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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 Dec 15. 2016

Laguna 69, 페루의 스위스

12월 10일(3일차)

아킬포에서 챙겨야 할 준비물이라고 알려 주는 목록들. 필요한 모든 걸 써 놓은 것 같다.. 미리 69호수 투어를 다녀 온 다른 투숙객에게 물어 준비물을 챙기는 게 효율적이고 좋다.

3900미터에서 출발해 4600미터까지 오르는 69호수 투어. 와라즈 여행을 계획할 때 호수의 아름다운 물 빛깔만을 생각하느라 트레킹의 난이도에 대해서는 얼마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루 먼저 투어를 다녀 온 언니의 말을 들으니까 힘들긴 한데 할 만하다고 해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고 투어를 예약했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트레킹을 시작하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해가 뜨지도 않은 어둑한 새벽, 호스텔 몇 군데 앞에 정차하면서 여행자들을 태우고, 두 시간여를 달려 트레킹 전 마지막 화장실이 있는 공간에 도착한다. 산 밑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그곳에서 아침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고산 트레킹을 할 때면 탈수증세가 오기 쉬우니까 물도 몇 병, 점심거리와 함께 구매한다.


돈을 내려고 보니 숙소에서 지갑을 침대 위에 꺼내 두고 챙기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도미토리라서 다른 여행자들도 쓰는데, 누가 지갑을 가져가면 어떡하지. 투어 하는 동안은 동행자 언니에게 돈을 빌려서 썼지만 지갑 속에 한동안 쓸 돈인 300달러가량의 현금과 카드들이 들어 있어서 계속 걱정이 됐다. 호스텔에 전화라도 해서 챙겨 달라 하려고 했지만 산속이라서 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현금의 안위만 걱정했는데 지갑을 통째로 가져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현금은 가져가도 되니 지갑이랑 카드만 남겨놔 주세요, 하고 기도하게 됐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지갑이 사라지더라도 방법이 생기겠지, 하면서 투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 식당에서 한 시간여를 더 이동하면 산 중턱에서 뜬금없이 트레킹을 시작하게 된다. 초반에는 그저 평지에다가, 햇볕도 쨍쨍히 내리쬐기 때문에 춥지도, 힘에 부치지도 않는다. 물론 그냥 걷는 것보다는 숨이 좀 차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할 만 하다’ 의 느낌이고 무엇보다도 주변 경치가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만 같아 한 번씩 돌아보며 가다 보면 이미 꽤 먼 거리를 걸어온 후다.

슬슬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내 걸음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고산 증세가 오면 주로 머리가 아프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는데 그런 느낌보다는 단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열 걸음 정도만 떼면 숨이 끝까지 차올라서 잠시 서거나 앉아서 쉬다 가야 했다. 초반에는 나름 선두에 서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꼴찌를 면하면 좋은 수준으로 계속해서 뒤처졌다. 아무래도 고산 증세 때문에 힘든 것 보다는 애초에 체력이 약해서 더 힘들었던 듯싶다.

두시간을 조금 넘게 걸었을까, 69호수까지는 고개 하나만 더 남아 있는 순간이었다. 쉬다 걷다 쉬다 걷다 하면서 호수까지 아주 조금만 남겨둔 순간이었는데 내 보폭은 평소의 5분의 1 수준으로 짧아져 있었다. 가이드가 계속해서 날 챙기다가, 높디 높은 고개를 함께 올려다보며 내 상태로는 저 곳을 오르는 데 한시간 반도 더 걸릴 거라면서 그냥 여기서 포기하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 포기하겠다고 하고 고개 밑에 있는 바위에 주저앉았다. 가이드는 먼저 고개를 올라가버렸고, 나는 호수에 도착하면 먹을 요량으로 싸 왔던 샌드위치를 꺼내 베어 물면서 고민을 했다.

69호수의 이름은 69번째로 만나는 호수여서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위 사진은 69호수 직전 호수인 68호수.

너무 힘들어서 68호수까지만 보고 돌아왔다는 블로그의 후기들, 바로 전날에도 고산 증세가 너무 심해 토하고 거의 끌려 내려왔다는 다른 여행자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내 상태를 생각하면서 내가 저곳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여기까지 왔는데 저것도 못 보고 가면, 이제 겨우 여행 3일차, 처음으로 하는 투어인데 첫 투어부터 실패하게 되면 앞으로도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전부 포기해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마주한 69호수!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풍경!

거의 20분을 그 바위에 앉아 고민했다. 고민하는 동안 몸이 충분히 쉬었던 것인지 발을 떼는 것도 아까보다는 가벼워졌고, 이 상태라면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5미터 정도를 올랐을까, 아니나 다를까 바로 숨이 차올랐다. 역시 안되겠다 싶어 다섯 발짝 정도 내려오는데 다른 여행자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가서 30초만 서있다가 내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69호수를 실제로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800미터 정도 되는 루트였지만 경사가 꽤 가팔라서 또 쉬다 걷다 쉬다 걷다, 40분이 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평지였다면 5분이면 걸어가고도 남을 거리였을 텐데, 하산하는 다른 여행자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결국 호수를 눈앞에 두게 됐다. 오르고 나면 너무 힘들고 고생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사실 그 정도로 큰 감흥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정말로 너무 너무 힘들어서 감흥이고 자시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올랐다는 인증샷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이 호수를 멍하니 쳐다보고 혹자는 입수까지 하는 동안 나는 하산하는 데에도 뒤쳐질까 싶어 다른 사람들이 풍경을 즐기고 있을 때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40분을 걸려 올라간 그 언덕을 5분 만에 내려오면서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올라갈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려가는 건 왜 이렇게 쉬운지.

그것도 잠깐이고, 결국 고산은 고산이다. 산을 내려오는 것은 숨쉬기가 힘들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닥이 돌투성이에 어떤 곳은 진창이어서, 발과 다리, 허리의 상태가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영 아니었다. 버스가 정차해 있는 곳이 저 멀리 보이는데 온 몸의 관절이 닳는 느낌이었다. 또 잠깐 멈춰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걷고, 고통스러운 하산 길을 지나서 버스에 앉으니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다리를 쭉 펴도 아프고, 구부리고 있어도 아프고, 정신은 피곤해서 계속 잠이 왔다. 자면서도 지갑 걱정에 한 번씩 깨서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하면서 다시 잠드는 것을 반복하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가자마자 방에 뛰어 들어가 보니 다행히 지갑을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고 오지는 않았고 한쪽 사이드에, 보조가방 속에 있었다. 현금도 체크해 보니 한 푼도 사라지지 않고 잘 놓여 있었고.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멕시코에서부터 데려온(?) 불짬뽕을 끓여먹으면서 밀린 예능을 보며 쉬다가 하루를 끝냈다.


29일까지 리마 위쪽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와라즈에서 할 수 있는 투어란 투어는 전부 다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69호수 투어를 하고 나니 도저히 이것보다 힘든 투어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는 69호수 난이도의 30% 정도밖에 안 된다 해서 일단 하루 더 쉬고 파스토루리 빙하 투어를 한 후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투어가 두세 가지 더 있긴 하지만 3박 4일 동안 야영하며 하는 산타크루즈 투어 같은 것들은 도저히 내 체력으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다음 여행지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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