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썸남과 짝남(짝사랑남) 그 사이 어딘가
간밤에 잠을 설쳐가며 기다린 그의 카톡을 미리 보기로 확인했던 아침.
아무도 나를 지켜보는 이 없지만 너무 티 나게 좋아하기엔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애써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하면서 쿨한 척 휴대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강의실로 향했다. 지난밤 바로 없어지지 않는 카톡창의 1을 바라보면서 '쳇, 내일 답장이 오면 최소 3시간은 무시할 거야' 다짐했었지만 수업 내내 나의 온 신경은 콩밭, 아니 그의 메시지에 가 있었다. 그래도 여자가 자존심이 있지, 점심까지 다 먹고 느긋하게 답장하기로 했다.
나처럼 기다리던 이성에게 연락을 받아본 분들은 공감하실 것 같다. 카톡이 온 걸 봤는데도 바로 답장하지 않는 것 만으로 이미 내가 이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물론 나 혼자만의 줄다리기임) 친구들을 만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때에도 텐션이 높고 더 당찬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날의 내가 그랬다.
오후가 되어 막상 답장을 하려고 보니 그가 카톡으로 보낸 마지막 멘트가 마음에 걸렸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 거 아닌데 좋아하면 작은 말 하나에도 크게 고민에 빠지게 되는 그런 거.
'좋은 하루 보내? 이거 그냥 마무리 멘트 아닌가..? 내가 여기서 답장하면 대화 이어가고 싶은 것처럼 보이려나?'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일단 보내보고, 다음 답장은 5시간 뒤에 확인하면 질척거려 보이지 않을 거야 - 하고. 두 번째 카톡 내용은 아주 신중하면서도 계획적이어야 한다. 연락을 그리 기다리지 않았다는 덤덤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끊겨도 그만이라는 무신경한 느낌은 금물이고, 대놓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티가 나면 안 되지만 상대가 답장할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 오빠 오늘 수업이 바빠서 지금 봤어요ㅋㅋ 어제 언니 데려다주고 저도 바로 잠들었어용 와 오늘 날씨가 좋은데 저는 과제하러 동기들이랑 카페 ㅠㅠ
물론 과제하러 카페 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수업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와 그냥 누워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연락만 기다리는 애로 보일 것 같아 바쁜 와중이라는 걸 어필했다. 좋았어, 적당히 쿨하면서도 너무 무관심하지 않게 잘 보낸 것 같아!
그 뒤로 우리는 3-4일간 매일 n시간 텀으로 다섯 통도 안 되는 카톡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갔다. 실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누에나방이 뽑아내는 실처럼 가늘고 길게 말이다. 회식 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날 밤 이후 두 번째 만남은 없었고, 쌍방의 불타는 관심과 애정이 결여된 카톡은 날이 갈수록 루즈해져만 갔다. 어느 한쪽이 답장하지 않으면 그대로 끝날 연락이었지만 용케도 우리 둘 다 그 노잼(?) 대화를 이어는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단장 오빠가 자기는 감자탕을 좋아한다고 말했고 감자탕에 대한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는 이렇게 답했다.
- 헐 오빠 저는 감자탕 진짜 진짜 너무 사랑해요 (카카오 어피치 하트 이모티콘)
나중에 사귀고 나서 들었는데 재밌게도 단장 오빠(=구 남친=현 남편)는 이 카톡에서 내가 쓴 하트 이모티콘에 설레서 이때부터 나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감자탕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건데 말이다. 그리고 그때 즈음 나는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두 번째 만남을 추진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데..
- 아 그리고 오빠 이번주 수요일에 저희 조 조모임 할 건데 시간 되시면 오실래요? 어차피 다 아는 사람들이라 약속 없으면 오세요~~
- 아 그래? 별일 없으니 조인할게
그 주 수요일, 봉사단 조모임 당일 저녁.
우리 학교 앞 고등어구이와 닭똥집이 유명한 지하 벙커 같은 한 술집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당시에도 난 생각했었다. 아무리 다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기 조가 아닌데 조모임에 선뜻 낄 수 있나? 보통은 어색해서 안 끼지 않나? 이거 나한테 관심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아, 근데 오빠는 단장이니까 그냥 올 수도 있지 뭐..
한참 놀다가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2015년이었다. 영화관 가는 걸 그다지 즐기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흥행하는 작품들은 의무감에라도 가서 보는 나였다.
"다들 킹스맨 보셨어요? 오빠도? 오빠도? 언니도? 오 역시 나만 안 봤나 보다.. 저는 영화 잘 안 봐서 보통 누가 가자고 해야지 가요 ㅋㅋ"
개봉 첫날에 가서 보고 왔다는 조원들 틈에 혼자 아직 안 본 나, 그런데 그때 입을 연 단장오빠.
"어 나도 킹스맨 안 봤는데"
...
"엇 오빠 그럼 이번주 금요일에 저랑 킹스맨 보러 가실래여?" (별 일 아니라는 듯 쿨한 말투로)
"어 그래 ㅋㅋ"
데이트 신청을 입 밖에 낼까 말까 고민하는 데에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은 패기 있는 나였다.
2차로 우리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은 제각기 본인의 애창곡을 예약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예약도 하지 않은 건 나와 단장 오빠뿐. 그렇게 사람들의 열창을 들으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노래방에 우리 둘만 남은 시간이 있었다. 누구는 화장실 가고, 누구는 돈 뽑으러 ATM 가고, 누구는 물 사러 간다고 나간 터였다.
그 순간을 기회로 인식했는지 내 두뇌가 어느 때보다도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뇌로 생각하기 이전 내 손가락은 이미 노래방 리모컨으로 아이유의 '금요일에 만나요'를 찾아 플레이했다.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둔 여자의 본능 같은 거였다. 쐐기박기.
"우~ 이번 주 금요일~ 우~ 금요일에 시간 어때요~"
금요일 데이트 상대 앞에서 금요일에 만나요라니, 정말 영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나 자신. 올해의 꼬리치기상(?) 있으면 수상해 마땅한 나 자신. 수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용기있던 모습이 참 뿌듯하다. 짝사랑을 하고 계신 대한민국 여성분들, 모두 저처럼만 하세요. (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