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양념장, 마리나도 (Marinado)

문화가 융화된 달콤새콤매콤한 지중해 양념의 세계

by 은수자



우리는 칼국수 하나를 먹어도 다대기가 있어야 되고, 부침개를 먹을 때 초간장이 있어야 하고, 연두부를 먹을 때 파마늘 잔뜩 들어간 양념장이, 오징어 숙회를 먹을 때 초고추장이, 양배추 쌈을 먹을 땐 구수한 토장이, 쌈밥엔 우렁된장이 자리해야 하죠.


스페인 요리의 미학은 단순히 식재료의 신선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식재료의 맛을 끌어올리고 보존성을 높이며, 각 지역의 정체성을 불어넣는 **‘마리나도(Marinado)’**라는 마법의 과정이 존재합니다.


스페인의 마리나도는 단순히 고기를 연하게 만드는 수단을 넘어, 대륙과 해양, 그리고 역사가 뒤섞인 문화적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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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정복과 보존의 기록


스페인 마리나도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식초와 소금을 활용해 식재료를 보존하던 방식입니다. 두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8세기 **무어인(아랍 계열)**의 지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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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인들은 스페인에 커민, 사프란, 후추와 같은 향신료와 감귤류(레몬, 오렌지)를 들여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소금 절임이었던 마리나도를 풍부한 향의 예술로 진화시켰습니다. 이후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파프리카 가루(Pimentón)**가 더해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붉고 강렬한 스페인식 마리나도가 완성되었습니다.


2. 주요 종류와 특징


스페인의 마리나도는 지역색과 용도에 따라 확연히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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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보 (Adobo)


가장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파프리카 가루, 마늘, 오레가노, 식초를 기본으로 합니다. 붉은 빛깔과 훈연 향이 특징이며, 과거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돼지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발달했습니다.


에스카베체 (Escabeche)


사냥한 고기나 생선을 식초, 올리브유, 백포도주, 향신료(정향, 월계수 잎)에 담가 조리한 후 차갑게 식혀 먹는 방식입니다. 산미가 강해 입맛을 돋우며, 해산물 요리에 자주 쓰입니다.


알리올리 및 허브 베이스 (Alilloli & Hierbas)


지중해 연안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올리브유에 신선한 파슬리, 로즈마리, 타임, 그리고 으깬 마늘을 섞어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담백한 스타일입니다.


3. 응용 요리: 마리나도가 빚어낸 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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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도는 스페인 식탁 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됩니다.


핀초 모루노 (Pincho Moruno): 아랍의 영향을 받은 돼지고기 꼬치 요리입니다. 커민과 파프리카로 강하게 마리네이드하여 직화로 구워내는데, 스페인 전역의 바(Bar)에서 사랑받는 타파스입니다.


카소 (Cazón en Adobo): 안달루시아 지방의 별미로, 상어 고기를 식초와 향신료에 재운 뒤 튀겨낸 요리입니다. 특유의 시큼하고 짭조름한 맛이 일품입니다.


로모 엠부차도 (Lomo Embuchado): 마리네이드한 돼지 등심을 건조 숙성시킨 샤르퀴트리입니다. 고기 깊숙이 밴 양념의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4. 스페인 마리나도만의 고유한 특징



피멘톤(Pimentón)의 지배: 훈연한 파프리카 가루를 사용하여 깊은 불맛과 붉은 색감을 냅니다.


산미와 오일의 균형: 질 좋은 올리브유와 셰리 식초(Sherry Vinegar)를 사용하여 지방의 고소함과 산뜻한 끝맛을 동시에 잡습니다.


기다림의 미학: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 동안 재워두어 식재료의 섬유질을 끊고 맛을 깊숙이 침투시킵니다.



"마리나도는 스페인 요리의 '영혼'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 투박한 식재료도 마리나도를 거치면 정열적이고 복합적인 스페인의 맛을 입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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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혼의 양념, 마늘에 대해서


마늘에 진심인 한국인에게 '스페인'은 아주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유럽에서 1인당 마늘 소비량이 압도적 1위일 뿐만 아니라, 요리에서 마늘을 다루는 집착이 우리와 닮아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죠.

스페인 요리의 소울메이트, 마늘(Ajo)에 대해 알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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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의 영혼, 마늘의 위상

스페인에서 마늘은 단순한 향신료가 아니라 **요리의 기초(Base)**입니다. 스페인 요리의 핵심인 '소프리토(Sofrito)'—양파, 토마토, 마늘을 기름에 볶아 만드는 베이스—에서 마늘이 빠지는 법은 없습니다.

"마늘 없는 스페인 주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중요도가 절대적입니다.


주요 관련 요리


감바스 알 아히요 (Gambas al Ajillo):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 요리의 핵심은 올리브유에 튀기듯 익힌 '편마늘'입니다.


아호블랑코 (Ajoblanco): 마늘과 아몬드를 갈아 만든 차가운 수프로, 마늘의 알싸함을 우유처럼 부드럽게 풀어낸 요리입니다.


