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부터 육아까지 남편 눈으로 바라보다.
아내가 턱을 괴고 깊은 한숨을 뱉는다.
‘나 지금 깊은 생각 중이야.’라는 듯이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히고 집중하고 있는 티를 낸다.
나는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아내에게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주위에 하나둘씩 사교육인 듯 사교육이 아닌 듯 각자 나름의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소하게 학습지나 문화센터부터 시작해서 원데이 클래스,
더 나아가 학원까지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때마다 온유도 사교육을 시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고 한다.
6살이 된 온유도 이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영어학원, 미술학원, 음악학원, 태권도학원 등 배울 것들이 무수히 많아졌다.
문제는 시기이다.
아내는 수첩하나를 꺼내어 다달이 들어가는 고정비용과 ‘학원을 다니면’이라는
가정을 세워서 다시 한 달 지출을 계산한다.
아내는 내 생각은 어떤지 물어본다.
나는 자신감 있고 힘 있는 어조로 한마디 거들어 본다.
“보내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해봐.”
“무엇이든 경험해 봐야 온유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잖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온유도 이제 사교육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니...’
처음부터 우리 부부가 아이 교육에 열을 내는 부모는 아니었다.
우리도 자유와 방목을 지향하는 육아를 꿈꿔왔다.
우리 아이는 창의력이 높고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아이가 성장해 나가길 원했고,
“학원! 학원! 공부! 공부!”를 외치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대한민국 교육을 하고 있는 너희는 후진국이요.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는 선진국이라는 육아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아이의 창의적인 성장을 돕는 창의적인 부모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출산 전 아내와 음식점에서 식사 중 다른 테이블 아이가 태블릿 pc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저렇게 키우지 말자”라고 서로 다짐했던 모습과 같다.
지금은 우리 가족의 외식테이블에 핸드폰 혹은 태블릿 pc의 영상은 온유를 사로잡고 있다.
그래야만 우리 입으로 밥이 들어가고 다른 테이블에 “죄송합니다.” 사과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글 좀 늦으면 어때?”
“학원 좀 늦게 다니면 어때?”
“우리는 다른 부모들처럼 키우지 말자.”
“밝고 건강하게만 키우자.”
분명 우리도 시작은 이렇듯 그저 건강하고 밝게 크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보내왔다.
아내와 나는 온유가 하고 싶은 것을 지원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어 했다.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만의 교육관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모르는 것이 약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는 산속에 살지 않는다.
세상 모든 정보를 누리를 수 있는 곳인 도심에 살고 있다.
우리도 매일 같이 인터넷을 하고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과 소통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만의 교육관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애시당초 우리의 교육관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SNS 속에 훌륭한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부모를 보고 있자면
“저 부모는 능력이 있어서 그래.” 혹은 “저 아이는 특별하게 타고난 거야.” 라며
자기 위로를 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온유도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바로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아내의 친구가 운영하고 있던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6개월 가까이 다니고
그만두게 되었다.
피아노 전공을 한 아내가 매주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온유는 학원보다는
엄마에게 배우겠다며 엄포를 논 것이다.
아내도 아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호기롭게 직접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만큼 부모가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치원을 지나고 나면 앞으로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까지 많은 날을 교육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아이와 합을 맞춰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 중 하나이다.
벌써부터 들려오는 교육의 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과연 우리는 온유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과연 온유에게 맞는 교육은 무엇일까?
3살 때부터 해 온 자기 전 루틴이 있다.
바로 아기곰과 너구리라는 가상의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아기곰 역할은 엄마가 목소리를 내고 너구리 역할은 내가 목소리를 낸다.
이 두 동물과 온유는 동갑이고 자기 전 불이 꺼지고 온유가 아기곰과 너구리를 애타게 부르면 등장하게 된다. 이 루틴을 왜 시작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단지 온유가 이 두 동물의 등장을 굉장히 좋아하고 밤에 이루어지는 상황극 안에서는 굉장히 솔직한 속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6살이 되고 난 뒤로는 불을 끄기 전에 온유는 우리에게 묻는다.
“엄마, 아빠 솔직히 말해! 아기곰이랑 너구리 엄마가 하는 거지?
나 이제 다 알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기곰과 너구리가 등장하면 한 없이 더 대화하고 싶어 하고 헤어질 땐 아쉬움으로 잘 자라며 인사를 건넨다. 이처럼 우리 부부가 해줄 수 있는 교육은 그저 많은 대화를 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한계라고 느낀다. 남들과 똑같이 하다가는 분명 가랑이가 찢어질 것이 분명하다.
온유가 잠든 늦은 저녁 아내와 캔맥주 한잔을 나눠 먹으면서 우리의 육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자체점검을 하는 시간이다.
“여보. 우리 잘하고 있어.”
이 한마디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지극히 평범한 부모에게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아이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어찌 보며 당연한 것이다.
그저 우리는 우리 우리가 가족의 삶 속에서 행복을 1순위로 웃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잠든 온유 곁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본다.
언제 이만큼 커버렸는지 누워있는 모습만 보면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아직 키울 날이 더 많이 남았지만 지난 6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한 번만 더 기회가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사교육이라는 단어는 잠시 넣어두려고 한다.
대신 온유가 가장 좋아하고 우리 부부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
7살이 되고 8살이 되어 점점 유년기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을 먼저 해야겠다.
지금 아니면 못할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만들자고 다짐해 본다.
《대리만족의 늪》
1.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부모는 내 아이가 커서 어느 곳이든 당당하게 나서는 아이로 컸으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부모조차 그러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그러길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아이의 거울은 부모이다.
2. 내가 못 이룬 꿈을 너는 반드시 해내야 해!
드라마 혹은 우리 일상에서 부모의 못 이룬 꿈을 자녀에게 요구할 때가 많다. 물론 나도 온유가 농구선수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선택을 주지 않고 단 하나를 요구한다면 아이가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요구하나라 더 많은 경험을 만들어 주는 요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이다. 선택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부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