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던 그 사람이 왜인지 멋있게 느껴진 순간, 나도 나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나의 첫 글에도 소상히 적었지만 X와 헤어지고 나서 새롭게 정립한 몇 가지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조건 중에는 '과묵함'이 있었는데, 과묵함과 전혀 반대로 보이는 사람이 멋져 보였으니 말이다. 웃는 모습이 서글서글한 호감형 인상에 훤칠한 키, 그리고 든든한 덩치. 아무래도 과묵함이고 나발이고 동물적 본능으로 외적인 끌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난동(?)을 피우던 그가 우리 조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어, OO조 분들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OO봉사단 2기 OOO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 환영합니다. 저는 OO봉사단 지금 단장을 맡고 있는 1기 OOO입니다. 앞으로 자주 봬요~ 자 박수! 짝짝짝"
처음 보는 봉사단 분들과 합석을 하고 한두 시간쯤 더 놀고 나니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해산하려고 하는데 그의 조원 중 한 언니가 술이 떡이 된 채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지만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해 그날도 거의 맨 정신이었고, 도저히 혼자 집에 갈 수 없어 보이는 그 언니는 나랑 같은 학교, 같은 기숙사에 산다고 했었다. 이 모든 퍼즐이 삽시간에 맞춰지는 순간, 뇌의 지령을 받은 내 몸은 이미 단장 오빠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빠, 저 언니가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아까 들어보니까 저랑 같은 기숙사에 사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언니 방에 잘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언니 데려다주고 나서 카톡 드릴 테니 번호 좀 주실래요?"
"어? 어어 그래그래 핸드폰 줘봐. 조심해서 들어가고, 잘 데려다주면 카톡 하나 남겨줘~"
'오예'
22년 인생에 가장 큰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자기 몸도 못 가누는 처음 보는 언니를 부축해 택시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 통금시간이 지난지라 내가 싫어하는 사감 선생님께 한 소리 들었지만 타격감은 없었다. 그저 빨리 언니를 방에 넣어 두고 내 침대로 돌아와 단장 오빠에게 카톡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오빠 안녕하세요 저 OO예요~ OO언니는 방에 잘 데려다주고 저도 방금 들어왔어요. 걱정 마시고 푹 쉬세요! 오늘 재밌었습니다~"
카톡을 보내고는 괜스레 떨려서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 침대에 엎어두고 씻으러 갔던 나. 씻고 와서도 답장이 왔을지 안 왔을지 보는 게 괜히 긴장돼(답장 없으면 실망할테니) 바로 확인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다가, 모든 잘 준비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용기 내 카톡을 켜 보았지만 1은 없어지지 않았다.
'자나? 하긴 오빠도 술 취한 것 같았어. 그냥 자야겠다..(실망)'
오빠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게 그날이 처음이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당연히 아무런 시그널도, 관계도 없었지만 읽히지 않은 카톡에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 혼자 얼굴이 붉어진 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내일 답장이 오면 나도 최소 3시간은 안 읽을 거라고.
민망한 기분으로 잠든 다음날 아침, 수업 갈 준비를 하면서 애써 쿨한 척 하는 마음으로 카톡을 열어봤고 거기 그의 답장이 있었다. 물론, 직접 채팅창에 들어가지 않고 미리 보기로 읽었다.
- 내가 어제 집에 오자마자 바로 잠들어서 이제 봤네, 너도 잘 들어간 거지? 우리 조원 챙겨줘서 고맙고 좋은 하루 보내~
올레!!!!!
작은 답장 하나에 너무 기뻤지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무심하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에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들뜬 내색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오늘 수업 다 끝나고 늦~게 답장해야지, 생각하고는 나만 아는 신난 발걸음으로 강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