 조각품들이 마치 동화 속 무대를 옮겨 놓은 듯 어우러져 있었다. 무더위 속에서 길게 느껴질 줄 알았던 2시간은 오히려 너무 짧았다. 걷는 길마다 탄성이 흘러나왔고, 어느새 나는 시간마저 잊고 있었다.
보타니아 정원 곳곳의 나무들은 정성스러운 손길을 거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커다란 파라솔처럼 다듬어진 한 그루의 나무였다. 그 아래 모여든 사람들은 마치 나무의 품 안에 안긴 듯 시원한 그늘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멀리 바다와 산이 겹겹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이 한 그루의 나무는 오늘 하루의 기억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인상적인 존재였다.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앞에는 오직 수평 선 뿐인 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졌다. 거제라 하면 다도해의 중심이 되는 섬이라, 호수 위에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잔잔한 풍경만을 떠올렸는데, 이곳의 바다는 전혀 달랐다. 기암절벽에 부딪혀 솟구치는 파도 소리가 절벽 위 카페까지 메아리쳐 올 정도로 장쾌하고, 또 우렁찼다.
망망대해를 마주한 하얀 외벽의 카페는 그 자체가 외도의 방문 목적이 될 만큼 낭만이 느껴졌다.
한여름이 아니라면, 테라스에 나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의 호흡이 음악처럼 이어지는 자리에서, 그저 수평선 너머 펼쳐진 파란 세상만 바라보다가 시간이 멈추어도 좋으리를 읊조리고 싶다.
바다의 끝은 어디인지, 내 마음의 끝은 어디인지 묻듯이,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서 빙수로 그 아쉬움을 대신했다.
그러나 외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풍경 때문만이 아닌 것 같다. 1970년대 초, 한 교사 부부가 이 무인도를 사들여 20여 년 동안 흙과 바위와 씨름하며 가꿔낸 이야기가 있었다.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왜 그토록 고단한 길을 선택했을까. 처음엔 의문이 들었지만, 기념관에 걸린 두 분의 사진 앞에 서자 모든 답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간의 집념이 하나로 어우러져, 결국은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해금강의 여행은 외도가 문을 연 1995년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는 것을. 그전의 해금강은 오롯이 신이 빚어낸 조각품이었으나, 외도가 더해진 지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금강에서 자연의 위대함에 숨이 멎고, 외도에서 인간의 열정이 빚어낸 아름다움에 가슴이 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비추며 완성하는, 그 특별한 여정이 거제에 있었다.
아마도 그 부부도 처음 해금강을 바라보며 생각했을 것 같다. “신이 만들어낸 자연이 저토록 아름답다면, 우리도 이곳에 또 다른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 도전이 결국 외도의 정원을 만들었고, 오늘날 수많은 여행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해금강은 외도가 있어 더욱 빛나고, 외도는 해금강 곁에 있어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수억 년의 시간이 빚은 기암과, 한 부부의 20년 집념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 거제의 해금강과 외도는 남해가 품은 가장 눈부신 보물이자, 인간과 자연이 함께 써 내려간 한 편의 시였다.
최호숙, 이창호 부부에게 나의 오마주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