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글주의 !
첫 자유여행을 떠나기 위해 여권 발급 신청을 하며 ‘10년동안 가봤자 얼마나 가겠어’ 라는 생각으로 24매짜리 얇은 여권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3년간 알바 여행 알바 여행 알바 여행의 반복과 교환학생, 잔말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증란이 꽉 채워졌고 스페인에서 왕복 14시간 버스를 타고 재발급 신청을, 다시 14시간을 타고 여권을 교부받게 되었다. 그 길고 긴 여정 동안 지난 여권을 들여다보다가 이걸로 지난 수 년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초록색 수첩 종이에 찍힌 자그마한 도장들이 그 안에 힘들었고 고생하면서도 행복했고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했던 시간들을 담고 있었다.
새로 받은 여권은 이전 여권의 남은 유효 기간을 부여해 만든 여권이라 5년이나 10년이 아닌, 유효기간 7년 짜리 여권이다. 괜한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앞으로의 시간 동안 새 여권이 더 행복했던 기억을 머금은 흔적들로 가득 찰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 본다.
첫 장, 추가기재란.
사증란이 꽉 차면 추가기재란에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소리가 있어 여기에도 내심 찍어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 비어있는 채로 VOID 처리가 되었다.
그리고 사증란의 첫 번째 페이지.
지금은 없어진 대한민국 출국 도장 두 개와 베트남을 입출국한 흔적이 남아 있다.
맨 위의 도장은 2016년 1월 12일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면서 받은 도장이다. 바로 밑의 베트남을 가기 위해 출국한 도장이어서, 베트남 입국 도장에도 같은 날짜가 새겨져 있다.
호치민 딴손넛 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서울시립대 ACE+ 해외기업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했다. 이 때 베트남에서 활약 중인 한국 기업들을 몇 개 방문하고 얘기를 들어 보았다. 그리고 같은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베트남 교환학생 분들과도 대화를 했었는데, 동남아에 대해서 별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내가 새로운 기회를 보게 된 계기였다. 복수전공을 국제도시개발학으로 선택한 것도 이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물가가 저렴한 나라로의 여행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장은 호치민 출국 도장이다.
마지막으로 맨 밑에 있는 도장은 2016년 6월 28일 인천공항에서 출국한 흔적이다. 이 때는 사촌언니와 함께 도쿄로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었다. 시부야와 신주쿠 부근에 머무르며 맛집도 다니고 쇼핑도 하는 전형적인 일본 여행의 모습을 띄었다. 사촌언니와 둘이서 여행을 떠났던 적은 이 때가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나이의 같은 학생이다 보니 생각보다 여행 취향이 크게 엇갈리지 않아서 재미있었다.
이 때 이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츠타야 티 사이트를 방문하는 현장학습적인 일정이 있었고 책으로만 읽었던 마스다 무네아키의 기획력을 두 눈과 두 발로 돌아봤다. 내 생각들의 많은 부분이 그의 공간을 기반으로 채워졌다.
사증란의 두, 세번째 페이지.
왼쪽의 2015년 6월 26일 인천 출국 도장은 지현, 수민이와 떠났던 일주일 간의 홍콩 여행을 위한 출국 도장이다. 홍콩은 입국 비자를 작은 쪽지로 주기 때문에 별다른 입국 도장은 없다.
이 때, 홍콩을 여름에 가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더운 지방을 많이 다녀 보고 난 뒤 생각한 것은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여름에 홍콩 드래곤스 백 트레킹을 마친 후 해안가 마을에서 먹는 콜라 한 캔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는 2016년 1월 26일 김포 출국 도장은 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떠난 해외여행이었던, 교토 여행이다.
이 때 처음에 인천공항으로 출국 공항을 착각해서 정말 당황했지만 여유롭게 나갔던 덕에 김포로 다시 이동해 비행기를 다행히도 잘 탑승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항상 공항에 출국 세시간 네시간 전까지 도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이전까지는 내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불안해했던 엄마가, 이 여행에서 알아서 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서는 ‘나 어디 갈게’ ‘어 응~ 다녀와~’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전에는 너무 열심히만 살았던 엄마가 여행의 재미를 알게 되셨(다고 나는 생각하)고 이후로도 계속 엄마와 떠나는 여행, 가족 여행을 계획하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다.