알리올리 (Alioli): 마늘과 올리브유를 유화시켜 만든 소스입니다. 카탈루냐 지방의 자부심이며, 빠에야나 고기 요리에 곁들입니다.


소파 데 아호 (Sopa de Ajo): 마늘과 오래된 빵, 파프리카 가루로 만드는 '마늘 수프'로 스페인의 대표적인 해장 음식이기도 합니다.


(2) 한국 vs 스페인: 마늘을 대하는 자세

두 나라 모두 마늘을 사랑하지만, 사용법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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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마늘의 '맛' 자체를 정면으로 즐긴다면, 스페인은 마늘의 **'향'**을 기름에 가두어 요리 전체에 입히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3) 마늘의 종류: 보라색의 자부심

스페인은 유럽 최대의 마늘 생산국이며, 특히 **'아호 모라도(Ajo Morado, 보라색 마늘)'**를 최고로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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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껍질에 보랏빛이 돌며, 일반 흰 마늘보다 알이 작고 단단합니다.


풍미: 알리신 함량이 높아 생으로 먹을 땐 훨씬 맵지만, 익혔을 때의 단맛과 풍미가 훨씬 깊고 진합니다.


품질 보증: '라스 페드로녜라스(Las Pedroñeras)' 지역의 보라색 마늘은 지리적 표시 보호(PGI) 인증을 받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습니다.


(4) 스페인 사람들은 얼마나 마늘을 좋아할까?

스페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마늘 애호가라 생각하지만, 한국인의 마늘 소비량(1인당 연간 약 6~7kg)을 보면 기겁하곤 합니다. 하지만 유럽 내에서는 독보적입니다.

그들은 마늘을 **'천연 약재'**로도 여깁니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마늘 수프를 먹고, 올리브유에 절인 마늘을 상비약처럼 챙기기도 하죠. "마늘 냄새가 나는 사람과는 키스하지 말라"는 영국식 격언과 달리, 스페인 식탁에서 마늘 향은 '제대로 된 요리'를 의미하는 기분 좋은 신호입니다.

한국인에게 마늘이 '필수 영양소' 같은 느낌이라면, 스페인 사람들에게 마늘은 올리브유와 함께 요리의 **'품격과 깊이'**를 결정짓는 핵심 열쇠입니다. 두 나라 모두 마늘 향이 가득한 식탁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6. 매력적인 향신료들

스페인 요리가 단순히 '재료의 맛'에만 충실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스페인 주방의 선반을 열어보면, 로마의 실용주의와 이슬람의 화려함, 그리고 신대륙의 모험이 담긴 향신료들이 줄지어 서 있죠.

스페인 요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향신료들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소개해 드릴게요.


(1) 붉은 태양의 가루, 피멘톤 (Piment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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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요리에서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단연 피멘톤입니다. 16세기 콜럼버스가 가져온 고추가 스페인의 햇살 아래서 진화한 형태죠. 특히 '라 베라(La Vera)' 지역의 것은 참나무 불에 말려 훈연 향이 배어 있는데, 이것이 스페인 요리 특유의 '깊은 감칠맛'을 만듭니다.


특성: 단맛(Dulce), 매콤한 맛(Picante), 그 중간인 달콤매콤한 맛(Agridulce) 세 종류가 있습니다.


사용법: 초리조(소시지)의 붉은색을 내거나, 풀포 아 라 가예가(문어 요리) 위에 마법 가루처럼 뿌립니다. 주의할 점은 기름에 금방 타서 쓴맛이 나기 때문에, 조리 마지막 단계에 넣거나 액체와 빨리 섞어야 합니다.



(2) 황금빛 사치, 사프란 (Azafrán)


스페인은 세계 최고의 사프란 생산지 중 하나입니다. 무어인들이 전해준 이 향신료는 '꽃의 암술'을 일일이 손으로 채취해야 해서 금보다 비싸다고 알려져 있죠. 스페인 사람들에게 사프란은 단순한 색소가 아니라 부와 정성의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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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쌉쌀하면서도 우아한 바다 향과 흙 내음이 섞인 독특한 풍미를 가졌습니다. 소량만으로도 요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사용법: **빠에야(Paella)**의 쌀알을 노란색으로 물들일 때 필수입니다. 미지근한 육수에 미리 우려내어 사용해야 향과 색이 고르게 퍼집니다.



(3) 이슬람의 유산, 커민 (Co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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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어디선가 낯익은 이국적인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데, 그 범인이 바로 커민입니다. 중동의 향기로 여겨지지만, 스페인 남부 요리에서는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특성: 강렬하고 따뜻하며 약간은 꼬릿한 느낌의 향이 식욕을 자극합니다. 육류의 잡내를 잡는 데 탁월하죠.


사용법: 앞서 언급한 **핀초 모루노(돼지고기 꼬치)**나 각종 고기 조림에 들어갑니다. 씨앗 채로 볶아 향을 낸 뒤 으깨어 쓰면 풍미가 폭발합니다.



(4) 지중해의 야생미, 오레가노와 로즈마리 (Hier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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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산등성이를 걷다 보면 발에 채이는 것이 허브입니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스페인산 허브는 향이 유난히 강하고 진합니다.


특성: 오레가노는 톡 쏘는 박하 향이 나고, 로즈마리는 소나무 같은 상쾌한 향이 특징입니다.


사용법: 오레가노는 식초와 만나 아도보(Adobo) 양념의 핵심이 되고, 로즈마리는 양고기나 토끼 고기 오븐 구이 밑에 깔아 잡내를 제거하고 숲의 향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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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숨은 조연, 마늘(Ajo)과 파슬리(Perejil)


스페인 요리에서 향신료만큼 중요한 것이 신선한 향신채입니다. 스페인 주방 어디에나 마늘 한 망과 파슬리 한 묶음은 반드시 놓여 있습니다.


특성: 마늘은 알리올리 소스의 베이스가 되고, 파슬리는 모든 요리의 마무리에 청량감을 줍니다.


사용법: 마늘과 파슬리를 올리브유와 함께 절구에 찧어 만드는 **'피카다(Picada)'**는 소스의 농도를 조절하고 풍미를 끌어올리는 스페인식 '만능 양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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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신료들을 적절히 조합하면 한국의 주방에서도 순식간에 스페인의 열정적인 풍미를 재현할 수 있습니다.


7. 스페인의 허브

스페인 요리에서 허브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요리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과 건조한 바람을 맞고 자란 스페인의 허브들은 향이 유난히 짙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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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이 집 앞 텃밭이나 창가 화분에서 가장 흔하게 키우며 즐겨 쓰는 허브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1) 파슬리 (Perejil): 스페인 주방의 주인공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허브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파슬리입니다. 한국의 대파처럼 거의 모든 요리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징: 한국에서 흔한 곱슬곱슬한 모양이 아니라, 잎이 넓고 평평한 **'이탈리안 파슬리'**를 주로 씁니다. 향이 더 강하고 식감이 부드럽기 때문이죠.


활용: 마늘과 함께 다져서 올리브유에 섞은 뒤 생선 구이나 고기 위에 뿌립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면 상인이 서비스로 한 묶음 툭 던져줄 만큼 친숙한 허브입니다.



(2) 로즈마리 (Romero): 산의 정취를 담다


스페인의 거친 들판이나 산길을 걷다 보면 가장 흔하게 만나는 야생 허브입니다.


특징: 소나무 같은 상쾌하고 강렬한 향이 특징이며, 가열해도 향이 잘 날아가지 않습니다.


활용: **빠에야(Paella)**를 만들 때 마지막에 로즈마리 한 줄기를 얹어 뜸을 들이면 쌀알에 숲의 향이 배어듭니다. 또한 양고기나 토끼 고기 같은 육류의 잡내를 잡는 데 일등 공신입니다.



(3) 타임 (Tomillo): 은은한 깊이감

로즈마리와 함께 스페인 산천 어디서나 자라는 허브로, 로즈마리보다는 향이 섬세하고 은은합니다.


특징: 작고 귀여운 잎을 가졌지만, 오래 끓이는 요리에서 깊은 풍미를 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활용: **렌틸콩 스튜(Lentejas)**나 각종 고기 조림에 들어갑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소화가 잘 안 될 때 타임을 차로 우려 마시기도 하는 일종의 '가정 상비약' 같은 존재입니다.



(4) 오레가노 (Orégano): 아도보의 파트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특히 사랑받는 허브입니다.


특징: 톡 쏘는 박하 향과 약간의 매콤한 뒷맛이 특징입니다. 건조했을 때 향이 더 진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활용: 돼지고기를 식초와 향신료에 재우는 아도보(Adobo) 양념에 빠지지 않고 들어갑니다. 피자나 토마토 베이스의 타파스 요리에도 감칠맛을 더하는 역할을 합니다.



(5) 월계수 잎 (Laurel): 묵직한 베이스 노트

스페인 가정의 찬장을 열면 반드시 들어있는 필수 아이템입니다.


특징: 생 잎보다는 말린 잎을 주로 사용하며, 은은한 나무 향과 청량감을 줍니다.


활용: 모든 종류의 국물 요리, 스튜, 콩 요리에 기본으로 들어갑니다. 심지어 해산물을 삶을 때도 비린내를 잡기 위해 한두 장 꼭 넣습니다.



* 스페인 허브 활용 꿀팁: "피카다(Picada)"

스페인 사람들은 이 허브들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피카다'**라는 방식을 자주 씁니다. 절구에 **마늘, 파슬리, 볶은 아몬드(또는 견과류)**를 넣고 찧어 페이스트처럼 만드는 것인데, 요리 마지막에 한 큰술 넣으면 풍미가 순식간에 고급스러워집니다. 일종의 양념볼의 형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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