생텍쥐페리는 <부모>라는 글에서 “우리 부모들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꾸며 주셨으니, 우리는 그분들의 말년을 아름답게 꾸며 드려야 한다.”고 썼다. 내가 언제나 유념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말이다.
밑의 도장은 멕시코로 교환학생을 떠나며 미국에서 환승을 했던 도장이다. 겨우 환승인데도 ESTA 비자를 받고 짐을 찾았다가 다시 부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이후로도 왠만해서는 미국 여행 혹은 미국 환승은 별로 안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때 수화물 안에서 가루녹차 봉지가 터져서 온 캐리어가 녹차 범벅이 되었고 한두달 정도 계속 녹차향이 났었다. 미국에 대한 안좋은 기억을 더해 주었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 때 경유를 하면서 반나절 정도 둘러봤던 샌프란시스코는 아름다운 해안도시였다. 그 때 트램을 타고 언덕길을 굽이굽이 올랐다 내리며 설레했었던 내 모습이 생생하다.
오른쪽의 위쪽 스티커는 앞서 말했던 엄마와의 교토 여행 입출국 사증. 간사이 공항으로 들어가고 나왔음이 쓰여 있다.
아래쪽 스티커는 2016년 2월 10일부터 2월 16일까지, 채현이와 다녀왔던 도쿄 여행이다. 피치항공을 타고 하네다공항으로 입국했다.
일주일이나 도쿄에 머무르면서 도쿄 시내는 물론이고 요코하마와 에노시마, 가마쿠라 같은 근교 도시나 온천 같은 곳도 정복했던 여행이다. 이 때 출국 전에는 심한 위통에 시달리고 중간쯤에는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서 힘들어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우에노 공원&동물원에 갔던 날 나는 벤치에 앉아 있고 (누워 있었던가?) 채현이 혼자 동물원을 돌아봤었는데 아직도 이 기억이 너무 특이하게 남아 있다.
그 옆은 도쿄로 출국했던 인천공항의 출국도장. 밤비행기여서 날짜가 하루 빠르다.
다음 페이지의 첫 번째에 있는 스티커는 2016년 6월 28일 도쿄 나리타 2터미널로 입국했던 사증이다. 앞서 말했던, 사촌언니와의 여행이고 티웨이항공을 이용했다.
그 아래는 멕시코로의 입국 도장이다. 2017년 7월 29일에 입국했다고 되어 있는데 7월 19일 멕시코시티로 입국했다가, 칸쿤을 여행하고, 쿠바로 넘어가 쿠바에서 일주일 머무른 후 멕시코에 재입국한 도장이다. 이 도장 날짜부터 멕시코 교환학생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은 지금의 나를 만든 기간이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등등 나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옆의 핑크색 도장 두 개는 페루의 입출국 도장. 2016년 12월 8일에 교환학생을 끝내고 항공입국해, 일주일 뒤인 12월 16일 에콰도르로 육로출국했다. 12월 말 쯤 페루 리마에서 로빈이와 만나 남미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약 3주간 페루 북부에서만 머무르기는 심심해서, 리마와 와라즈, 트루히요 등의 도시를 거쳐 에콰도르 쿠엔카까지 올라갔다.
옆 페이지, 2016년 7월 5일 인천공항 출국 도장은 소진이와 함께 오키나와에 갔던 출국도장이다. 바로 밑에 오키나와 나하 공항으로 입국한 사증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이 여행에서 오키나와는 반드시 렌트를 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주도 같은 느낌이라 생각해 어떻게든 뚜벅이로 되겠지 싶어 갔는데 어떻게든 되긴 했지만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이 여행의 출국 전날 과음하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칠 뻔 한 기억이 있다. 다행히 나하공항이 시내에서 트램으로 20분 정도? 아무튼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체크인 마감시간을 5분도 채 안 남기고 탑승할 수 있었다. 이 때 이후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전날은 최대한 음주를 삼가게 되었다. 당연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ㅠㅠ
그리고 그 옆은 사증은 아니지만 마추픽추 기념 도장. 여권에 찍으면 훼손으로 해외에서 입/출국이 어려울 수도 있다던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다음 페이지는 에콰도르 입출국 도장과 페루 입출국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다. 에콰도르는 정말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메인 도시인 키토나 과야킬, 혹은 갈라파고스에까지 갈 시간이 없었고 쿠엔카라는 도시에 며칠 들르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도시에서 민경이라는 나이도 같은, 혼자 여행하는 한국인 여행자와 같은 숙소에서 만나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 밑은 에콰도르에 다녀온 후 12월 20일에 다시 페루로 입국한 도장. 페루 북부 도시들을 거쳐 다시 리마로 내려와 한 숙소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그곳에서 선홍언니를 만났고 관심사도, 하고 싶은 일도 비슷해 이 언니와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민경이나 선홍언니 같은 사례를 보면 정말 인연이라는게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옆은, 리마와 쿠스코를 거쳐 2017년 1월 8일 페루를 출국한 도장이다. 육로를 통해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로 넘어갔다.
옆에는 멕시코로의 첫 입국 도장과, 이과수 호수 브라질 쪽을 보기 위해 다녀왔던 브라질 사증이 남아 있다.
브라질 사증 옆에 있는 2015년 1월 19일 인천공항 출국 도장은 처음으로 자유여행을 떠났던 기념비적인 스탬프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 전 홍콩으로 첫 자유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당시 중3이었던 동생과 둘이서 같이 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린 애들 둘이서 여행을 갔다.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지 못한 나와, 중학생이던 로빈. 둘 다 어렸던 덕에 싸우기도 엄청 싸웠지만 겨울 홍콩이 주는 분위기와 감성에 취해 여행을 본격적으로 많이 떠나게 되었다. 만약 이 때 이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귀찮아서 집에만 누워있을 것이다.
그 밑은 2016년 7월 18일, 교환학생을 위해 인천공항에서 출국했던 도장. 이 때 지구 반대편 가면 한식 못먹겠지? 하면서 인천공항 지하에서 평양냉면을 먹었었다. 그런데 교환 가서 한국에서보다 치맥 더 자주하고 한식 더 많이 먹었던듯...^^ 고향집 사장님 제가 솔직히 의자 한 개 정도는 놔드렸잖아요..!!!
한 면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이것은, 볼리비아 비자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받고 가려면 절차도 까다롭고 황열병을 맞아야 한다길래 일단 무작정 안 받고 페루로 떠났고, 많은 여행자들이 볼리비아 비자를 받는다는 쿠스코 볼리비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다. 그러면 황열병 주사를 맞을 필요도 없고, 절차도 간단하며 찾아가서 여권을 내밀면 서류 확인만 하고 바로 비자를 내어 주신다. 볼리비아 쪽에 있는 아마존 지역을 갈 것이 아니고 단순히 우유니가 목적이라면 이렇게 받는 것이 더 속도 편하고 몸도 편하다.
그 옆은 역시나 남미의 사증들이다. 볼리비아 입출국도장과 브라질 사증, 칠레 사증이 차례로 찍혀 있다. 남미 여행에 대해서는 너무 열심히 일기를 썼었으니 자세한 건 생략하고 말하자면, 남미 여행에서 무엇보다도 여실히 느끼게 된 것은 육로로 하는 여행이 생소하면서도 얼마나 편하고 좋은 일인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쪽은 북한이 있고 삼면은 바다이니 섬이나 마찬가지이고, 해외여행이라는 말이 정말 글자 그대로 바다를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미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는 절차를 여러 번 밟으면서 우리도 육로로 러시아 중국 그리고 그 이후를 넘어 더 먼 곳으로 여행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육로를 통한 북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1년이 넘게 지난 현재 긍정적으로 보이는 현재 상황을 보면서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큰 기대를 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는 분홍색 쿠바 입출국도장이 찍혀 있다. 쿠바에서 다른 도시를 돌아다니기보다 아바나에서만 일주일 가까이 머물렀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생각이나 하는 그런 여유로운 여행은 처음이라 또한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 때부터 여행을 떠났을 때 사색하는 법을 배웠다.
그 밑은 칠레 출국도장이 찍혀 있고, 양 페이지에 걸쳐 아르헨티나 입국 도장이 두 번씩 찍혀 있다. 이과수 지역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을 왔다갔다 해서 도장이 이렇게 찍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찍은 도장인, 브라질 출국 도장. 상파울루 공항에서 토고 로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홍콩을 경유해 인천에 도착했다. 이 항공편을 이용함으로써 지구를 한바퀴 빙 돌게 되었다!
그리고 브라질 사증 위에는, 잔말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2018년 4월 13일 스페인 말라가공항 입국 도장이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